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치 삼독을 삼학으로 바꾼다.
삼학은
탐, 계로
진, 미워하는 것은 정으로
어리석음은 반야지혜로
그래서 삼학, 계정혜戒定慧로 바꾸는 거예요.
이 개정혜 삼학이 뭐냐 하면 팔정도예요. 팔정도
실제로 팔정도가 계정혜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이 팔정도를 실천해서
그래서 이치에 통달하고 실제로 실천도 하고
평소에 깨어 있는 훈련을 꾸준하게 하는 거예요.
그 깨어 있는 훈련의 가장 중요한 점은
[자기 생각을 보기]
생각에 끄달려 가면 깨어 있지 못하고
생각을 보면
거의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돼요.
그러니까 생각으로 빠져나와 있는 연습을
평소에 부지런히 해둬야 돼요.
이게 정定
정定을 익힌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함께 모여서
계속 참선하는 시간을 가지고, 집중 수행도 하고 하는 전체 목적이
정을 익히는 거예요.
그래서 정을 익혀둬야
흔들릴 때, 빨리 안정을 찾을 수 있어요.
이거 해보면 알아요.
이거는 말이 필요 없어요.
경계가 왔을 때
내 마음이 얼마나 흔들리는가?
그거는 평소에 정을 익힌 사람은
잠깐 그러고 말아요.
그리고 그래야만이 올바른 판단이 나와.
모든 경계에서.
하여튼 탐진치라는 말
계정혜 지혜,
치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뀌는 것.
그래서 불교는
탐진치 삼독을 계정혜 삼학으로 바꾸는 게 불교예요.
그 바꾸는 과정이
천안, 혜안, 법안, 불안이다, 이거예요.
육안을 다스리는 과정이
이 공부가 펼쳐지는 거다.
그래서 출발을 잊으면 안 돼.
나의 출발은 탐진치 삼독을
현재 내가 지배당하고 있다는 이 현실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이게 고통이에요.
고통의 해결
처음에 천안은
오조 스님이
“게송을 지어와라
본질을 본 사람이라면 이 조사의 지위를 물려주겠다” 했잖아요.
그래서 신수라고 하는, 제일 나이 많은,
나이 많고 학식도 높은 사람이 이런 시를 지었어요.
“마음은 보리수요 심여명경대,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명경, 맑은 거울과 같다, 명경대와 같다.
시시, 때때로
근, 부지런히 불식은 털고 닦아서
그러니까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맑은 거울 같다.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물사야진애, 물은 하지 말도록
야진애, 먼지 티끌이 끼지 않도록 하자.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 티끌이 끼지 않도록 하자.
이게 이제 신수의 게송이에요.
그래서 이게 지금 천안이에요.
그러니까 천안은 뭐냐 하면
육도윤회 안에서
삼악도가 있고, 삼선도가 있어요, 육도 안에
삼악도는 지옥, 아귀, 축생
그 위에 삼선도는 아수라, 인간, 천상
그러면 인간은 6층 아파트에서 지금 5층에 살아요.
인간도 꽤 고위층이다. 그죠?
5층에 살아요, 지금.
근데 천안은 뭐냐 하면 6층으로 올라가는 것.
인간 위가 천상이에요.
천상으로 올라가기
이게 지금 천안이에요.
그러면 천상으로 올라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 육도윤회 중에서
아래는 마음이 더럽고, 위로 올라갈수록 깨끗해요.
그러면 이 마음을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마음은 거울과 같은데
거울에 낀 때를 부지런히 들고 닦아서
깨끗하게 하면 천상으로 올라간다.
이게 천안을 뜬다는 뜻이에요.
천안이라는 말은
천상을 보는 눈, 올라가야 뜨지.
그러니까 천안이라는 말은
육도윤회 안에서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
인간계에서 천상계로 올라간다.
이게 지금 천안이에요.
그리고 그 방법은
부지런히 내 마음을 털고 닦는다.
