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 979

[함께하는 세계사] 세계사 3대 시민혁명, 그 첫 번째! 명예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1685년, 당시 잉글랜드 군주였던 찰스 2세가 적법한 아들 계승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형제인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즉위하게 됩니다. 사실 제임스 2세의 즉위 과정이 아주 순탄치는 못했는데요.이는 그가 개인적으로 영국 성공회나 개신교가 아니라 가톨릭을 믿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16세기 초반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잉글랜드 사회에서는 줄곧 가톨릭에 대한 불안감과 혐오감이 강해져 왔기 때문입니다.특히 잉글랜드 군주가 가톨릭을 믿는 경우 그가 가톨릭을 믿는 또 다른 외국 국가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 귀족들을 탄압할 것이라는 음모론이 매우 강했죠. 따라서 헨리 8세 이후 잉글랜드 귀족들은 가급적이면 가톨릭을 믿는 군주를 피했고 군주가 가톨릭을 믿는다는 소문이 퍼질 경우 왕과 의회는 긴장 ..

[함께하는 세계사] 프라하의 봄, 어디까지 알고 계셨나요? | 체코슬로바키아 이야기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치러진 1946년 선거에서 공산당이 총 300석 중 114석을 획득하며 제1당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거 이후 공산당과 공산당 이외 정당들 간의 갈등이 점점 커졌는데요.이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1948년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에드바르트 베네시를 상대로 쿠데타를 벌이게 되죠. 소련의 군사적 개입을 두려워했던 베네시는 이에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는데요.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향후 40여 년간 공산당의 1당 독재 체제가 갖춰집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시 동유럽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 중 하나였기에 이곳에서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서방권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렇게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긴 했지만1950년대와 60년..

[함께하는 세계사] 세계사 3대 시민혁명 중 마지막! 프랑스 혁명은 왜 시작 되었을까?

1780년대 후반 프랑스는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7년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지만 딱히 이득을 보지 못하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고자 외국에서 빚을 지고 돈을 빌렸지만 제대로 갚지 못하고 있었죠. 게다가 1780년대에는 흉년이 이어져 많은 이들이 굶어 죽는 등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18세기 후반 들어서 독일의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한 공론장이라는 것이 점차 발달하게 되었는데요.주로 카페나 살롱, 또는 독서 클럽을 가리키는 이 공론장에서는 지식인들이 서로 계몽주의에 관한 서적을 돌려보며 새로운 정치 철학이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게다가 공론장에서는 철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의 소식..

[함께하는 세계사] 유럽 대륙, 민족국가라는 꿈을 꾸다! 1848년 혁명 이야기

19세기 초중반 유럽은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유럽의 강대국들은 1814년 오스트리아의 빈에 모여 전후 처리를 어떻게 할지를 두고 회의를 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메테르니가 주도한 이 회의에는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과 같이 나폴레옹과 직접 전쟁을 벌였던 국가들뿐만 아니라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 덴마크, 그리고 스위스와 같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참여했습니다. 당시 독일의 작은 정치 세력들까지 포함해서 총 200여 개의 정치세력 대표들이 빈 회의에 참가했습니다. 빈 회의의 결과, 유럽의 강대국들은 몇 가지 내용에 대해서 서로 합의했는데요.이 중 대표적인 것은 프랑스가 나폴레옹의 전쟁 기간 동안 획득한 ..

[함께하는 세계사] 히틀러가 열을 올렸던 의문의 사업...?!

히틀러는 1933년 1월 총리 자리에 오르고 권력을 잡음으로써 마침내 자신이 꿈꿔오던 바를 달성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자리에 오른 히틀러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습니다.바로 1920년대 말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로 치솟은 독일의 실업률을 낮추는 것이었습니다.이는 대공황의 여파로 1927년 100만 명 정도에 머물렀던 실업자의 숫자가 1932년이 되면 무려 600만 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업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 히틀러가 생각해 낸 방법은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는 것이었습니다.그중에서도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독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인 자동차 전용도로, 즉 아우토반은 히틀러가 공사를 시작한 대표적인 분야였습니다.히틀러는 이런 대규모 인프라 공사의 인력을 동원함으로써 일자리를 만들어내고자 했..

[함께하는 세계사] 수백년간 계속되었던 네덜란드의 국가적 프로젝트!

