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42] 깨달음이라는 병(feat.오안五眼) | 자기를 돌아보라

Buddhastudy 2024. 10. 2. 19:45

 

 

인간한테는 5가지 눈이 있다.

근데 5가지 눈을

육조단경에 가장 중요한 첫 부분부터 시작해서

오안을 잘 설명해 놨어요.

오안을 당정에서 어떻게 말을 했는가? 하는 것이

공부에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념 특강으로, 1학기 마지막 1시간을

오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인간한테 오안이 있다.

근데 알고 보면 하나다예요.

깨닫고 나면 하나예요.

 

근데 완전히 눈을 떠서 깨달으면 하나인데

하나가 되기까지

이런 단계를 또 거치는 거예요.

 

일반인들은 육안으로 살아요.

육안은 한마디로 말하면 선악과예요. 선악과.

그래서 분별심이에요.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거의 육안으로 사는데

육안은 분별심에 의해서

현상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는 상태예요.

이 본질은 모르고

이 세상에는 현상만 있는 줄 알고

그러면 현상은 분별되는 세계예요.

 

그래서 이런 분별심에 빠져 있는 사람의 특징은

그 사람의 육안은 삼독에 젖어 있어요.

세 가지 독, 삼독.

삼독이 불교교리인데

저 같으면, 나를 이해하는데 삼독이 굉장히 도움이 돼요.

자기를 이해할 때

다시 말하면 자기의 에고를 이해할 때

에고가 삼독이구나하는 거를 아주 명료하게 이해하게 돼요.

 

그래서 이런 개념들은 익혀 두시면

자기를 돌아봐서

지금 내가 삼독의 패턴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구나하고

알 수 있게 되는, 그런 좋은 공부 재료가 됩니다.

 

삼독은 탐진치예요.

-탐은 탐심, 욕심

-진은 미워할 진, 정확하게 말하면 눈 흘길 진이에요.

그 한자 자체가 눈 목자가 들어 있어.

그래서 눈 흘긴다, 미워한다

그래서 탐하고 진은 붙어 있어요.

이게 서로 반대라서 항상 한 쌍을 이루고 움직여요.

-치는 어리석음이에요.

어리석음은 본질을 모르고, 현상 현상밖에 모르는 것,

 

요게 탐진치

치는 무명인 거죠.

12연기로 따지면 무명이 치예요.

 

그러면 그러면 이 어리석음

어리석음에서 치의 내용이 분별이에요.

분별 치의 내용이 분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군가를 대하자마자

벌써 그 사람이 나의 기준에 의해서

좋다, 나쁘다가 정해지는 거죠.

 

그러면 나의 기준이 치고, , 어리석음이고

그리고 그 사람이 좋아 보이면 바로 탐심이 일어나고

그 사람이 좀 마음에 안 들면 치심이 벌어지는 거죠.

이게 지금 인간 심리의 가장 기본이에요.

 

그래서 이 중생계를 이해할 때는

탐진치를 알아야 돼요.

저는 탐진치 공부가 우리 공부의 반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공부가

깨달음과 마음 치유잖아요.

그럼 깨달음은 본질을 깨닫는 거고

마음 치유는 현상에 대한 집착을 치유하는 거예요.

그러면 현상에 대한 집착의 내용이 탐진치예요.

 

깨닫고 난 뒤에도 탐진치 삼독은 여전해요.

이해되세요?

깨닫고 난 뒤에도 탐진치는 여전히 뿌리 깊어요.

 

 

깨달음이 어떻게 변하는가?

깨닫고 나면 깨달았는데 아직 탐진치는 있어요.

잠복해 있어요. 오케이?

지금 여기도 많은 분들이 해당되기 때문에 지금 말씀드리는 거예요.

 

깨달았는데 탐진치는 있어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깨달음을 다시 탐진치해요.

 

그래서 이 탐이 식색명의 대상이잖아요.

깨달음을 명예에 놓아요.

에고가 깨달음을 자기 이름을 빛나는, 자기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걸로

이 깨달음을 삼아요.

참 귀신같이

에고가 깨달았어?” 하고

막 부추겨쵸, 안에서

깨달았단 말이지하고 막 부추겨요.

그래서 깨달음에 대한 집착을 정말 무섭게 해요.

 

근데 이거 돌아보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스승 없으면 안 돼.

이 마음공부 깨달음 공부에는

반드시 스승이 있어야 돼요.

스승의 역할은 그거를 지적해 주는 거예요.

 

의식 깨닫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지금 이거예요. 이거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이걸 깨닫고 나면

깨달은 에고가 딱 붙어서

요 깨달음을 미화하는데 굉장히 거기에 정성을 들려요.

사람들은 몰라.

 

그래서 가장 많이 빠지는

깨달음 이후에 가장 많이 빠지는 병은

이걸 깨달음의 병이라 그래요.

이걸 아예 이름이 있어요.

깨달음의 병을 고질병이라고 해서 모병이라고 해요.

털 모.

 

옛날 스님들 본문에 보면

깨닫는 건 좋은데 깨달음이 모병으로 변한단 말이지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모병이라는 아주 고질병이 있는데

이거는 뭐냐 하면

깨달음을 특별한 것으로 잡아요.

그래서 특별한 기견

다른 사람들은 몰라 이거를

이거 나만 알아.

 

그러니까 깨달음을 특별하게 만드는 거

그래야 에고가 자기가 특별해져요, 이해되세요?

깨달음을 특별하게 만들어서

에고도 덩달아서 올라가려고 해.

그래서 아주 특별한 걸로 만들어요.

 

특별한 건 두 가지예요.

