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4)

법륜스님의 즉문즉설_ 2009. 드라마를 보고 잊고 있었던 담임에 대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Buddhastudy 2024. 4. 29. 20:30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일어납니다.

평소에도 담임은 저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제 생각엔 편모 가정의 경제적으로도 다른

저에게만 유독 심하게 가해졌던 체벌에 억울하고 분합니다.

'억울함을 밝히지 말라'라는 말씀과

'상대방이 어리석어서 무지해서 그런 것이다'라는 답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선생님이 한 행동은

선생으로서의 기본 원칙도 안 지켰고

또 학생들을 그렇게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잖아요.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거야.

그럼, 그걸 갖고 내가 분노한다고

그 선생님에게 무슨 화가 미치느냐, 복수가 되느냐?

 

복수를 해야 된다가 아니라

복수를 안 하면 좋지만

복수를 하고 싶다고, 내가 분노한다고 복수가 되느냐?

 

그 생각을 하고 내가 다시 분노를 일으켜 괴로워하면

나만 괴롭다는 거예요, 나만 더 괴로워진다.

그러니 이것은 어리석다.

자가 자기가 자기를 손해 끼친다.

 

그때는 선생님이 자기를 아프게 했다면

지금은 그 선생님이 자기를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아프게 하고 있다.

그럼 자기가 자기를 해치는 거를 [어리석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남이 나를 해치면

그는 [나쁜 행동]이다, 이렇게 말하고

자기가 자기를 해치는 거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질문자는 지금,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이런 분노를 갖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그 선생님이 훌륭하다든지, 정당하다든지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다.

 

역사적으로도 중국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다

잘못된 거죠.

그러나 그 역사를 공부하면서 분노했다.

그러면 내가 분노한다고

중국이란 나라가 잘못되고, 중국 사람들이 괴로워지느냐?

 

일제 침략사를 공부하면서 일본에 분노했다.

그런다고 일본 사람이 잘못되거나 일본 나라가 잘못되느냐?

그렇지 않다.

 

[분노하는 거는

어떤 경우에도 다 자기 문제다.

수행적 관점에서는.]

 

그러면 분노할 것이 아니라

그러니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나라를 잘 지켜야 한다든지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과거로 돌아가서 나를 괴롭히는 행동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방비하는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길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 일에 분노할 거냐, 안 할 거냐를 논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내가 내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 것이냐를 논하는 거다.

 

이 자리에서

선생님이 교육자로서 올바르냐 아니냐

이걸 지금 논하는 자리도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졌건

내가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는 길은 무엇일까?

이런 관점에서 지금 얘기를 하는 거다.

 

...

 

자기 하고 싶은 얘기해 보세요, 뭐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해서

자기 괴로움이 줄어들어야

이 자리의 대화가 필요한 거다.

 

...

 

내가 억울하니까 나는 밝히겠다하는 걸

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억울함을 밝히는 건, 나의 이익을 위한 거잖아요.

수행이라는 것은

내가 괴롭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렇게 하면 재물이 벌린다

이렇게 하면 분풀이가 된다

이렇게 하면 높은 지위를 얻는다

이런 거를 논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내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냐

괴롭지 않는 인생을 사느냐]를 우리는 중심에 놓고

지금 대화를 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옳고, 누가 그러냐 하는 거는

법원 판사가 할 일이지

법륜스님이 할 얘기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저한테 와서

이런 경우에 남편이 옳습니까? 아내가 옳습니까?

이런 경우에 자식이 옳습니까? 부모가 옳습니까?

이걸 내가 판결해 주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질문자가 가지고 온

그것이 분노든, 그것이 짜증이든, 그것이 괴로움이든, 슬픔이든

어떻게 하면

그 슬픔에서, 그 화에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냐?

그 질문자의 현재의 상태를 좀 더 낫게 만드는 주제를 갖고 얘기하지

저 객관 세계에, 어떤 사건이 누가 옳으냐를 갖고 논하는 자리가 아니다.

여기가 재판장이 아니잖아요.

 

만약에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논하고 싶으면

그건 고소를 해서 판사의 판결을 받아야 되겠죠.

 

또 판사의 판결도 내 생각하고 틀리면

그 판결에 또 억울한 마음이 들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이 억울한 마음이

그렇게 해서는 사라지지 않게 된다.

 

우리가 지금 많은 사건, 사고, 분쟁이 있는데

항상 재판에 간다 하더라도 이기면

판사가 양심적이었다

이렇게 말하고

한국 사법부가 살아있다

이렇게 말하고

 

지게 되면 다 억울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사법부도 죽었다, 판사가 썩었다

이렇게 다 표현하잖아요.

 

교도소에 가서

그 소위 세상에서는 범죄자들이라고 말하는

그 사람들하고 같이 있어 보면

전부 다 억울합니다.

밖에 있는 사람보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 억울합니다.

다 자기는 억울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도 옛날에 그런 사실을 잘 모를 때

교도소에 가서 제소자를 놔놓고 법문을 할 때는

여러분들이 한때의 잘못으로 이렇게 범죄를 저질렀지만

지금이라도 깊이 뉘우치고

앞으로 바른길로 가면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법문을 했다, 이 얘기예요.

그러면 대부분 다 좁니다, 하품하고.

 

그런데 제가 가서 감옥에 가서 한번 살아봤어요.

같이 한번 있어봤어요.

