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선공부

[릴라선공부]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다!

Buddhastudy 2024. 4. 29. 20:18

 

 

이런 안목이 열리려면

결국은 공부해야 되는데

여기서는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밤낮으로 열심히 배워서

실증을 내지 말아야 된다

이렇게 이제 말씀을 하고 계시죠.

 

그러니까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

직접 공부에 참여하는 사람의 어떤 입장

아니면 현대인들이

이거를 어떻게 자기 생활 속에서의 공부와 연결시켜야 되느냐?

과연 진정한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 뭐냐? 에 대해서

이 경전에 이런 문장만 보면

참 실제화하기가 어렵거든요.

자기 삶에서의 공부로 연결짓기가 어려운데

 

제가 이제 공부를 해보니까

[깊고 깊은 바야바라 밀다]라는 것은

반야바라밀다가 [도피안]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피안을 이렇게 벗어나는 어떤 지혜]에 대한 그건데

 

[차안]이라는 거는 쉬운 말로 얘기하면

분별 집착심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피안]은 분별 집착에서 깨어나서

실상을 바르게 보는 안목이 열린 그 세계를 말하는 거거든요.

 

근데 /그것이 드러나려면

여기서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열심히 배워서 실증을 내지 말아야 된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이건 뭐냐면

그 분별 집착심에서 깨어나는 공부를 실질적으로 해야 되고

그거를 실증내지 말고 꾸준히 열심히 해야 된다

이 말인 거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게

사실은 우리가 해야 될 진정한 공부잖아요.

뭐 이런 가르침을 들으면

이 가르침이 그냥 이런 게 있구나에서 머물면

그거는 진정한 마음공부라고 할 수가 없고

그러면 이런 가르침을 들었으면

삶 속에서 이거를 행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자기 스스로가

이 분별심에서 벗어난 세계의 실상을 보는 눈이 열려야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요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 있느냐가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가르는 가장 핵심이죠.

 

뭐냔 말이에요.

그러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우리가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고 있는 것의 증거가 뭐냐 그러면

만약에 그게 다른 말로 얘기해서는

분별 집착심에서 깨어난

분별 집착심에 습관적으로 메이지 않는

그런 행위인 거거든요.

 

그러면 여전히 근데 우리가 살아오면서

자기도 모르게 분별 집착심에 사로잡히는 패턴으로

이렇게 몸에 어떤 습관성이 젖어들어 있기 때문에

이미 공부를 시작하는 그 단계에서는

그것이 몸에 밴 상태예요.

 

공부를 시작할 때의 마음 상태에서 깨어나야 되는 거예요.

마음공부를 해야지아니면 불법공부를 해야지할 때는

이미 오염돼 있는 상태

이걸 오염돼 있다라고 하고

사로잡혀 있다라고 하고

습관성에 길들여져 있다라고 얘기할 수가 있는 거거든요.

 

뭐가 그러면은 분별 집착심에 길들여져 있고

사로잡혀 있고, 매여 있는 것이고 밝지 않은 상태냐면

순간적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식에

자기도 모르게 자꾸 사로잡히는

그 패턴에 젖어 있는 거예요.

 

근데 원래는 이 모든 것이, 이것저것이

객관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별 의식인데

너무 순식간에 찰나적으로

내지는 이 분별과 마음이 분리가 없는 하나이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눈을 뜨면서 세상을 인지하고 살아오면서

이게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 순간적인 의식에 빠지는 이것!

여기에서 자기 스스로가 깨어나야 된단 말이에요.

 

깨어나게 되려면

기본적으로 이게 분별 집착에 사로잡힌 세계라는 것을

자기 스스로가 깨달을

어떤 전환이 필요한 거예요.

 

찰나찰나 일어나는 어떤 의식에 사로잡혀서

존재가 되고 있다라는 것을

스스로 한번 맛을 보는 그런 계기가 있어야

자기 눈으로 이 실상을 보게 되고

거기서 습관성에서 깨어나게 되고

그거를 분별심을 조복시킨다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거든요.

분별 집착심을 조복시킨다는 건

분별 집착심에서 깨어난다는 얘기인 거예요.

 

그러면 한번 자기가 맛을 봐야 되는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 이 순간 이것저것이 다 있다

이렇게 여겨지는 거는

내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분별 집착심에 사로잡히는 거예요, 순식간에.

