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불교의 연기법

Buddhastudy 2024. 10. 3. 19:05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

-연기경

 

 

불교의 연기법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설명의 형식은 달라지지만

그 본질적 내용은 달라진 것이 전혀 없을 정도로

불교의 핵심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연기적 세계관은

불교의 것만은 아니며

거의 모든 깨달음 전통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석가세존도 연기법을 본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것이라 했죠.

 

어쨌거나 불교는 연기법을 빼면

불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본이자 핵심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연기적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는

많은 부분을 불교에서 가져오게 됩니다.

 

저 역시 연기법에 대해서는

주로 불교의 그것을 이야기하기에

제목을 불교의 연기법이라고 붙였습니다.

 

연기란 한자어 인연생기의 줄인 말입니다.

대승불교 이전인 초기불교 경전인 아함경에서의 최초 언급은 이렇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저것이 멸한다.”

 

여기서 보듯 연기법을 그 내용으로 풀면

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것이 있고

그것들은 모두 상호의존에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용만으로 보면

현대 과학이 설명하는 우주론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연기법은 매우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거라면 나도 말을 알아듣고 이해했으니

알았다고 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실체들이 원인과 결과에 따라 움직여 작용하고

그 실체들은 서로 관련이 있다는 정도는

연기법을 오해한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야 됩니다.

연기법을 개념적으로 정리하면

인과성과 상의성,

즉 인과의 법칙과 상호의존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과성과 창의성의 의미는

결국 모든 존재가

그 자신의 특수한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에 모아집니다.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이

인연에 따라 서로에게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존재성을 가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존재를 먼저 전제하고

그것들 간의 인연과 연결을 설명하는

실체적 세계관과 완전히 다릅니다.

 

연기적 세계관은 독립적인 실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독립적인 실체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연기적 세계관은

우리 상식에 완전히 반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들을 밑바닥까지 쪼개면 작은 입자로 나누어집니다.

입자 하나하나가 실체이며

그 실체들의 묶음이 이 세상과 내 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체가 없다니요?

 

연기법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인연의 화합에 의해 나타났다가

인연의 흩어짐에 의해 사라집니다.

모든 존재는 그 스스로 생겨나지 않으며

존재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모든 것들을 조건으로 해서 규정됩니다.

그 자체로는 있는 것이 없으며

오직 상호의존에 의해서만 존재가 의미 있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무아라고 하고

상호의존하는 상황만 있기 때문에 실체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사실상 텅 비어 공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무상, 무아, 공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겉모습을 보고

그 형상에 따라 그것을 실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연기법은 그런 형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유를

탐구해 이른 결론입니다.

없는 사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실재한다고 생각했던 생각의 벽을 뚫고 들어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본질까지 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연기법은

단순한 이론이나 이해를 넘어

세상과 자기를 보는 시각을 뒤바꾸는 세계관의 변혁입니다.

접근 방법이나 패러다임의 변화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인 인식의 틀이 바뀌는 체험이

연기법 공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과 같습니다.

원리 전도몽상

뒤집어진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난다.

 

자성을 가진 실체라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상호 의존한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가 상식으로 맞닥뜨리는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라는 생명체는 엄연히

한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입은 옷과

내가 사는 집과

내가 타는 차는

엄연히 하나의 실체입니다.

 

나와 관계를 맺은 혈육이나 이웃들은

비록 서로 이런저런 인연을 맺기는 하지만

최소한 몸과 마음에서만큼은 서로 독립적입니다.

 

내가 사는 땅은 지구 위에 있고

지구는 태양계에 있으며

태양계는 은하계 안에 있습니다.

 

아무리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런 하나하나의 주체, 객체들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생겨나야 저것이 생겨나고

저것이 사라지면 이것도 사라진다는 부처님 말씀은

그냥 인생무상함 같은

허무한 언어의 유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야 합니다.

진리는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을 맛보는 과정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의외로 매우 견고하고, 강건하게

우리 인식의 틀을 구조화하고 있기 때문에

표피적인 언어로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실제로는 그 틀로 해석해 왜곡합니다.

 

제가 연기법을 처음 듣고 처음으로 추천받았던 책은

다름 아닌 <틱낫한의 사랑법>이라는 아주 얇은 책이었습니다.

저는 인연생기의 법칙이라는 무거운 주제와

스님이 붙인 사랑법이라는 가벼운 책 제목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랬습니다.

 

우리는 꽃 한 송이가

햇빛, , , 시간, 공간 같은

꽃 아닌 요소들로만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죠.

우주에 가득 찬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을 피어나게 하는데

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건들을

우리는 꽃 아닌 요소들이라 부르는 겁니다.

 

틱낫한 스님의 다른 책을 보면

이 표현은 매우 담백하게 정의됩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 아닌 것으로만 구성된다라고 표현됩니다.

 

우리가 이름을 붙인 어떤 사물,

예를 들어

휴대폰은

그것을 분해해 보면 수많은 부품으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그 부품의 재료들이 자연에서 채취되고 정제되어

부품이 만들어진 과정이

휴대폰을 구성합니다.

 

채취된 원료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지구 행성이 형성된 과정을 빼놓을 수 없죠.

지구행성 이전의 별, 먼지, 에너지,

그 무엇 하나 빼고 휴대폰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간단한 사물 하나가

전 우주의 발생 과정이라는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면

과연 우리는 그 하나의 사물에서 고유한 실체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런 생각하지 않아도

휴대폰을 잘 쓰고 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하지 않아도 휴대폰은 정말 잘 작동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사물을 보는 하나의 관점의 변화입니다.

그 사물을 바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사물에서 전 우주를 본다는 것은

이해를 넘어선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연기법은 이해가 아니라 깨달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연기법을

깨달음 전통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 수행의 기본적인 접근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깨달음

실천과 결합된 연기법을 탐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