우리는 종종 어떤 국가나 민족에 대해 생각할 때 그 공동체를 대표하는 상징물을 떠올리곤 합니다.이 상징물은 음식일 경우도 있고, 물건일 경우도 있으며 특정한 장소일 경우도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풍차를 떠올릴 것입니다.그런데 어쩌다가 다른 것도 아닌 풍차가 네덜란드를 상징하게 되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풍차가 네덜란드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분야인 [간척 사업]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대략 영토의 30% 정도가 해수면보다 아래에 위치할 정도로 저지대에 속하는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중세부터 이미 물을 퍼내는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풍차는 꼭 필요한 장치였습니다. 특히 네덜란드 지역에서는 15세기 이후로 여러 호수로 점점 많은 물이 흘러들어..

[함께하는 세계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어떻게 지어지고 파괴되었을까?

기원전 4세기 후반 아테네 지역에서는 데메트리오스라는 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로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밑에서 공부하다가 철학을 벗어나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그리고 스승이 사망한 이후 기원전 317년부터 307년까지 10년간 아테네의 통치를 맡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이후 정치적으로 반대파에게 패배하여 반강제적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같은 그리스 지역 안에 테베라는 곳으로 망명을 떠났지만 머지않아 적들을 피해 이집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데메트리오스는 이곳에서 당시 이집트의 통치를 맡고 있던 일명 구원자라는 별명으로 역사의 이름을 남기게 될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만나게 됩니다. 이집트로 망명을 온 데메트리오스는 정치에서 한 발짝 떨..

[함께하는 세계사] 디즈니 성의 원조,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만들어지게 된 이야기

오늘은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데요.‘새로운 백조 돌성’이라는 뜻을 가진 이 성의 이름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성은 사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익숙한 성입니다.이는 이 성이 바로 디즈니사의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성의 모티브를 제공한 성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독일 바이에른 주의 피센에 위치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있는 자리에는 중세 때 이미 ...와 ...라는 우리에게는 매우 복잡한 이름을 가진 두 채의 성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문서상으로 1090년 최초로 언급되는 이 두 채의 성은 군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던 요새였는데요.중세 시대가 저물고 시간이 지나면서 두 채의 성은 쓸모를 잃은 채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이렇게 방치되..

[함께하는 세계사] 에펠탑은 왜 지어졌을까? 에펠탑의 역사

에펠탑 파리에 처음 들르게 된다면, 누구나 가보는 곳이죠.그런데 에펠탑을 누가, 왜 지었는지에 관해서는 들어보셨나요?오늘은 에펠탑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에펠탑을 짓기로 결정한 이유는 1889년 파리에서 열릴 세계박람회 때문이었습니다.우리에게 세계박람회는 2012년 여수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로 잘 알려져 있죠. 188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는 그 전신으로서 역사적으로 봤을 때 10번째로 열리는 세계박람회였습니다. 당시의 세계박람회는 주로 당대의 최첨단 과학기술을 사람들에게 선보이거나 세계의 진귀한 물품들을 보여주는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188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는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요.그것은 바로 1789년 프랑스 혁명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에펠..

[함께하는 세계사] 루브르는 어쩌다가 박물관이 되었을까? 루브르 박물관의 역사

루브르 박물관 사람들이 파리에 들르게 된다면 에펠탑과 함께 꼭 방문하게 되는 장소 중 하나이자 2018년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입장한 박물관입니다. 그런데 루브르 박물관이 원래는 박물관이 아니라 궁전이자 동시에 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오늘은 루브르 궁전이 어쩌다가 박물관이 되었는지 그리고 박물관이 된 이후 루브르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12세기 후반, 프랑수와 국왕 필립 2세는 파리를 노르망디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짓습니다. 이 요새가 루브르의 시초인데 지금도 루브르에 들르게 된다면 당시 요새로 쓰인 건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를 거치면서 파리시가 점점 확장되자 요새로서 루브르의 기능은 점점 퇴화될 수밖에 ..

[함께하는 세계사]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알아보는 독일의 역사!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에 방문하게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르는 곳이자 오늘날 외부의 독일을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꽤나 복잡한 역사가 깃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오늘은 브란덴부르크 문과 함께하는 독일의 역사에 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18세기 후반에 지어지는데요.그런데 브란덴부르크 문이 아직 건설되기 전 그러니까 17세기에 이미 그 자리에는 브란덴부르크 문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이 문은 베를린 시내와 외부 사이의 경계에 위치하며 도시 내부에 들어오는 이들을 감시하고 필요한 경우 세금을 걷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평범한 행정 건물이었던 장소에 어쩌다가 브란덴부르크 문이 세워지게 되었을까요? 이를 이해..

[함께하는 세계사] 세계문화유산 특집! 바이마르는 어떻게 독일 문화를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을까?