이게 일반적인 공부예요.
여기까지가 현상계 안에서의 공부예요.
이것도 중요해요.
이것도 그냥 퉁치면 안 돼요.
실제로 부지런히 자기 마음을 보고
때가 끼어 있는 것을
항상 이렇게 눈 떠서 관찰하는 그 세월을 보내야 돼요.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나?
천안의 경지를
구방심이라고, 유교에서, 맹자의 말이에요.
방심, 집 나간 마음을
구, 구한다 찾는다, 그래서 데리고 온다.
이게 천안이라고 하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경지예요.
그러니까 ”지금 내 마음이 어디론가 나갔다“이 말은
이런 현상의 어딘가에 한눈 팔아서 그리로 집착하고 있다.
마음이 나갔다, 집착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거는 얼른 정신 차려서 그 집착을 놓고 돌아오라 이거예요.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공부라면
불교의 공부는 그게 아니다 이거예요.
유교와 불교의 차이점
이거를 다꾸앙 선사가
일본에 지배 계급 지식인들에게
유교와 불교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유교는 [구방심], 집 나간 마음을 구해서 찾아오는 거라면
[요방심]은 다시 놓아라.
깨달음을 쥐고 있으면 여전히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게 마음이 굳어져서 제가 꼰대가 된다라고 표현을 했는데
약간 경직돼 있어요.
왜냐하면 지켜야 할 뭐가 있어.
지켜야 할, 자기 마음이라도 마음을 지키고 있으면 이게 경직돼요.
그래서 불교는 찾아온 마음을 다시 놓는 거예요.
그래서 완전히 풀어놓아도 자유롭게
다시 말하면 [구방심]은 뭐냐 하면
세간에서 깨끗한 출세간으로 가기예요.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가기
세간에 대한 집착을 놓고 출세간으로 가기
[요방심]은 뭐냐 하면
출세간도 놓기.
왜냐하면 출세간이라고 하면
자기도 모르게 출세간에도 집착하면
그러면 세간하고 출세간이 항상 나눠져서
자기는 깨끗한 데 집착하는 거예요.
일반인들이 넋 놓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넋 놓고 사는 넋을 찾아와라.
그리고 찾아온 사람한테는 넋에 집착하면 안 된다, 놓아라.
그래서 이 넋이 자유롭게 흘러 통하게.
다시 말하면
세간에도 집착하면 안 되지만
출세간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출세간이 다시 에고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
집착하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이게 요방심이에요.
다시 마음을 놓아라, 풀어놓아라.
이게 진리라고 해서 붙잡고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그런 과정인데
천안은 이렇게 마음을 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하자 하니까
이제 육조가 등장해서
천안은 신수라고 하는 분의 시예요.
근데 이건 아직까지 현상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그래서 육조가 말하기를
마음은 보리의 나무다 하니까
보리,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다.
명경, 맑은 겨울 역시 대가 아니다.
경대 그러잖아요. 테두리
맑은 거울이라는 것도 대가 없다.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것은 나무가 아니다.
보리수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본래무일물, 본질에는 한 물건도 없다.
여러분 의식에
나무가 있어요? 테두리가 있어요? 아니면 한 물건도 없어요?
이게 안목의 차이예요.
한 물건도 없어서 하처야진애
어디에 티끌이 낀단 말인가?
‘티끌이 낀다’ 이 말은
이분법이 아직까지 현상계에서 못 벗어난 소식.
그러니까 한 물건도 없는 본질로 나가야 한다.
이게 해탈의 소식을 보여준 거예요.
현상계 안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아니라
현상계 자체를 해탈하는 거다.
한 물건도 없는 본질을 깨닫는다, 이게 [혜안]이에요.
그런데 혜안은 천안에 대해서
이게 아직까지 유심의 입장이라면
혜안은 여기에 대한 반대말이죠.
무심이에요.
