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맞이하는 인연 속에서
“이렇게 말하는 이 놈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만 들어
오고 가며 끊임없이 이것을 의심하다가
이치로도 알 수 없고, 뜻으로도 알 수 없으며
아무 재미도 느껴지지 않아 마음이 뜨거워지고 답답해질 때
바로 이 자리가 목숨을 놓아버릴 것이며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기본이 된다.
-조주
큰스님이 밥그릇을 씻다가
개구리 하나를 두고
새 두 마리가 먹잇감을 다투는 것을 보았다.
같이 보면서 설거지를 하던 중이 물었다.
“저것이 왜 저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다만 그대를 위해서다.”
큰스님이 대중의 무리들과 함께 밖에 나갔다가
돌기둥을 보고 합장했다.
“안녕하십니까? 세존이시여”
같이 있던 어떤 종이 말했다.
“스님, 이것은 돌기둥입니다”.
큰스님이 말하기를
“목이 터지도록 울어도 쓸데없으니
입을 다물고, 봄을 보내는 게 좋겠구나.”
어떤 스님이 귀종에게 와서 하직인사를 하자, 귀종이 말하였다.
“지금 바로 가서 보따리를 싸서 떠날 무렵에 찾아오면
그대에게 불법을 말해주리라.”
잠시 후 그 스님이 방장실로 올라오자, 귀종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날씨가 추우니 조심해서 가시게나.”
“저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대는 이야기를 하는가?”
“네 제가 말합니다.”
“그대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내가 이야기한다고 말하는구나.”
선문답을 몇 개 쭉 나열해 봤습니다.
감이 오는 것이 있다면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특별한 뜻이 있는 순서는 아니지만
마지막 선문답은 좀 가볍게 느껴졌다면 이유가 있긴 합니다.
설명을 하듯 알려주는 말투가 그 이유는 아닙니다.
앞의 세 가지 선문답은 선문답 모음에 나오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선문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그냥 지어낸 것은 아닙니다.
선문답은 제가 마하라지의 I AM THAT에서 가져와
원래의 대화에서 거의 의미의 변화가 없도록 고쳐놓은 것입니다.
대답을 되돌려주는 모습이 영락없는 선문답입니다.
“그대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내가 이야기한다고 말하는구나”
마하라지는 깨닫기 전에 시를 쓴 적은 있지만
전이나 후에나 선문답을 한 적은 없습니다.
당연히 인도 전통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하라지는 찾아온 손님들이 엉뚱한 고집을 부리면
호통을 친 적은 많습니다.
저는 거기서도 선문답을 봅니다.
사람들은 선문답을
형식에 어긋나는 언어도단의 방편으로
성품을 일깨우는 방법이라고 얘기합니다.
그 정도 이해라면 아주 훌륭합니다.
하지만 저는 선문답이 오히려 바른 설명이고
우리가 논리를 내세워 정리한 이야기들이
더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그렇게 보면 마크트웨인이라는 미국의 소설가도
꽤 많은 선시를 남겼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진실은 소설보다 더 기묘하다.
왜냐하면 소설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을 그려야 하지만
진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형식이나 전통을 옆으로 제쳐두면
저는 이 공부를 하면서 모든 곳에서 선문답을 만납니다.
그만큼 우리는 부조리의 세계를 살면서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문답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부조리를 아예 드러내 보여주는 듯하죠.
그것이 선문답의 강점입니다.
전도몽상을 뒤집어 보여주면
그러니까 뒤집힌 세상을 뒤집어서 보여주면
가끔은 진짜배기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런 점에서 선은
진단하고 결론을 내려주는 의사가 아니라
유도 신문을 하는 형사와 비슷합니다.
거꾸로 묻는 것이죠.
또한 선문답은 일종의 심리 요법이기도 합니다.
멀쩡한 사람이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계속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계속 자조를 하고, 자책을 하고, 자해를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멈추어야죠.
선문답은 바로
정신 나간 헛소리
즉 우리의 평소 생각의 흐름을 끊어
정상 상태를 보여주는 정신 치료입니다.
아니라고요?
음, 진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잘 듣고 무슨 상황인지 헤아려 보세요.
동산이 거처하는 절 아래 동네에서 불이 났다.
동산이 제자 삼봉을 급하게 불러 외쳤다.
“아이고 불이야, 이거 큰일 났다. 불이야”
삼봉은 스승의 행동이 이상해서 물었다.
“불은 아랫마을에서 났는데 왜 그러십니까?”
이에 동사는 더 다급하게 제자를 불렀다.
“삼봉아”
“네, 스승님 왜 그러시는 겁니까?”
“봐라. 바로 여기서 타고 있지 않느냐, 빨리 꺼라.”
사람들은 감각, 지각, 생각으로 매일 불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재가 아닌 자신의 분별만 봅니다.
당신은 불을 끄라는 스승의 소리가 들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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