이 공부는
말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생각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떤 능력이 필요한 게 아니야.
그런 점에서는 참 평등해요. 평등해.
많이 배운 사람이나 많이 안 배운 사람이나
더 얘기하면
지능이 높은 사람이나 지능이 낮은 사람이나
평등해, 그냥 이거는.
불교를 많이 공부한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평등해요.
자기가 다 갖추고 있는 거니까
갖추고 있는 건데
배우고 익히고 한 걸로 이걸 가리고 있을 뿐이거든.
가리고 있는
이 배움이나 익힘이나 이 버릇이
‘나’라고 우리가 착각하는 것뿐이거든.
그걸 나라고 굳게 믿고 있으니까 그걸 못 놓는 거야.
놓으면 죽을 것 같고 두려운 거지.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이 공부를 하시면서 놓아야 될
내 앞에서 내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거라니까, 두려움에.
이걸 놓으면
의지할 게 없는 것 같으니까 두려운 거예요.
텅 빈 곳에 나 혼자 놓여 있을 것 같은
이런 느낌이 있으니까
두려운 거예요.
오직 그런 게 공부하는 이 경험에서
많이 경험하고 느끼고 봤으면
현애살수다 백척간두 진일보다
이런 말이 만들어졌겠습니까?
천길만길 절벽에서 떨어져 죽지 않으려고
그냥 한 손으로 바위를 꽉 움켜쥐고
지금 바들바들 떨고 있는 거지.
이거 놓으면 죽어버리니까.
그런 말이 오죽하면 만들어졌겠냐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게 나이기 때문에
그게 하나의 생각이고, 그게 분별이고, 망상이고, 하나의 경험이다 하더라도
그게 나이기 때문에
그 털끝만한 그 하나 놓기가
죽기만큼 힘든 거예요.
어떤 사람은 두려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사람마다 느낌이라고 하는 건 다르지마는
그러니까 두렵고 답답하면
자꾸 우리는 그 두려움과 답답함을 벗어나는 어떤 딴 길을 찾거든.
이게 땡땡이야.
이거 말고 다른 방법 없을까?
좀 쉽게 가려고 하는 거.
그거를 우리가 땡땡이라고 그러잖아요.
세간에서는 잔머리라고도 하고.
자꾸 잔머리 쓰는 거지
쉽게 가는 길을 막 만드는 거지.
근데 어떤 경우에는
잔머리라기보다도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서 가고 싶어 하는
이 독립정신 같은 게 있는 분들도 있어요.
내 길
“나는 내가 이렇게 해서 꼭 이루리라” 하고 하는 독립 정신.
제가 좋게 말해서 ‘독립정신’이라고 하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라고 하는 거죠.
‘자존심’, ‘나만의 길’
이런 거는 아무래도 그렇게 단련되고 익숙해진 거사님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예요.
저 같은 사람들.
제 삶에서 꼭 해결하고 싶은 숙제니까
내 길을 만들고 싶었지, 저도.
그 고집 때문에 산에도 들어가고, 수행도 하고, 그런 거죠.
제가 그랬습니다.
정작 어찌어찌 어찌어찌 된 인연인지는 저는 모르겠지만
제 스승님 얼굴 보기도 전에
이런 가르침을 듣기도 전에
그냥 저는 제 스승님한테 배를 딱 깔았잖아요.
배를 딱 깔았어요, 처음 일이죠.
그 인연으로 제 스승님 설법을 들으면서 공부를 하다가
제가 체험을 하고 보니까
저한테 다가온 게 그거였어요.
“참, 사람들이 어리석긴 어리석구나.
석가모니 부처님, 예수님이
내 이후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자기가 부처임을
또는 자기가 하느님의 자식임을 실감하고 체험하고 공감하는데
어떤 힘도 쓸 필요가 없다.
너희는”
내가 다 해봤다 이거야.
내가 고행도 해보고 광야에 나가서 40일 단식도 해보고
다 해봤는데
본래 부처고, 본래 하느님의 자식인데
어찌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되고, 하느님의 자식이 되는 게 아니라니까
선택받는 게 아니라고.
내가 열심히 뭔가를 하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하면은 선택이 되고
놀고 마시고 살면 선택을 못 받고
그런 게 아니라고, 이 공부는.
놀고 마시든, 열심히 공부하든, 갈고닦든
본래 부처이고, 본래 하느님의 자식임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거를 가르치셨더라고.
체험하고 나서야 그런 가르침에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체험하고 나서야
‘이런 얘기를 하고 계셨구나’ 하는 걸 저는 느낀 거죠.
“너희는 힘 하나 쓸 거 없다.
애쓸 것도 없고 노력할 것도 없고
너희 생각으로 이러니 저러니 할 것도 없다.
내가 다 길을 밝혀놓았고, 등불을 밝혀놓았다.”
너희 가슴에 이 등불을 다 심어놨다는 거야.
쉽게 얘기하면 날 때부터
그게 아마 이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이 보혈, 피로 모든 사람의 이 죄를 다 닦았다.
이 말일 거예요.
그런 표현이 있잖아요. 성경에.
내 피로 너희의 원죄를 다 닦아버렸다는 거야.
죄를 다 닦아버렸는데 뭐를 할 게 있겠습니까?
불교는 그런 식으로 표현하죠.
아무리 분별하고 망상하고 전생의 죄를 하늘만큼 두텁게 쌓았다 하더라도
그 죄와 업이 우리의 이 마음의 등불을 전혀
집어삼킬 수가 없고 이걸 오염시킬 수가 없다.
아무리 전생에 많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아무 상관없다니까.
그래서 그 전생에 죄업이 있다고 해도
상속이 안 된다고 그러는 거예요.
물론 이제 상속된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 죄업에 눌려서 살겠지.
근데 그게 분별이고 망상이라고.
그래서 제가 상속되지 않는다
이런 표현을 쓰는 거예요.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는 일에도
내가 분별하고, 망상하고, 대립하고, 갈등해서
숙제가 그냥 이만큼인데
전생의 죄까지 떠 안아서 이놈을 어떻게 해야 되나, 하고 있으면
힘들어서 못 살아요.
그러니까 전생에 죄업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습니다, 상관없어요.
그게 땅과 하늘을 가득 메울 만큼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어.
왜 상관이 없냐?
전생에 죄를 지었다 해도 상관이 없어.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 죄가 우리의 본성을 오염시키지 못해.
이 얘기는 내가 지금 깨닫는데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우리의 본성은
그대로 지금 밝게 빛나고 있으니까.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의 등불은 빛나고 있는 거거든.
그러니까 그거를 확인하면 될 뿐이지
무슨 죄가 있니 없니, 나는 이러니 저러니
나는 이런 사람이니 마니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되니 저렇게 해야 되니.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라고.
이 등불은 지금도 이렇게 빛나고 있다고
이렇게 빛나고 있어요.
이거 한번 확인하시려고 그러는 거거든.
이렇게 빛나고 있는 이 등불 한번 확인하시려고 그러고..
우리가 그것 때문에 공부하는 거예요.
이 ‘나’라는 생각
‘나는 이렇다’라고 하는 생각
‘나는 이렇게 해야 되겠다’
이거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지금 이렇게 빛나고 있어요.
이렇게 빛나고 있어.
이렇게 빛나고 있어.
이렇게 빛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빛나고 있어.
그러니까 여기에는 전생도 없고, 현생도 없고, 다음생도 없어요.
죄도 없고, 업도 없고, 여기에는.
등불이 이렇게 빛나고 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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