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신박한지식] 영원한 현존의 상태에 이르러 참자아를 깨닫는 방법|드높은 하늘처럼 무한한 공간처럼

Buddhastudy 2024. 9. 30. 19:41

 

 

인간 존재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존재는

하늘보다 더 넓고 공간보다 더 광활하다.

 

진리를 찾아 멀리 떠날 필요는 없다.

진리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우리의 본성이며 우리의 존재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본래

얼마나 장대한 존재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자라나며 가정, 학교, 사회 등의 환경에서 받은 교육에서 그려진 우리 모습이

우리의 참모습과는 사뭇 다를뿐더러

우리가 그 거짓된 자화상을

자기 자신으로 믿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은 깊은 자아탐구와 통찰을 통해

우리의 참자아를 직접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책

<드높은 하늘처럼 무한한 공간처럼>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최면에서 깨어나라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결정하고

자신의 현실을 잘 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저차원의 상대적 진리에 불과하다.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개인은

의식의 한 표현으로서

의식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의 하나이다.

 

이 생각은 자신에 대해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본질은 의식이다.

몸은 의식의 체험을 맛보는 데 필요한 매개체이다.

 

깊은 자아를 성찰해 본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만큼 삶의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인생을 주도해 나가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주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은

어떻게든 각각의 몸 안에서 작용하여

생각과 감각, 그리고 우리 자신이 내린 듯한 결정마저 일어나게 한다.

 

이 모든 일은

의식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데

정작 그 의식 자체는 일어나는 일

즉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몸과 자신을 동일시함은

의식이 당분간 경험해야 하는 상태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이원성의 영역을 넘어

순수한 관찰자의 의식으로서 살아간다.

 

대상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기를 계속함으로써

주위를 산만하게 하는 힘은 약해지고

더 큰 현존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중립적인 시선으로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을 가리켜 [현존]이라 부른다.

 

이것은 마음을 억눌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지켜봄의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상태는 자연스럽고 드넓으며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참자아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힘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신은 우리에게서 한 치도 떨어져 있지 않는다.

신은 결코 우리와 분리될 수 없으며

신은 우리 존재의 핵심이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을 내 안에서 발견하라.

부처님은 불교도가 아니었고, 예수님은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우리를 부르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내면의 참자아다.

 

자아탐구의 길을 걷다 보면

여러 표현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니

어느 한 가지 가르침만 절대 인양 따르려고 하지 말라.

고요한 가운데 그저 바라보라.

그러면 그 관찰자가 에고가 아닌

순수한 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에고에게도 지켜보는 능력이 있지만

에고는 이해타산을 따져가며 지켜본다.

 

이를 깨닫는 순간

에고 뒤로 더 깊은 공간이 열리고,

우리는 순수한 관찰자의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이 순수한 관찰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며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현존의식이다.

 

각각의 문화는 그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

어떤 기대나 금지사항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야망을 품게 한다.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어릴 적의 가족이나 사회가 주입한 신념에 도전하거나 그것에서 벗어난다.

 

그리스도나 붓다라고 불리는 분들은

이 모든 조건화를 초월했다.

그러나 이분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그럼, 그분들이 우리와 달랐던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그분들이

나는 개인이다라는 제일 근본적인 조건화를 포함하여

모든 조건화의 한계를 초월했고

참자아 발견을 가로막는 듯한

모든 것의 최면에서 깨어났다는 것뿐이다.

 

만일 세상에 종교가 하나밖에 없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잘못된 일이고 끔찍한 일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상상도 못할 역대 최악의 독재가 일어날 것이다.

 

인류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한

우리에게는 모든 종교가 다 필요하다.

각 종교는 저마다 다른 각도에서

뭔가 다른 것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보편적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일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날마다 우리의 의식은

세 가지 상태를 돌아가며 반복한다.

 

깊이 잠든 상태

꿈을 꾸는 상태

깨어있는 상태가 그것이다.

 

우리는 깨어있는 상태

우리의 삶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삶과 우리의 모든 경험, 자기 자신이라는 느낌까지도

모두 깨어있는 상태의 내용물이자 연극일 뿐이다.

 

우리가 삶에서 보는 모든 것은

신의 자궁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신은 좋고 싫음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삶 속에서 고정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가능성의 영역 안에 존재하며

우리 내면의 삶의 질과 내용은

이를 인지하는 우리 자신이

바로 누구인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극 속에 등장하는 연기자인 동시에

가장 열중해서 연극을 지켜보는 관객이다.

 

마음과 연관된 것들을 모두 내려놓아라.

모든 의도, 중요한 날짜, 예약, 약속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고

텅 빈 상태로 머물러라.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다는 감각을 느껴보라.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창조하고 만들 수 있으나

참자아만큼은 창조할 수 없다.

참자아는 이미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은 상상과 투영, 그리고 판단에 중독되어 있다.

우리의 몸과 개성을 우리 자신으로 동일시한 순간이 바로

은총을 잃은 순간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실수라고 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경험하도록

또 다양성을 맛보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다 신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자화상에 갇힌 채로

계속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참된 존재로 깨어나기 위해

태어났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기 위해서

개인이 경험하는 모든 외견상의 문제나 장애를 제거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장애물을 제거한다고 해도

또 다른 장애물이 금세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내가 경험하는 삶이 안정되어야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오해에

여전히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동적인 삶 속의 문제들을 무시해야 한다거나

그런 문제들을 풀려는 노력이 의미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참된 자리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그 문제들을 탐구해 볼 수 있지만

우리의 참된 자리가 명확해짐에 따라

문제들은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다.

 

모든 문제는 상상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만 실재한다.

우리에게 문제거리나 걱정거리로 보이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의식의 관점에서 우리의 문제를 보기 시작하면

전에는 어렵게 느껴졌던 것이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우리의 역동적인 삶이 완벽해지지는 않는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의 역동적인 삶은 계속 성숙을 거듭해 나간다.

 

삶은 우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대본이 쓰이고,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가 정해진 대본을 고수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삶에 절대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자유로운 사람은 단지 삶을 순리대로 살아갈 뿐이다.

 

 

--세상 속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말라

 

참자아를 깨닫는 것은

멋진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몸이 있는 한, 우리는 경험을 피할 수 없다.

참자아는 모든 것의 근원이기 때문에 돈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러니 영성을 추구하면

돈을 못 벌 것이라는 생각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설령 빈털털이가 된다고 해도

그때 우리는 돈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얻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파산을 겪고 나서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참자아보다

물질을 소유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부여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결정하느라 항상 바쁘다면

확실히 그런 강박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런가 하면 결정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결정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이런 미적거리는 태도가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미 모든 운명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궁극적으로 선택이란 건 없다는 생각에서 그러는 것이다.

 

우리는 양쪽 모두를 살펴보아야 한다.

모든 것은 운명이 정해져 있기에

선택이란 불가능하다고 설교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다는

감각 속에서 살아가게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삶을 점차 직관적으로 대하게 될수록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와 신의 의지가

더불어 함께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은 그저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의 감각 스위치를 켜는 사람은 없다.

감각은 저절로 작동한다.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지각을 작동시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참자아로서 머물 때

우리는 삶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어나는 모든 행동은 우주의 행동이다.

 

그럼에도 몸이 여기 있는 한

선택은 우리를 인도해 주는 내비게이션처럼 나타날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깨달은 존재는

몇 명밖에 없다는 생각은 진실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그들을 알아볼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을 뿐이다.

 

늘 이 세상에는

깨달은 존재가 많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생이 힘들고 외롭다고 느껴지는가?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혼자이다.

그러나 참자아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혼자인 나 자신이

곧 우주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