 

근데 그게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그 부분에 대해서 도외시하고 돌아보지 않았고

그냥 일어나는 현상, 분별하기에 바빴지

이것이 어떻게 해서 분별 의식이 존재화시키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고, 돌아보지도 않았고, 스스로 볼 눈이 없었던 거예요.

 

우리 공부는 그거죠.

어떤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

어떤 일이 나타나고 나타나지 않고

어떤 일이 있고 없고는

다 분별 집착심으로 생겨난 것들이고

이거는 뭐냐 하면

그게 뭐가 됐든

뭐가 옳은 게 됐든 옳지 않은 게 됐든

있는 게 됐든 없는 게 됐든

컵이 됐든, 사람이 됐든

그것이 찰나 간에 일어난 분별이라는 걸

스스로 보는 거예요.

 

그 내용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용은 절대 중요하지 않아.

왜냐면, 내용은 다 여기서 일어난 분별의 결과들이거든요.

 

근데 이것이 찰나 간에 이렇게 일어나고 있다라는

그걸 자기가 목격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걸 스스로 체험해야 되고

자기가 그거를 한번 전환, 그런 식의 전환이 와야 되는데

그게 미래에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과거의 어떤 속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거든요, 모든 것들이.

모든 게 그래요.

그러니까 과거 현재 미래가 다 그렇고

시간적인 공간적인 것들이 다 여기에

지금 이렇게 일어나고 있어요.

 

근데 이것이 찰나찰나 찰나찰나

여기서 그냥 일어나고 있어

찰나찰나 일어나고 있어.

 

근데 이 찰나 간에

우리가 의식에 사로잡혀서 이 경험을 하면은

순간적으로 생각이 개입돼요.

이게 왜냐하면 그게 무의식적으로 작동되고 있을 거예요, 무의식적으로.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자기가 그런 식으로 분별하고 있는지 몰라요.

습관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근데 만약에 이 죽비소리의 이 경험이

이 사람이 죽비를 치고 있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

객관적인 일처럼 여겨지고 있다면

순식간에 분별이 무의식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진짜 이 경험,

소음이 끊어져야 되거든요.

우리가 분별이 체험이 일어날 때의 그거를 설명할 수 없는 거지만

말을 하자면

그래서 생각이 끊어져야 된다라는 게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체험할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그냥 입밖에 내지는 않아요.

이러쿵저러쿵 하는 거는 진짜 어른아이 수준의 그건 거고

진짜 마음공부를 하려는 사람이

여전히 그래도 이 사실이 드러나지 않은 거는

마음속에서 되게 이 분별 의식이 순식간에 작동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인 거예요.

그게 무의식적으로.

 

그거를 스스로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여전히 이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일인 것처럼 그냥 보이는 거야.

자기가 속고 있는 줄 모르고.

 

그래서 처음에는 이게 너무도 오랫동안 우리가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게 무슨 말인지도 금방 알아듣기도 어렵고

자기가 그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근데 공부하다 보면요

점점점점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그다음이 중요해요.

그다음에 자기가 그러고 있는 거를 봐야 되는 거야.

그래야지 우리가 거기서 자기가 알아야지 멈추게 되는 거거든요.

그냥 이해만 하고, 자기가 그러는 줄 모르면

그거는 여전히 그 공부가 그 표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거예요.

깊이 침투해 들어가지 못하고

 

그러니까 공부가 깊이 침투해 들어가야 되고

여기서 말하는 [깊고 깊다]라는 그 의미는 뭐냐면

자기 마음의 근원에 닿아야 되는 일이기 때문에

깊고 깊다라고 하는 거거든요.

 

이거 있어요.

우리가 신구의 삼업에서 벗어나야 된다 할 때

왜 하필 왜 신구의 삼업인가?’라고 질문을 할 수 있는데

가장 표면화 돼서 드러나는 게

, 몸의 행이야.

 

그다음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그 어떤 계획을 갖고 행동을 할 때를 잘 보세요.

처음에는 뭐냐 하면

[생각]을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다음에 만약에

내가 오늘부터 어떤 거를 지킬 거야

예를 들어서

다이어트를 할 거야 아니면

오늘부터 술을 끊을 거야

아니면은 담배를 끊을 거야 라고 계획을 세웠어요.

 

그럼 뭐냐면 일단 생각이 일어나야 돼.