-하나는 남은 모르는 경지

이 경지를 지견이라고도 해요.

경지, 경지라는 말 이해되세요?

어떤 특별한 경지를 추구하고 있어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못 가는 깊은 경지.

 

경지라는 건 뭐냐 하면

의식에 스펙트럼이 있어요.

우리가 우울할 때는 에너지 의식의 에너지가 낮아요.

그리고 아주 지복감이라고 하는

굉장히 평화로운 그런 의식 상태는 에너지가 굉장히 높아요.

그래서 낮은 에너지에서 높은 에너지로 가려고 하고

그 수단을 선정삼매라고 하는 걸로 삼아요.

 

그러면 보세요.

여기서 현상은

의식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것은 의식의 현상이에요.

파도가

키 작은 파도가 있고, 키 큰 파도가 있고

이런 식이에요.

 

근데 우울한 의식도 의식이고

지복감이 넘치는 의식도 의식이라서

본질은 의식은 같아요.

근데 그 의식의 상태는 현상이에요.

상황 이해되세요?

 

근데 부처님이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깨닫고 났더니

의식은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평등하더라.

 

무상.

현상에서는 낮고 높은 게 있지만 본질은 무상이에요.

본질은 높고 낮은 게 없어.

무상.

, 바른

, 평등한 각

무상정등각

안욕다라삼먁삼보리, 보리가 각이고.

무상정등

각 본질은 높다 낮다가 없고

그리고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에요.

 

이거는 기준이 뭐냐 하면

평등의 기준이에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만 돼요.

그게 기준이에요.

 

그럼 평등하려면

보편적이어야 되고, 그리고 일반적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일반적인 의식은

그냥 지금 맹숭맹숭한 이 의식이에요.

 

지나가는 사람들 의식 다, 맹숭맹숭한 상태

그게 놀랍게도

그게 지금 본질인 거예요.

 

근데 많은 사람은 거기서 만족을 못해요.

탐진치는 의식이 깨달음이구나하고 알아도

이 평범한 데서 만족할 수가 없어요.

상황 이해되세요?

 

탐심은 정말 뿌리 깊어요.

이거 절대로 마음...

우리 인간의 육안을

이거 쉽게 보면, 퉁치면 안 돼요. 한마디로 말해서.

정말 끈질긴 거예요.

그래서 의식을 깨달아도

이것에 만족 못 하고 또 무언가를 찾아.

 

해안까지는 육안을 못 이겨요.

그래서 다시 끄집어 내려버려, 육안이.

 

법안으로 넘어가야지 비로소 후퇴하지 않아요.

그래서 법안이 중요한 기준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육안이 끌어당긴다, 끌어내린다

이 말 이해되셨나요?

 

육안은 탐진치 삼독인데

탐만 해도 지금 이렇잖아요.

또 이게 시기질투로 들어가면

또 인간이 그 파란만장한 시기질투의 세계는 또 굉장하거든요.

이 깨달음에서도 시기 질투가 엄청나요.

 

육조 혜능 스님은

자기 선배들로부터 추격을 당해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요.

그러니까 그 질투도 엄청나다이 말도 이해되죠?

 

그러니까 이런 어리석음이

육안의 힘이 강한 거

분별심이 강한 거

탐진치의 어리석음이

우리로 하여금 발목을 잡고 있다.

 

그래서 처방이 뭐냐 하면

법안이 뭐냐 하면

법안이 뭐냐?

법안은 깨달음을 버리는 거예요.

 

보세요.

깨달음이 있으면

깨닫지 못함도 있죠. 맞아요?

그러면 여전히 이분법의 세계에 떨어진 거예요.

 

법안부터는 불이법이에요.

불이법

법안이 불이법

천안 혜안까지는 여전히 이분법이에요.

 

그래서 깨달음을 쥐고 있으면 여전히 이분법이에요.

이해되세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대상으로 있는 한은

주관으로서의 에고도 같이 존재해야 해요.

 

그러니까 나는 깨달았다

이게 깨달음이다

그래서 암암리에

 

다시 말하면

이게 의식이다하고

의식의 또렷또렷한 부분

그거를 이것하고 찾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러면 또렷또렷한 의식이라고

잡는 에고가 있다.

뒤에 도사리고 있다, 숨어 있다.

 

그러니까 또렷또렷하고 자시고 간에

다 놓아야지.

다시 말하면

법안이라는 것은 법을 버리는 거예요.

법을 버려야 에고가 떨어져 나가

이거를 꼭지가 떨어진다고 표현을 해요.

깨달음에 대한 욕심

공부 일이니까.

 

그래서 그거를 넘으려면

깨달음을 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보나 마나

지금 두 가지를 집착하고 있는 거예요.

공부인은 돌아봐야 돼요.

 

첫 번째는

깨달음을 언어로 정형화시켜서 소유하려고 해요.

 

여러분, 자기를 보세요.

계속 지금 정리해서

지금 이런 거다, 이런 거다 하고 요약해서

다 소유하려고 하고 있다.

그게 에고다.

 

그래서 나중에는

근데 재밌는 거는

정리를 하고 버려야 돼요.

이것도 참 아이러니합니다.

버리려고 정리하는 거예요.

 

그런데 정리도 안 해놓고 버린다는 것도

말이 또 안 돼.

 

그러니까 하여튼 알아서 새기세요.

그러니까 탐진치라는 것이 무섭다.

진리조차도 탐한다.

 

그래서 살불살조라는 말이

임제가 한 말인데

부처를 죽이고, 또 스승을 죽인다.

이래야

자기가 쥐고 있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