그런데 다 억울한 사람만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교도소에 가면 제일 첫 인사가

안녕하세요. 다들 억울하시죠

이렇게 얘기하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그다음부터 얘기가 무슨 얘기를 해도

조는 사람도 없고, 눈을 말똥말똥해서 다 들어요.

자기들 심정을 이해해 준다고.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그러니까 자기가 억울하다고 선생을 고소해서

선생이 처벌을 받았다.

그러면 자기 입장에서는 참 잘했다이러지만은

 

그 선생님은 어떻게 했어요?

그 선생님이 이 즉문즉설 나오면 또 억울하다그러겠죠.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가르치려고

말해도 안 들어서 사랑의 매를 했는데, 공부 잘하라고 했는데

고발해서 교직에도 떨어지도록 했다.

그 사람은 또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니까 왜 억울함을 밝히지 말라고 하느냐?

다른 사람을 또 억울하게 만든다, 그것이.

그래서 억울함을 밝히려고 하지 마라.

 

옳고 그름을 무조건 따지지 마라, 이런 뜻이 아니라

그게 원한을 원한으로 갚으면

그 원한이 끝이 없어진다.

그래서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마라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얘기예요.

 

세속의 가치로는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죠.

우린 다 억울하면 해명을 하고 싶고, 밝히고 싶은데

그런 정도 갖고는

이 억울함이 절대로 그 순간 잠시 해결되지만

그런 관점으로는 평생 억울함이 해소가 안 된다.

 

그래서 옛날 성인이 그렇게 말한 거예요.

원수를 원수로 갚아서는

원한을 원한으로 갚아서는 끝이 없다 하는 거와 같이

억울함을 밝혀서 해결하려 그러면

죽을 때까지 끝이 없다

이런 얘기예요.

 

...

 

저도 초등학교 다닐 때

학생들이 친구들하고 재기를 차다가

지붕 위에 그 재기가 올라가 버렸어요, 학교 지붕 위에.

그래서 장대를 가져와서 그걸 내리다가 기왓장을 떨어뜨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선생님한테 불려가서

초등학생인데도 짝대기를 갖고

엉덩이, 종아리를 막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거든요.

 

그때 저도 너무너무 억울해서 일기장에까지 써놨어요.

내 절대로 이 건 잊지 않을 거다.

나이 들어서 그때 옛날 일이다그런 소리하면 안 된다고

이렇게까지 써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선생님한테 가서

선생님, 그때 때린 거 기억합니까?”

그럼, 그 선생님 기억할까?

아마 기억 못할 거예요.

무슨 일인지도 모를 거예요.

 

그래서 항상 가해자는 기억을 잘 못하고

피해자는 아주 작은 것까지, 어쩌면 더해서 기억하고

이래서 세상이 안 풀리는 거예요.

 

이게 나라와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예요.

한국과 일본 사이도 지금 그런 거예요.

우리는 너무너무 그 고통이 심한 게 뼈저리게 느끼는데

일본 사람들이나 일본에서는

그 정도로 했으면 됐지, 잘못했다 그랬지 않았냐,

유감을 표명하지 않았냐, 그때 다 배상하지 않았냐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참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뭐든지 다 억울하고 참고 살라가 아니라

우리가 [지난 일을 교훈] 삼아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즉 내가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이 되면, 나는 선배가 되면

그런 구타를 하지 않겠다

이 자각이 매우 필요하죠.

 

우리 세대가 자랄 때는 군대 문화가 있어서

선배들이 늘 이렇게 학교 펜스 뒤에나 이런 데 불러모아서

이것들이 버릇없다 이래서

장대를 갖고, 또는 야구 방망이를 갖고

이렇게 폭행하는 게 다반사였어요.

그런 것이 다 많이 사라졌죠.

 

지금은 학폭이라 그래서

한 번 그런 경력이 있으면

요즘은 세상에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데 과보가 딱 이렇게 나타나잖아요.

이런 것이 앞으로 학교 폭력이 줄어들 수 있는 계기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학부형이나 그 본인한테 지금 한번 물어보세요.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지.

 

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까지 한 거는 아니다.”

다 이렇게 변명이 있고, 해명이 있거든요.

이것이 세상이다, 이런 얘기예요.

 

그래서 가해자가 된 사람은

진솔하게 사과하는 게 정말 필요하다.

내 뭐 조금밖에 안 그랬는데그럴 게 아니에요.

 

남자들은 주로 뭐 뭐

그냥 조금 뭐 귀엽다고 만졌는데이러지만은

상대편은 마음의 상처가 굉장히 크다는 거예요.

이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이게 개선이 잘 안 되고 있거든요.

 

그리고 피해자들은

그것을 너무 가슴에 두고 있으면

자기 인생이 괴로워진다, 트라우마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는 게 필요하다.

 

그 선배들이 악독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자기들도 배우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른 거거든요.

 

그 당시에는 경찰에 가면

패고, 고문하고, 이게 다반사였지 않습니까?

?

그것이 그냥 일제 강점기 때부터 흘러 내려온

하나의 문화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근절하는 건 좋은데

그때의 피해의식을 계속 갖고 살면

자기가 괴로워진다,

이런 말씀을 좀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런 트라우마에서 좀 벗어났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잘했다이런 얘기로 들으시면 안 되고.

 

그건 지금

[내가 과거의 기억을 갖고 나를 괴롭히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고 짓이다

자기에게 피해가 온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