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뜻을 가진 에고를
사람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요?
에고는 무엇인가에 대해
가장 단순하면서 본질적인 정의를 내리자면
‘집중을 통해 물질세계의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입니다.
이것이 원래 에고를 만든 목적입니다.
에고가 없다면
수없이 중첩된 차원과 의식을 한꺼번에 인식하게 되기에
지금 여기라는 한 포인트에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다른 말로 시공간의 경험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물질계에서는 에고에 의해 시공간이 창조되며
시공간에 의해 에고가 더욱 공고해지는
순환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시공간 자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시공간을 의도한 근원의 의지를
무가치하게 여긴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에고가 없다면
집중된 지금, 여기, 나가 아니라
수많은 지금들, 여기들 나들을
동시에 인식하게 되기에
물질계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나라는 경계가 사라지게 되어
너무 큰 의식에 압도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의식과 동시에 물질세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에고입니다.
그러나 에고를 모든 악의 근원이라 칭하는 사람도 있으며
각자가 가진 나름대로의 부정적인 정의를
모두 에고에게 내리고 있기에
에고는 마치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처럼 다루어져 오고 있습니다.
에고에게 부정적인 의미만을 주는 것은
에고의 다른 의미를 무시하거나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없습니다.
에고에 대한 적대감은
지구의 부정적인 집단의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역시 에고를 가지고 있는 5차원적 존재들의 집단의식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은 에고의 정확한 역할을 알고 감사해야 하며
에고를 존중하고 자신의 한 부분으로 완벽히 수용하고 있습니다.
에고는 물질세계, 그리고 육체의 구조 중 하나이며
그 기능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에고는 3D 영화관에서 쓰는 안경이나
우주나 바닷속에서 그 세계를 탐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우주복이나 잠수복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사는 동안은
에고를 소멸시키는 건 불가능합니다.
없앨 수 없는 것을 없애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실망과 고통뿐입니다.
에고를 느낄 때마다 수치심과 죄책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나를 속여
마치 에고를 없앤 듯한 착각을 가지는 것뿐입니다.
바로 ‘영성 에고’의 서막이 열리는 것이죠.
물론 망각을 통해 만들어진 에고의 특성상
부정적인 경험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분리와 한계에 의해 에고는 두려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고의 부정적 특성은
부정적 믿음 체계를 가지는 것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가 다 통제해야 한다는 삶에 대한 불신
-그 무엇도 충분하지 않다는 결핍과 경쟁의식
-자신에 대한 지나친 과잉 해석이나 자기 가치의 부정으로 나타나는
자기 사랑의 부재 등등이
전부 부정적 에고가 가지는 전형적인 부정적 믿음 체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보고 전환시키며
우리는 확장과 성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고의 가치는 진정한 내가 아닌 상태가 되어 보는 것으로
진정한 나를 알아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것을 허락할 때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중립적입니다.
단 우리가 사용하기에 따라
부정적으로도 긍정적으로도 쓰이는 것입니다.
에고도 예외는 아닙니다.
에고를 긍정적으로 사용할 경우
에고는 거의 없는 듯 투명해지며
우리의 본질인 상위 자아의 속성이
보다 더 많이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유리창과도 같습니다.
유리창을 투명하게 닫고 살피듯
에고를 얼마나 투명하게 유지하느냐 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지, 에고 탓이 아닙니다.
나의 한 구석에 늘 없애야 할 존재를 감시하며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에고를 초월하고, 극복하고, 억누르고, 소멸시켜야
깨달은 존재라고 믿는 것 역시
우리의 에고입니다.
에고를 비난하고 없애려 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에고에 대한 부정적 정의를 주는
제한적인 사고에 갇힌
부정적 에고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에고는 자신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신기해하고
배우려는 의지도 아주 강합니다.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지요.
내가 성장하면 에고도 함께 성장하게 됩니다.
에고라는 의식은 존재하지만
나에게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그러니 에고에게 내 부정적 의식과 감정, 행동의 책임을 떠안기는 것보다
그것의 책임은 나에게 있음을 알아보는 것이
더 나의 변화와 성장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 안에서 나와 에고의 전쟁터를 만든다면
이것은 바깥의 현실에서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에고를 늘 못마땅하게 여기면
나는 내가 절대 만족스러울 수 없을 것입니다.
에고가 사라져야
영적인 존재가 된다고 믿는다면
누군가로부터 “당신에겐 아직도 에고가 있다”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모멸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에고는 결코 나의 유일한 면이라거나 전부는 아니지만
나의 한 부분인 것은 확실합니다.
나를 에고라 느끼게 했던 이 의식은
물론 확장되고 변화하겠지만
나와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다만 부정적이고 한정적인 에고의 경계가 사라질 뿐입니다.
나라는 정체성은
돌이 되어서도, 신이 되어서도
영원히 존재합니다.
나에게서 무언가를 버리고 제외하는 것과
수용하고 통합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성장과 확장에 가까울까요?
에고를 인정하면
언제나 진실하고 솔직한 나의 상태 역시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한 것보다
더 영적인 상태는 없습니다.
에고를
소멸시키고 극복하려는 의식은 분리
그리고 내가 더 영적인 존재가 되지 못할까 봐에서 나오는 두려움이며
이해하고 수용하는 의식은 통합이고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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