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선과 깨달음, 절실함의 정도

Buddhastudy 2024. 10. 7. 19:31

 

 

지렁이를 두 토막으로 끊으면

두 토막이 모두 움직이는데

불성이 어느 쪽에 있습니까?”

 

이런, 스님들이 살생 근처에도 안 가는데 이런 질문을 하다니

그렇지 않죠.

자기 목숨을 거는 것도 살생 시도는 맞습니다.

 

선은 목숨을 거는 치열함이라고 말씀드린 것이 기억납니다.

남전 스님은 고양이에게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자

고양이 목을 베어버렸어요.

동물보호법 위반의 동물 학대죄입니다.

 

위반이 많다 보니 가능하면

진도를 나가기 전에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저도 지렁이를 토막 내고

질문을 한 스님에게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스님, 스님이 손톱을 깎아서 버리면 뭘 버린 겁니까?”

 

사실은 손톱이 스님을 버린 건데

깎아서 버린 제 손톱을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참에 저는 과감하게

그 사람의 휴대폰을 물컵에 넣어버리겠습니다.

 

저는 벌금을 물고, 손해배상을 하거나

재물손괴죄로 구치소에 수감되겠지만

그 사람은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뭔가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웬만하면 저를 만나지는 마십시오.

보기보다는 꼴통입니다.

이런 정도는 좀 어렵겠죠.

휴대폰은 돈 주고 다시 개통하면 됩니다.

절대 다시 찾을 수 없는 그런 것을 보여줘야 말이 먹힙니다.

 

그래서 남전은 살아있는 고양이 목을 베어가며

불자가 해서는 안 될 살생을 대중들 앞에서 저질렀던 겁니다.

섬뜩하지만 치열합니다.

웬만해서는 대충 넘어가기 힘듭니다.

 

당신이 지금 누리는 애고는 얼마쯤 된 것 같습니까?

아마 호모 사피엔스 시절로만 계산해도 수만 년이고

더 거슬러 가서 이것저것 따지면

수백만 년짜리입니다.

 

그게 말 한마디에 녹아 없어질까요?

당치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자기만 제대로 알면

게임이 끝납니다.

물론 아무도 모르죠.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조주 스님이 했다는 이 대답은

아마도 가장 유명한 선문답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그저 멋스럽게 듣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제가 이 기회에 한마디 해드리려고 합니다.

 

예로부터 수행하는 스님이

자기 절의 주지를 만나기도 힘든 판에

선종교단의 대종사인 조주를 만나는 것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입니다.

 

우연한 게 아니라면

벼르고 벼르고 준비하고 준비해서

이 짧은 순간에 그간 간곡하게 수련해 온 결과를

드러내 보이는 겁니다.

 

지금으로 보면 법조인이 되려고 작정한 중학생이

원로 대법관을

공식적으로 만날 기회를 얻은 겁니다.

 

그저 좋은 덕담 듣자고 만난 게 아닙니다.

한마디로 몇 백만 년의 장막을 걷어낼 한마디를 얻고자

그 넓은 중국대륙 저 끝에서 이 끝까지 찾아온 겁니다.

 

상황이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되냐고 묻는 제 물음이 더 천박하네요.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우린 다 잘 모릅니다.

 

스님은 십수년을 공부해 한마디 질문을 던진 겁니다.

그 한마디로 쌓이고 쌓인 번뇌가 풀어지기를 기원하면서

덜덜 떨며

속 깊은 곳에 간직했던 그 물음을 꺼낸 겁니다.

 

스님 제가 찾는 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스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 올라올 때 앞뜰에 잣나무 한 그릇 봤지?”

네 그런데요

그게 그거야

 

욕이 나올 만하죠?

우리들 중 누구 하나가 이런 상황이었다면

정신이 거의 나갈 겁니다.

뭐지? 이게 도대체 뭔 경우지?

대체 뭐 하는 상황이지?

 

멍한 상태에서 조주 스님이 질문을 잘 못 알아들은 것 같아서

한마디 더 합니다.

스님, 보이는 것을 들어서 말씀하시니 모르겠습니다.”

 

뜰앞의 잣나무는 보이는 형상입니다.

그런 비유 말고

직접적으로 말해야 하지 않느냐고

매우 과감하게 토를 달았습니다.

 

그러자 스님도 대답합니다.

내가? 난 그런 적이 없는데

 

조주 스님은

본인이 뭔가 형상이 있는 것을 빌려서

대답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 분명 잣나무라고 해놓고서

 

저 같으면 휴대폰이 아니라

정말 눈 앞의 물잔을 집어던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어디서 들어본 것 같습니다.

한마디 더 해달라고 하면 말이지

그 양반들이 대충

차 한잔 들게이러면서 끝내더라고.

 

그래서 질문했던 스님이 다시 질문을 하는데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굳센 각오로 질문을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까 했던 질문이

그 어디에도 비유할 수 없는

정말로 멋지고 핵심적인 질문 같습니다.

몇 년을 준비한 질문인데요. 그렇죠?

다시 합니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까닭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그렇습니다. 패닉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상황에서는 패닉을 경험합니다.

만약 패닉은 커녕

심드렁한 기분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면

선문답 동영상은 그만 보는 것이 좋습니다.

아직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인연이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어쩔 수는 없습니다.

 

만약 저 상황을 실감나게 맞이해

다리가 풀리고, 고개가 저절로 떨구어지고

눈물이 핑 돈다면

대충 조주 스님이 바랐던 상황이 맞습니다.

 

조주가 어떤 사람인데

괜한 말로 당신을 열받게 하겠습니까?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것이 선입니다.

 

그리고 패닉에 빠진 당신,

당신이 넋이 나간 그 상황에서

아무런 할 말도 없는 당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조차 버겁게 여겨지는 당신이

홀로 밝게 아는 그것을 확연하게 느낀다면

당신은 조주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조주라는 중이

잣나무 아래에서 알을 낳았는데

털 쪼가리 한 점 묻지 않았습니다.

 

스님, 안녕히 잘 계십시오

그래, 잘 몸 편히 잘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