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잠든 아이

Buddhastudy 2026. 6. 11. 20:11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의 일화를 바탕으로, 인간이 감각적 욕망(막대사탕)에 눈이 멀어 삶의 본질적인 고통을 보지 못하는 무의식 상태(꿈)에 빠져 있으며, 이 고통을 온전히 대면할 때 비로소 깨어남(실재)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막대사탕을 물고 잠든 아이' 같은 에고(Ego)

  • 변화를 거부하는 인간: "지금 이대로가 좋다"며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은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닫지 못한 상태입니다.
  • 감각적 욕망에 집착: 에고는 실재(진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잠들어 있으면서도, 입에 문 막대사탕 같은 '감각적 욕망과 쾌락'은 절대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지어 현재가 괴롭다 하면서도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 앞에서는 진저리를 칩니다.

2. 고통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무의식과 깨어남

대부분의 사람은 일상의 임계치를 넘어서는 큰 비극(이별, 사고, 재난 등)이 닥쳐야만 비로소 고통을 느끼며, 평소에는 고통을 무의식 속으로 묻어두고 방어합니다.

  • 잠든 사람의 꿈 (처연한 무의식):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삶의 전제를 망각한 채, 선잠에서 깨어나 사탕이 사라질 때만 일시적으로 고통을 느낍니다. 일상이 고통이기에 끊임없이 외부의 쾌락을 찾아 헤맵니다.
  • 깨달은 이의 꿈 (초연함과 실재): 평상의 상태가 늘 평온하기에 도리어 고통만을 명확히 알아차립니다. 자식이 죽는 등의 슬픔이 닥쳤을 때 함께 슬퍼하지만, '고통이 있을 뿐, 고통받는 나(Ego)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에게 세상은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꿈과 같아서 개인의 희로애락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3. 깨어남의 도구로서의 고통

  • 고통은 인간을 자기 관찰과 깨어남으로 이끄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 무의식 속에 숨겨둔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수면 위로 끌어올려 온전히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식을 깨우는 거대한 계기가 됩니다. 이 고통을 대면할 용기는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과 같습니다.

🌟 핵심 요약
"인간은 감각적 쾌락이라는 막대사탕을 문 채 무의식의 꿈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진정한 구도는 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며, 에고의 방어기제를 내려놓고 삶의 고통을 온전히 대면할 때 비로소 실재(진리)를 향한 깨어남이 시작됩니다."

 

 

 

저는 변화를 원치 않고 저의 삶은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방문자에게 마하라지는

그것은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방문자를 바라보며 이어서 유명한 말 한 구절을 남깁니다.

당신은 완전히 자기중심적이어서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잠든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사탕을 물고 잠든 어린 아이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요즘은 볼 기회가 많지 않지만

예전에는 보채는 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주고

사탕을 물고 잠든 아이에게서 살며시 사탕을 입에서 빼곤 했죠.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잠든 아이는 귀엽지만

다 큰 어른이 이러면 꼴사나운 모습입니다.

아마 자기 모습이 이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죠.

사실이라도 인정하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에고는 전부 이렇습니다.

실재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 감고 잠들어 있으면서

입에 문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만큼은 절대 양보가 없습니다.

물론 자기가 이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현재가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사람도

패러다임의 근본적 변화 앞에서는 진저리를 칩니다.

이대로 괴로운 게 낫지 슬픔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더 괴롭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고, 인생이 고달프고, 삶이 괴롭다고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보이는 건 참으로 기이한 모습입니다.

 

실재를 그대로 사는 사람에게도 고통은 있습니다.

사실 고통만 압니다.

왜냐하면 평상의 상태가 평온과 복락의 상태인지라

고통 말고는 느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무집착, 초연함에서는

고통조차 잠시 있다 사라져가는 가벼운 일상입니다.

일상이 고통이고

그래서 쾌락을 쉴 새 없이 찾아다녀야 하는 삶과 정반대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실재를 사는 사람이 고통을 찾아다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필요에 따라 와서 스스로 해결하고 떠나갑니다.

이 차이점을 잘 이해하면 수행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죠.

 

경전과 실제 사례에서 이런 질문은 흔하죠.

깨달은 사람도 자식이 죽으면

슬픔을 느끼고 고통을 받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고통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있을 뿐, 고통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곳에서 보이는 고통은 일상의 그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실재가 아니죠.

 

 

고통을 고통으로 알지 못하는 완전히 잠들어버린 사람의 꿈과

세상을 꿈처럼 보는 깨달은 이의 꿈은

그 단어는 같지만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잠들어버린 사람의 꿈은 처연한 무의식입니다.

깨달은 이의 꿈은 잠에서 깬 사람의 막대사탕 같은 것입니다.

다 큰 어른은 막대사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이 그렇게 꿈 같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한 개인의 기쁨과 고통이란

정말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고 가는 것이며 관심을 둘 필요조차 없는 것이죠.

오직 한 발짝 떨어질 힘을 기르는 데만 소용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고통을 느끼는 때는

일상과는 차이가 큰 이별, 사고, 재난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목을 메고 살던 재물이 사라지는 때이죠.

 

그런데 인간의 삶이란

한시도 빠지지 않고 그것을 전제로 유지됩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고, 변하지 않는 행복도 없습니다.

사라진다는 결론은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으로 행복했을까요?

 

그리고 일상의 임계치를 넘어선 고통에서만

고통의 진가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잠든 아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선잠에서 깨야만 사탕이 사라진 것을 아니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채

일종의 꿈꾸는 상태에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자 사실입니다.

고통이라는 수단은 자기 관찰과 깨어남으로 이끄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그러나 에고는 이 고통마저 처연한 무의식 속으로 끌고 내려가

웬만한 고통이 아니면 충격받지 않도록 방어합니다.

무의식 속에 완전히 묻어버린 고통을 끌어올려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식을 깨어나게 하는 거대한 계기가 됩니다.

대면할 용기는,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

하느님이 선물로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