생각이 일어나고 일단 자기가 목표를 정할 거야.

오늘부터 술을 끊는다라고 계획을 세울 거 아니에요.

오늘부터, 몇 월 며칠부터 이렇게 한다,

[언어화]하는 거죠.

 

그다음에 어떻게 [실천]을 하잖아.

생각한 것을 언어화해서 그거를 지키잖아요.

어떤 걸 우리가 행할 때는.

 

그럼 뭐냐면 우리가 어떤 것을 행한다라고 하는 건

그 내면에 이미 그런 식의 규정이 있는 거예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게 옳다라든가 그걸 해야 된다라든가 그런 당위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거를 아무런 죄책감이나 뭐 없이 그냥 하는 거예요.

그게 맞다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러니까 공부가 뭐냐 하면

그럼 우리 이렇게 볼 수 있어.

자기도 모르게 행하고 있는지

왜냐하면 우리가 분별을 행하고, 분별된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고, 사로잡히고,

그걸 취사 선택하고 있다라는 거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의식화된 거를 행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럼 뭐냐, 행하는 것이 보여야 돼.

그다음에 자기가 그런 식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보여야

분별 대상을 집착하고 있는 게 보여야 되고

그것을 규정하고 있는 게 보여야지

안 하게 되잖아요.

 

근데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분별 집착하고 있으면서도

안 보이고, 그 실천을 안 하면

맨날 입으로만 공부하는 거야, 그거는.

이게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따라 행한다는 게 이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만약에 어떤 것이 자꾸 걸려

그런 거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걸 행하고 있고

그 행하기 이전에 그것이 옳다라고 긍정하고 있고, 인정하고 있고

그다음에 순식간에 그런 식의 생각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게 알아지고 알아지면 안 하게 되잖아.

공부하려는 사람이 마음이 강하면

그렇게 안 하게 된단 말이에요.

공부하려는 마음은 약하고

그게 1번이면 그걸 행한다고.

 

그래서 제가 공부가 1순위가 돼야 된다는 건

이 분별을 조복시키는 과정에

가장 큰 뭐라고 얘기하면

어떤 그런 식의 선택의 상황에 이거를 1번을 택하기 때문에, 2번을 택하지 않고.

알아진단 말이에요. 공부하게 되면

그럼 뭐냐?

내가 자꾸 2번을 행하고 있어.

근데 내가 1번이 마음이 강하면

1번을 행하려면 안 하게 된다고.

 

그런 식으로 하면서 분별을 조복시키고 나면

결국 이것만 남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부는 뭐냐

진정으로 우리가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한다는 것은

자기 분별식.

물론 처음에는 이게 한번 이 자리가 드러나야 됩니다.

이게 분별이 물들지 않는 자리가 드러나야지

거기에서부터 공부가 시작되는 거거든요.

 

여기에서 분별에 사로잡히지 않고 딱 보면

알아지거든, 분별이라는 걸.

그러면 자기가 생활이라는 건 끊임없는 자극의 연속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러고 있는 거라는 걸, 분별 집착이 떨어지고 있다라는 걸 알게 되면

안 하게 돼요.

근데 무의식적으로 작동되고 있는 건 계속 빠져들어요.

 

근데 이런 식으로

분별 집착에서 깨어나게 되면

이게 잘 보입니다.

이거에 가렸던 이 행이.

그러면 거기서 깨어나게 돼요.

 

그러다가 이것이 한꺼번에 크게 깨어날 수도 있고

소소하게 깨어나다가

그것이 힘이 축적이 돼서 크게 어떤 대반전이 일어날 수 있고 그래요.

 

근데 처음부터 끝까지 크게 깨어나든, 적게 깨어나든

자기가 그렇게 분별 집착에 사로잡히고 있는

그런 신구의 삼업에서 깨어나야 되는 거야.

이게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거예요.

 

이게. 근데 너무 교묘하고 미묘해요.

왜냐하면 너무 찰나 간에 작동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는 않아

그런 면에서.

 

근데 공부에 대한 마음이 강하다 보면

모든 것을 이것으로 보게 된단 말이에요.

모든 경험을, 현실 속에 있는 경험을

이 공부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점점점점 점점점점 자기분별에서 스스로 깨어나게 돼.

 

스스로 깨어나는 거예요.

누가 대신 깨어나게 그거를 행해줄 수가 없어요.

자기가 행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잘 봐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