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 그러면 그거 하나 어려운 겁니다.
너무 익숙해져서
내 의지와 내 뜻과 내 생각으로는 안 되는 거
그거 하나 어려워요.
그러니까 내 생각으로는 안 되고 내 뜻으로는 안 돼.
그러니까 어쩔 수가 없지 이렇게
가르치는 거에 귀를 기울이는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누가 뭐냐? 이거다.
부처가 뭐냐? 이거다.
여기에 귀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어.
왜?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한테 이렇게 습관화된 그 생각 분별이 있잖아요.
듣다 보면
자꾸 그 분별을 가로막고
분별을 못하게 장벽을 쳐버리거든
딱 하나만 예 들으면 돼요.
“부처가 뭡니까?”
“이겁니다” 이러면은
생각이 어디로 갑니까?
이 생각이라는 놈이 갈 데가 없어, 갈 데가.
“어” 하고 그냥 어떻게 못 해 .
그렇다고 이걸 지금 떼어갈 겁니까?
떼어가자니 이건 소리라 떼어갈 수도 없어.
그렇다고 녹음해서 이게 부처니까 이것만 계속
“이게 부처야” 하고 모시고 있을 겁니까?
물론 그렇게 깨달은 분도 있긴 있다고 그러잖아요.
절에서 불목살이하던 어느 거사님
배운 것도 없고, 집도 없고
절은 있었네. 절에서 마당 쓸고 나무하고 청소하면서 사셨으니까.
겨우 절에서 일하고 밥만 먹고 사신 거지.
근데 자기가 그 절에서 날마다 산으로 들로
나무도 해야 되고, 마당도 쓸어야 되고, 농사도 지어야 되고 이러고 돌아다니는데
스님들이 그냥 방에 들어가면 나오질 않아.
아침에 들어가면 잘 나오지 않아.
가끔 나와서 절 앞마당 한 바퀴 돌고 바로 또 들어가고.
도대체 스님들이 뭐를 하는지가 궁금했던 거예요, 이분이.
어떤 그런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고
당연히 불만은 없죠.
왜냐하면 그분의 입장에서는
스님들하고 자기는 뭐가 다르다라고 딱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근데 단지 그게 궁금했던 거야.
방에서 뭐를 하는지, 이게 궁금했던 거야.
그래서 어느 날은 스님들 들어간 방 앞에서
이렇게 서성이고 있었어요.
누구 하나 나오면 물어보려고.
그랬더니 어느 스님이 나와
“스님, 스님들은 방에 들어가서 뭘 하십니까?”
그러니까 “부처되는 공부한다”고 그랬어요.
대답해 주기가 참 힘들잖아.
근데 그래도 ‘부처되는 공부합니다’
“부처되는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렇게 물었거든.
그러니까 불법을 공부한다 하더라도
자기가 직접 이 실상에 깨달아보지 못한 입장이다, 그럼 더 겸손해야 돼요.
이 스님처럼.
“나는 아직 공부를 하고는 있는데
아직 깨닫지를 못해서
부처되는 공부가 어떤 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난 이 얘기를 해드릴 수가 없다.
궁금하시면 방장스님을 찾아가서 직접 물어봐라” 이랬어요.
방장스님은 그 절의 최고의 스님 아닙니까?
정말로 어려운 마음을 낸 거예요.
정말로 식은땀 나는 일이죠.
그래서 이 방장 스님을 어렵게 어렵게 어떻게 어떻게 찾아가게 됐어요.
“어떻게 왔느냐” 그랬더니
자초지정을 얘기한 겁니다.
“스님한테 물었더니 부처되는 공부한다고 그러는데 부처가 뭡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물었더니 이게 실화라고 그래요.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실화라고 그럽니다.
조선시대인가 그렇다고 그러는데
물었더니 그 방장 스님이 뭐라고 답을 했냐 하면
“즉심시불”이라고 답을 한 거예요.
‘즉심시불_ 즉심이 부처다, 이렇게 답을 한 거야.
근데 이 사람은 어떻게 알아들었냐?
‘짚신이 부처다’로 알아들은 거예요. 짚신이 부처다.
근데 이 말을 들었는데
자기는 도대체 알 수가 없어.
맨날 자기가 만들어서, 새끼로 만들어서 신고 다니는 거거든.
나무할 때도 그거 신고, 산에 가서 지게 지어오고
이러는 게 짚신이야.
한 일주일 신으면 다 떨어져서, 또 짚신을 삼아서 또 바꿔서 신어야 돼.
