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뱀 위에 거북이가 있고
그 위에 세 마리의 코끼리가 바다에 둘러 싸인
원반 모양의 대륙을 떠받치고 있으며
다시 그 위를
네 마리 코끼리가 올라 타 있으며
그 위의 주변에
태양, 달, 별이 돌고 있다.
그 위엔 신의 세계가 존재한다.
-힌두 신화
앞서 보았듯 서구적 세계관은
오래전부터 이어온 형이상학적 전통과
근대 이후 발달한 자연과학의 세계관이 섞여 만들어졌습니다.
창조, 천국, 신과 같은 단어와 물질, 시간, 공간 같은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우리는 그런 단어들을 두루 섞어 쓰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개념들이 제시하는 사실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죠.
우리는 어떤 것들은 명백한 사실로
어떤 것들은 신화, 전설, 상상이나 종교의 영역으로 분리하고
그것에 대해 다른 가치를 매김으로써
관념 간의 충돌을 방지하는 생각의 틀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의심 없이 믿어온 세계에 대해
의문을 가져봐야 합니다.
의외로 이런 의문은 서양 철학의 시조에 해당하는 분이 먼저 했습니다.
플라톤입니다.
죄수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결박되어
앞쪽 벽만 바라볼 수 있는 동굴이 있었습니다.
죄수들 뒤로는 횃불이 있어서
죄수들은 횃불에 비추인 벽면의 그림자만 보고 삽니다.
죄수들은 그림자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죠.
어느 날 한 죄수가 쇠고랑을 풀고 밖으로 나가
환하게 빛나는 진짜 태양을 봅니다.
진실을 본 그는 동료들에게 되돌아가 이 사실을 알립니다.
하지만 다른 죄수들은
소란을 피운 그를 감옥에 가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벽만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세상을
횃불에 비추인 그림자로 이야기하는 플라톤의 비유는
그 메시지가 너무 명확하지만
사람들의 일상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태양을 직접 보기 전에는
동굴 속 그림자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깨달음이란
바로 동굴 밖으로 나가 진짜 빛을 보는 것입니다.
또한 공부와 수행이란
누군가 우리에게 알려준
동굴 밖의 세상을 상상해 보려고 하고
수용할 용기를 내고
결국 스스로 동굴 밖을 나가려고 하는 험난한 도전입니다.
왜 세계관을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될까요?
주류의 서구적 세계관은
모든 존재를 물리적으로 분리된 개별 실체로 이해합니다.
인간이 객관적인 실재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각각의 실체들의 모습과 성질을 알 수 있고
공간 속에 분리된 개체들이 바로 그 실체라고 봅니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인간 사회는
분명 이 원리에 의해 작동되고 유지됩니다.
이에 비해 동양적인 세계관, 그중에서도 유교의 세계관에서
실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인연 화합하는 일종의 파동이며
파동의 기질과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결과 관계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주역이나 성리학, 음양, 오행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세계관을 대표하는 아이템이죠.
이런 세계관을 동양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서구적 실체론과 명확히 대비될 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멀리는 이슬람 이전의 근동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양오행처럼
힌두이즘에서는 지수화풍과 공의 5대 원소를,
조로아스터교에서도 물, 불, 바람, 흙의 4대 요소들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서구적이고 실체론적인 세계에는 익숙하지만
반대로 동양적이고 관계론적인 세계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아마 200년 전에 살았던 한국 사람이라면
그 반대였겠죠.
익숙한 것의 관점으로 동양적 세계관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을 왜곡시켜
하나의 하위 세계관으로 치환하고
그것을 안다고 치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생각의 틀입니다.
뭐가 어떻게 다른 걸까요?
서구적 세계관에서 모든 사람은 개인입니다.
개인과 개인은 관계를 맺으며 사회를 이룹니다.
뭐 당연한 말이죠.
유교적 세계에서는 개인이란
국가와 가문의 한 요소일 뿐입니다.
기독교에서 개인은
구원의 단위이자, 재림의 날에 부활할 수 있는 고유한 단자입니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이런 영생의 개념이 필요 없습니다.
