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중요한 건 이거예요.
‘뿐’이라는 것도 생각이라는 거예요. 안 그래요?
‘그럴 뿐이다’라는 것도 생각이잖아. 그죠?
그래서 선이라고 하는 게
‘선’, 우리가 참선한다 할 때 이 ‘선’이라고 하는 게
모든 매사의 본질을
단순하게, 가장 단순하게 보자는 얘기 아니에요. 그죠?
‘뿐’이라고 하면 모든 생각을 다 단순하게 만들죠.
그렇지만 ‘뿐’이라는 생각은 아직 남아있잖아.
그래서 그것마저 없앤 게 ‘즉’이에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뿐’으로 시작해야 돼요.
처음에는 여러분은 ‘즉’을 모릅니다.
‘즉’이라는 게 어떤 거냐면
생각이 뚝 끊어졌는데
바로 그냥 즉각 보고 아는 게 ‘즉’이에요.
이거예요. 이거.
여러분 이게 무슨 생각이 들어요?
그냥 즉각 보고 알았죠.
근데 “진리가 무엇입니까?” 했더니
이렇게 하면
이미 자기는 즉각 보고 알았는데
이게 있는 그대로를 본 건데
생각이 이거를 해석하려고 들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어려워지는 거야.
“저게 뭔 뜻이지?”
생각이 알고자 하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거야.
선문답이라는 게 뭐냐?
“네가 그 생각으로 풀려고 하는 한, 절대 못 푼다”라는 게 선문답 문제예요.
그런데도 우리는 끝까지 생각으로 풀려고 들죠.
그래서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깨닫는 건 아주 쉬운데, 그래서 영원히 안 되는 거예요.
불가능한 짓을 하니까.
그러면 ‘즉’이라고 하는 게 뭔지 이제 알았죠.
그냥 ‘팩트’, ‘있는 사실 그대로를 보고 아는 것뿐’이에요.
그게 ‘즉’이야.
아무 생각이
‘그럴 뿐이다’라는 그 마지막 생각까지 사라진 거야.
그리고 있는 사실 그대로만 나타난 거라고요. 아시겠죠?
그래서 “생각, 느낌의 이전 자리다”라는 말은
바로 ‘즉’의 세계를 말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어떤 어떻게 보면 좀 본능적인 행동들
화장실 가서 용변 보고, 눈 비비고, 뭐 이렇게 기지개 한번 펴고
이런 거를 생각해서
“이 다음 번에는 기지개를 켜야 되고”
“그 다음 번에는 화장실 가서...”
이런 거 생각하고 갑니까? 그냥 막 자연스럽게 합니까?
자연스럽게 하죠.
이게 ‘즉’의 세계예요.
‘즉’의 세계는 그래서 생명이 그냥 살아서 작동하고 있는데
나중에 뭐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그렇게 하루에도 여러분 이미 살고 있어요.
사실은 안 그래요.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래서 이미 부처라는 거야.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모든 걸 알려고 들어.
생각이 정리해야 되고. 이해해야 되고.
그래서 모르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생각은 경험의 세계만을 정리하고, 알 수 있을 뿐이지
경험을 단어로 만든 세계
생각은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안 그래?
들어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 자기가 알겠다고 하니까
애시당초 불가능한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니까 ‘뿐’의 세계와 ‘즉’의 세계인지 아시겠죠?
‘즉’의 세계 뭐냐?
*!
이게 ‘즉’의 세계예요.
지금 사실만이 있었잖아. 그렇죠?
여러분이 아무 생각 안 하고 이거를 접했다면
이게 ‘즉’의 세계야.
또 예를 들면
횡단보도를 건너가는데 파란불이 켜졌어요.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건너갔는데
갑자기 어떤 차가 막 나를 향해서 돌진해 와.
그때 여러분이
“저 차의 속도는 120인데, 내가 2분의 1초 내에 피하지 않으면...”
이런 거 계산합니까?
아니면 그냥 바로 아무 상관없이
바로 본능적으로 행동하죠?
그게 ‘즉’의 세계야, 알겠죠?
그러면 ‘뿐’과 ‘즉’ 사이에는 뭐가 있는 거예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생각 하나 밖에, 한 겹 생각만 있는 거야.
그런데 ‘뿐’이 ‘즉’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뿐’이 ‘즉’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
예컨대 “다만 그랬을 뿐이다”
“다만 그랬을 뿐이다.”