지금이야 우리 신발 하나가 막 몇십만 원씩하고 비싸니까
우리가 좀 아끼는 마음도 있고 어쩌고 뭐 이러겠지만
짚신은 쉽게 말하면 세속적으로 얘기하면, 하찮은 거잖아요.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있는 지푸라기 새끼 꿔서 만드는 건데.
그러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거야.
근데 방장 스님이 짚신이 부처라고 했으니, 부정할 수가 없잖아.
자기같이 문자도 모르고, 불교도 모르고, 공부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저 높은 방장 스님이 하신 말씀을 자기가 어떻게 부정을 해.
그러니까 이걸 부정할 수가 없어.
부정을 하면 긍정이 돼야 되는데
자기가 신고 있는 짚신을 보면 절대 부처가 아니거든.
그러니까 부정도 안 되고 긍정도 안 돼.
미쳐버리는 거지.
그렇게 3년인가를
그 말이 가슴속에 걸려 있었다고 그래요.
어느 날 이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나무를 해서 지게에 메고 이렇게 내려오는데
산은 전부 경사잖아요.
경사 산길을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넘어졌어.
넘어졌는데 한쪽 발에 있는 짚신이 벗겨져서
저 밑으로 이렇게 굴러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넘어진 김에 어쩔 수 없지, 지게는 놔두고
그 짚신이라도 자기가 내려가서 주어와야 될 거 아니야.
그래서 한쪽 짚신을 주워 오기 위해서 좀 내려가서 짚신을 딱 손으로 이렇게 잡으려고 하는 순간..
이렇게 됐어요.
짚신이 부처야,
짚신이 부처였어.
자기만 지금까지 짚신이
그냥 하찮은 천한 짚신인 줄 알고 살았던 거야.
부처가 됐다고 해도
짚신은 여전히 우리가 신고 다니는 신발이지.
근데 부처였다니까
딱 잡으려고 하는 순간
*!
이렇게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배울 것도 없고 알 것도 없어.
우리가 깨닫는 데는.
뭐 할 것도 없어.
그분이 무슨 참선방 들어가서 참선한 것도 아니고
호흡을 관찰한 것도 아니고
그냥 오로지 그냥 방장 스님이
그러니까 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믿는 마음이
우리가 공부하는 데 중요하다고 그러는 거예요.
“나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이 말이 거짓말은 아닐 거야. 진짜일 거야.”
진짜가 되려면
내가 이 말을 깨달아서 알아들어야 진짜가 되는 거지.
그게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 마음이라고 그러는 거야.
그분이 가르쳐 놓으신 말씀을
내가 직접 깨달아서 확인을 하는 거.
그 불목하신 거사님처럼.
그러니까 방장 스님이
‘즉심시불’은 한자거든. 마조스님이 가르친 거잖아요.
‘이 마음이 곧 부처다’ 이렇게 가르친 거야.
우리말로는
‘이 마음이 곧 부처다’ 한자로는 ‘즉심시불’이고
그 말이
‘이 마음이 곧 부처다’로 안 알아들어도 된다니까
그러니까 뜻을 해석할 필요가 없어요.
‘시계다.’ 그래서 시계라는 말이
‘아 이런 사물을 가리킨다’ 이렇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도가 뭐냐?
시계다.
그분처럼
“아니 시계는 시간을 가르쳐주는 게 시계인데
왜 부처를 시계라고?” 이렇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긍정도 안 되고 부정도 안 돼.
그렇다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 이 생각을 밀고 나갈 수 나간다.
그러면 공부 못하는 거고
또 무조건 믿는다.
공부 못하는 거예요, 그거는.
무조건 어떻게 믿어?
자기가 무슨 바보 천치야?
그렇다면 그렇다고 믿어야 돼?
확인을 해보셔야 돼, 확인을.
자기가 직접.
저게 진실인지 진실이 아닌지.
“깨달음이 뭐냐?” 하면
이렇게 두드리고, 손가락을 세우는지를
자기가 직접 확인을 하셔야 돼.
자기가 직접 확인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통하라고 그러는 거야.
통하는 게 확인이거든.
통하고 보면
이거지 뭐.
그냥 이거야. 그냥 이거야. 그냥 이거야. 그냥 이거야.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또는 “자기가 그렇게 알고 싶었던 이 도, 깨달음, 이 실상을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 이런 말을
여기에 통하면
도반들이 저절로 해요. 저절로 자기 입으로 해.
계속 가르치고 보여주고 있었는데
자기가 못 봤다는 거예요.
이거예요. 이 일이에요.
다른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른 건 생각할 것도 없어요.
그냥 이겁니다.
여기에 한번 이렇게 확 통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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