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를 보면 딱딱한 느낌이 듭니다.
물론 직접 만져볼 수도 있습니다.
바위라는 생각 말고
정말 바위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기법을 공부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바위의 그 본질은
인연 화합으로 생겨나
인연이 닿아 하면 사라지는
실체 없음,
즉 텅 빈 공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이 바위가 변하고 사라지며 실체 없는 공이고
그래서 이름뿐이라고 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더라도
그것은 바위와 공이라는
또 하나의 색다른 분위기의 이름을 알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이 상황은 실제로 수행자들에게
매우 험난한 산 위의 길목이자 넘기 어려운 고개입니다.
이 말이 실감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넘기도 어렵지만
넘어가려는 시도가 거듭되면서
체력이 바닥나 포기하게 되기 때문에
험난한 정도가 아니라 넘기 어렵다는 표현을 씁니다.
석두가 말하길
“언어와 동작으로는 교섭할 수 없다.”
대사가 답하길
“언어와 동작을 하지 않고 교섭도 하지 않습니다.”
“거기는 바늘을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다.”
“거기는 돌 위에다가 꽃을 재배하는 것 같습니다.”
석두가 옳다고 여겼다.
그런데 반야심경에 나오듯
구경각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말하는 [즉]이라는 단어는
공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있습니다.
즉이란 같다는 뜻입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
색과 공이 같다는 개념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도 같다는 겁니다.
저는 제 아내의 남편이기도 하고
제 아이들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남편이고 아버지일 때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같다는 것입니다.
제 아내와 아이들이 같이 앉아 밥을 먹으면서 저를 볼 때
다른 사람을 보고 있지 않은 것과 같이
저는 한 사람입니다.
당연하게도 거기에는 개념적인 사유 같은 것이 매개될 이유가 없습니다.
직접 저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똑같이 바위가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바위입니다.
“푸른 눈이 푸른 산을 마주 대하니
이 사이엔 티끌조차 끼어들지 못하네.
맑은 기운이 뼛속까지 뻔하니
이제는 깨달음마저 망상이 되네.”
왜 여기서 이런저런 해설이 필요할까요?
이 가르침의 뜻을 왜 이해하기 어려울까요?
깊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바위가
결국은 사라지는 것이라 이해해도
바위가 사라지는 데는
내가 가늠하기 힘든 수천 년, 수만 년의 시간이
암묵적으로 무의식 속에 묻혀 있습니다.
내가 헤아릴 수 없는 극미의 공간이 숨어 있습니다.
무의식적인 시공간은
내가 그 본질을 개념으로 이해한다 해도
즉각 그 실상을 보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결국 깊이 통찰하고,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것은
딱딱한 바위 그대로
바로 공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올 때는 빈손으로 왔다가 갈 때는 알몸으로 가는 것.
다시 이 밖의 사실을 묻는다면
천태산에는 돌이 있다 하리라.
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무의식적인 시간과 공간이 제거되어
본질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거리감이 없고 분리가 없습니다.
나무에서 바로 피어날 꽃을 보고
성냥에서 바로 일어날 불꽃을 봅니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성냥을 그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연기법의 무상, 무아를 통찰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생각의 틀을 허무는 수련이기도 하며
자기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면서 지키고 있는
견해, 교만, 애착을 지워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선 공부는 그런 것입니다.
왕공이 벽에 걸린 개의 그림을 가리키며 말하길
“저것도 불성이 있습니까?”
중이 대답을 못하자 왕공이 스스로 말했다.
“물릴까 조심하오.”
현실에서 꿈꾸는 자를 볼 수 없다면
꿈과 꿈꾸는 자가 분리되지 않은 것입니다.
꿈을 깨고 보면 꿈과 꿈꾸는 자는 둘이 아닙니다.
그 상태에서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설봉이 오는 것을 보고 행자가 문을 닫고 말했다.
“큰스님 들어오십시오.”
설봉이 울타리 밖에서 옷을 들여보내니
행자가 문을 열었다.
현실 속에서 모든 상호작용은
이원적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은 마치 이원적인 생각의 막이
우리의 모든 사고작용 아래에 깔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룻바닥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뛰어노는 아이와 같은 것이
우리의 사고작용입니다.
문을 닫고 들어오라 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까?
문은 닫혔고, 나는 밖에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상황이 바로
사고작용 앞에 딱 막혀 있는 상황입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을 넘어서는 특효약이 바로
연기법, 무상, 무아를 깊이 참구하고 적용하는 것인데
우리 상호작용이라는 것이 일종의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선수행은
연기법의 비어 있는 모습을
실제로 보도록 하는 적용 방식이며
개념적 이해가 아닌 직접 가리켜 보이는 방식입니다.
선 공부가 꿰뚫는 수행인 이유입니다.
“경전에서 말하길
눈으로는 색을 보지 못하고
뜻으로는 모든 법을 알지 못한다고 하니
어떤 것이 눈으로 색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귀로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이 뜻으로는 모든 법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코로 아는 것이다.”
“스님, 저는 그냥 보고 그냥 아는데
이 어찌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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