“다만 모를 뿐이다.”
선문답으로 물었더니
“난 몰라요.”
“몰라요” 했을 ‘뿐’이에요. 그죠?
이게 ‘즉’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고.
자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에 갇혀 있는 거예요.
너무나 쉬운데 몰라.
“다만 그랬을 뿐이다”라는
여기에 생각의 의미가 들어가 있잖아요.
“다만 그랬을 뿐이다”라는 생각이 들어가 있다고, 의미가, 내용물이. 그죠?
근데 그 내용물만 빼버리면 말은 똑같아.
“다만 그랬을 뿐이다”데 이게 ‘즉’이 돼버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왜?
의미가 없으니까 그냥 이게 ‘즉’이야.
*!
이거랑 똑같은 거야.
그러니까 불교에서 가르치는 사사무애라는 게 있어요.
이사무애와 사사무애라는 차이점이 있어요.
이 차이가 어떤 거냐면
[이사무애]는 이치와 사_ 실제 일어난 팩트가 무애하다 이 말이에요.
이치로 알고 있는 거와 실제로 자기 삶이 똑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를 들어
누구 앞에서 욕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심히 지나간다.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얼굴도 안 변하고,
이러면 이사무애예요.
왜?
부처님이 그런 것에 그 개념치말고, 집착하지 말아라. 오온개공이다.
그러니까 그걸 알고
그래서 누가 욕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가면 이게 이사무애에요.
그런데 [사사무애]는 뭐냐?
욕을 했고, 지나갔다야.
욕을 했다라는 말도 벌써 분별이지
말했고 지나갔다야 그죠
말했고 지나갔다 이건 사사무애에요.
아무런 판단이 없어요, 분별이.
그냥 일어나는 팩트만 말한 거야.
그러니까 이사무애와 사사무애의 차이가 뭔지 알겠어요?
[이사무애]는
‘이는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이 이미 한결 깔려 있는 거야.
“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심히 지나갔다”
“아, 훌륭하다”라고 하는 생각이 숨어 있는 거야.
이치는 이런데 실제 삶이 그렇게 일치했다. 그러니까 훌륭하다
이런 분별이 깔려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사무애]는
쟤가 뭐라고 얘기 했고, 얘는 그냥 지나간 거야.
이게 예수님이 말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에요.
사사무애가 되라는 거야.
그런데 예를 들어
하나 더 비유합시다.
내가 뱃놀이를 하는데 남의 배가 와서 부딪혔어.
그러면 부딪힌 사람은
진동을 받았고, 충격을 받았으니까 기분도 나쁠 거 아니야.
근데 “아이 뭐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서 웃으면서 너그럽게 지나갔다.
그럼 이건 [이사무애]야.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런데 배가 와서 부딪히고 헤어졌다.
이건 [사사무애]야. 아무런 해석이 없어요.
배가 와서 부딪혔음에도...
여러분이 만약에
내가 어떤 배에 드러누워서 호수 위에서 하늘 바라보면서
이렇게 명상을 즐기고 있는데
어떤 배가 와서 나를 꽝 부딪혀서 하마터면 내가 물에 빠질 뻔했어.
그 화가 나요? 안 나요?
화가 나서 이렇게 딱 일어나서 보니까
상대방 배가 빈 배야.
그러면 누구한테 화를 내 화낼 사람이 없죠?
사사무애는 마치 이와 같은 거야.
그냥 일어났을 뿐이야.
그러니까 ‘뿐’과 ‘즉’의 차이를 알겠죠.
‘즉’에는 모든 생각이 뚝 떨어진 거야.
이게 여러분이 이 앎으로만 있으면
아까 내가 말하는 모든 걸, 지금 여러분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다 알고 있어요.
보고 알고 있다고.
내가 말한다는 것을.
내가 말하는 걸 전부 다 이해했는지 안 했는지 난 모르겠어요.
그건 난 개의치 않아.
보고, 지금 말하는 건 내가 사사무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즉’을 얘기하는 거라고
여러분은 내가 말한다는 사실을 보고 알고 있어요.
이것만이 진실한 거예요.
이게 사사무애 세계고, 이게 진리의 세계라고.
이게 본지풍광이고, 실상세계라는 거예요.
이게 법계라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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