(보리본무수, 명경역비태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
이 내용은 무심을 말하고 있어서
다시 말하면 무심은 유심의 반대로서의 무심이라서
아직 완전한 무심이 아니다.
이 말 이해돼요?
신수 스님의 유심을 부정하면서
반대로 무심을 말했기 때문에
이걸 한번 부정하는 무심이라서
아직도 상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 무심은 아직까지 완전한 무심이 아니라
상대 속에서의 무심이다.
이해되나요?
근데 한 번 더 깨달아요. 육조가.
그때 하는 소리는 이게 제일 중요해요.
(하기자성 능생만법)
어떻게 기도했겠습니까?
스스로에 있는 본질이 능생만법,
만법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만법을 낳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기대했겠습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본질에서 현상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위에는 본래 (무일물)은 텅 빈 본질을 말하고.
(본래무일물)은 텅 빈 본질을 말하고
아직까지 본질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거고
여기서는 (능색만법)
그 본질에서 이 삼라만상이 이렇게 일어나고 있어서
본질은 본질로 안 있고 현상으로 이렇게 나투고 있구나.
이게 지금 평상심의 세계
여기서 한 번 더 들어갔다.
이해됐나요?
본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이 현상의 세계로 다시 돌아나왔다 이거예요.
그리고 [불안]은 부처의 눈을
육제 능이 우리가 배운 거예요. 첫 시간에 배웠어요.
육조혜능 스님이 단경에서 첫 시간에
완전히 깨닫고 모든 걸 소화시킨 다음에 한 말씀은
(보리자성), 깨어 있는 우리들의 의식은
(본래청정), 본래부터 청정하다.
(단용차심), 다만 이 의식을 쓰는 것이니까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다만 이 마음을, 이 의식을 쓰는 것뿐이니까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의식이 하는 거니까
(직료성불), 직료 곧바로, 료는 깨달음이에요.
곧바로 깨달아서 성불을 바친다.
그러니까 완전히 이제는 현상이니 본질이니 하는 이런 것도 없고
그냥 현상이고 본질이고 전부 다 의식 하나가
다만 지금,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 의식 하나를 그냥 쓰는 것뿐이다,
인생이라는 거는.
그러니까 이거를 바로 직료, 곧바로 깨달아서
본래성불이라는 거를 해 마치는 거다.
그러니까 이거는 정말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
완전히 잠에서 깨버리니까
본래부터 지지고 볶는 거는 환상이고
실제로는 의식 하나가 이렇게 그냥 드러나는 것뿐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이 의식을 가지고 쓰고 있기 때문에
본래 깨달아 있고, 본래 성불해 마치고 있다.
그러니까 진짜 무서운 소리예요.
시원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완전히 이 모든 것을 통달한 사람이 하는 소리.
이거는 (단용차심),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다만 의식이 하는 것일 뿐
에고고 뭐고 없다 이거예요.
그냥 그건 꿈속의 이야기다.
꿈을 깨니까 꿈은 없어.
깨어 있는 의식 하나뿐.
인간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다만 의식 하나가 움직이는 것뿐이니까
(직료), 곧바로 깨달아서 성불해 마쳐 있는 것.
모든 사람이 이미 부처다, 이 말이에요.
[육안]은 완전히 잠 속에 눈,
[천안]은 잠 속에서 제일 좋은 데 가는 눈.
여러분, 꿈속에서 제일 좋은 데 간 게 천안
[혜안]은 꿈속에서 살짝 깬 세계를 보는 거.
[법안]은 깨어서 아직도 꿈에 대한 미련이 좀 남아, 깨어서 꿈을 돌이키는 본 것
[불안]은 완전히 깨어서
깨달음도 없고, 닦음 없고, 그냥 의식 하나뿐이라서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고, 이미 성불해 마쳤고
모든 것이 의식 하나밖에 없다 이 말이에요.
일체유심조하고 같은 말이에요.
일체가 의식 하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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