자손을 낳고 가문을 이어가는 그 자체가 이미 영생이니까요.
단 한 번의 인생과 영원한 천국이라는 생각은
힌두이즘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억지입니다.
사람은 끊임없는 윤회와 전생을 통해 정화되어
신에게 다가가는 존재입니다.
창조주를 인정하는 종교이지만
이렇듯 완연히 다른 세상을 바라봅니다.
특히 종교적 영역으로 들어오면
차이는 매우 분명해집니다.
엘리아데 같은 인본주의 종교학자에 따르면
종교는 사실상 문명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죠.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하나의 문명 속에서 보여주는
형식과 내용은 종교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 회교로 대표되는 서구적 종교는
가장 존재론적인 종교이며
이 종교들은 선형적이고 물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조주와 세계, 천국과 지상, 인간과 자연을 선명하게 대조하는 이 신념체계는
이 종교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마저
그 유사한 세계관을 가지도록 합니다.
저는 서구 종교로
휴머니즘이나 과학적 유물론을 추구하는 데 동의합니다.
이미 유발 하라리 같은 학자가
자신의 저서에서 세밀하게 묘사한 것처럼
이런 관점과 입장, 태도는
하나의 신념 체계를 형성해
종교와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상의 영역인 신과 천국 같은 관념을 제외한다면
기성종교와 근대적 휴머니즘, 과학적 유물론이 바라보는 인간과 이 세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반면 동양적 세계관은
단적으로 실체를 인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실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변화와 흐름이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어떤 현상에 대한 일시적 규정일 뿐입니다.
힌두이즘의 윤회적 세계관이나
유교의 총체적 세계관
도교의 무위자연의 세계관에서
라이프니쯔가 말하는 단자로서의 개인이란
상상하기 힘든 환상입니다.
이런 동양적 세계관은
불교적 세계관에서
가장 크게 서구적 세계관과 비교됩니다.
불교적 세계는
모든 것이 상호 의존하는 연기적 세계로
그 어느 것도 자성,
즉 개체의 실체성을 가진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해 존재하므로
사실상 모든 것의 실체성은 없다는 것이
불교의 공의 의미입니다.
이렇듯 뚜렷하게 대비되는 서구와 동양의 세계관의 대척점에
균열을 내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바로 현대과학
특히 양자 물리학입니다.
상대성 원리와 더불어
현대과학을 그 이전과 구분 짓는 양자역학을 통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원자 세계의 입자와 파동의 관계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대성 이론의 설명이나
양자장 이론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유턴적 세계가
실상이 아니라
오차가 매우 작은 거시 세계를 설명하는 용도에만 써먹을 수 있는
일종의 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줬습니다.
현대과학의 발견은
소수의 서양사람들에게
동양적 세계관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주기도 했습니다.
많은 서구인들이
힌두이즘과 불교를 찾아
그들에게 이제는 불행의 표지가 된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를 치유할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경천동지할 이론들이 시상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론들을 통해 만들어낸
과학기술 문명을 누리는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런 문명의 도구를 쓰면서도
여전히 뉴턴적 세계에서 개체로 살아가는 것을 달갑게 받아들입니다.
사실 이런 전환적 흐름은
처음이 아닙니다.
정말일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대과학 덕분에
이런 흐름이 처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오래된 문명사회에서도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
대부분 기득권의 핍박을 받고 사라졌고
그나마 서구의 르네상스는 성공한 극소수의 사례죠.
인도에서도 불교의 아비달마 철학을 통해
이런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쟁을 주고받았습니다.
극미의 실재를 찾아가는 구사론에서
이미 시간, 공간, 입자와 같은
현대 물리학의 용어들이 출현합니다.
이러한 논쟁을 바탕으로 새로이 정립된 것이
대승불교의 세계관이며
대승불교의 세계관은
철저하게 연기와 유식을 근거로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제부터 시작해야 할
공부의 내용입니다.
--
모든 사물은
동시에
신체이고, 정신이며
사물이고, 관념이다.
-질 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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