바이마르는 한국에서 파리나 런던, 베를린만큼 많이 알려진 도시는 아니지만 독일인들에게는 독일의 문화를 상징하는 도시 중 하나라고 평가받습니다. 오늘은 바이마르의 도시 역사를 알아봄으로써 인구 7만 명 남짓의 도시인 바이마르가 어떻게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바이마르라는 도시는 이미 10세기 이후, 그러니까 중세부터 존재했습니다.그러나 당시의 바이마르는 지금의 바이마르와는 많이 달랐는데요.이는 1424년 도시에서 큰 화재가 일어난 후 도시가 전체적으로 다시 세워졌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화재 이후 당시 바이마르를 지배했던 베틴 가문은 다른 도시에서 세금을 조달하고 경제적으로 바이마르에게 각종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도시의 재건을 지원했습니다. 한편 바이마르의 위상은 16세기 이후, 크..

삼국지 42 - 조조의 위기

원소가 선봉으로 임명한 왕광군이 동탁을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전멸당하자 연합군 세력 중 10만의 병사가 모여있는 장막, 유대, 교모 등의 산동 주력군은 동탁의 기세에 눌려 더 이상 전투에 나갈 생각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답답해한 조조는 자신이 이끄는 소수의 부대보다 수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있는 자사와 태수들에게 “이 많은 병사들이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설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제후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조조는 그만 화가 나, 혼자서라도 단독 출병을 하기로 결심하여 얼마 전에 만난 위자와 조조를 믿고 따르던 포신을 데리고 수천 명의 적은 병력으로 전장으로 나섰습니다. 한편, 동탁은 왕광군과의 전투에서 손쉽게 승리를 거두며 반란군이 오합지졸이라는 사실을 ..

삼국지 41 - 하북의 원소 & 하남의 원술

십상시의 난 이후, 혼란을 틈타 황제를 바꾸면서까지 권세를 차지한 동탁이었지만 낙양 주변으로, 전국 각지의 군웅들이 모여들며 반동탁연합군으로부터 고립된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전장의 형세를 파악했을 때 낙양보다는 서쪽에 있는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방어적으로도 세력 결집을 위해서라도 득이 될 것이라 판단한 동탁은 190년 2월, 장안으로의 천도를 결정하였고 한 달 뒤인 3월 5일, 황제는 서천하여 장안에 도착하게 됩니다.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에게 밀릴 경우 서량 지역의 힘을 빌리기 위해 한수와 마등에게 더 이상의 죄를 묻지 않고 벼슬을 내주었으며 자신은 낙양에 머물면서 반란군을 대적하고 조정 대소사는 사도 왕윤에게 모두 맡겼습니다.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들의 횡포로 인해 평생을 환관 세력들을 ..

삼국지 40 - 동탁 장안 천도 계획

소설 에서는 190년 동탁에 대항하기 위해 모인 반동탁 연합군에서의 유비 관우 장비의 활약에 따라 동탁을 비롯한 부하 및 장졸들이 수도인 낙양을 불태우면서 장안으로 천도하는 전개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정사 에서는 반동탁연합군에게 패배하여 도주하는 성격의 장안 천도가 아니라 이미, 동탁의 주도로 천도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반동탁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모여들자,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정태는 동탁을 설득하는 데 있어 10가지 이유를 들어 동탁이 군대를 징발하는 일을 막았으나 정태의 계책은 가후에게 가로막히며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때, 동탁이 연합군을 토벌하는데 군대를 모으는 일을 진행하지 못했던 것은 단지 정태의 설득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황제를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기까지 하면서 중..

삼국지 39 - 한복 & 정태

190년, 동탁의 만행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각 지역의 주 목과 자사, 태수들은 서로 긴밀히 연락해 동맹을 맺으며 반동탁연합군을 형성했는데 연합군은 하북 지역에서는 원소를 중심으로 사예주 하내군에 주둔했고 중원 지역에는 장막 장초 형제와 유대, 교모, 조조 등이 진류군에서 장홍을 중심으로 회맹을 맺었으며 형초 지역에서는 원술을 중심으로 노양군에 주둔했습니다. 반동탁연합군, 즉 전체 반란군의 맹주로는 대부분 발해태수 원소를 추대했는데 제북상 포신은 평소 원소의 우유부단한 모습을 떠올리며 반동탁 연합군의 총대장은 원소가 아닌 조조가 적임자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얼마 전 동탁에게서 도망쳐 나와 이렇다 할 군세나, 공식적인 지위가 없었기에 나설 수 없었고 조조는 포신의 호의에 친근하게 대우했습니다. ..

삼국지 38 - 정사 삼국지 반동탁연합군

190년, 동탁은 정권을 차지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소제를 폐위, 홍농왕으로 강등시킨 후 하태후를 시해하였고 진류왕인 헌제를 새 황제로 옹립시켰습니다. 동탁의 만행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10여 명의 주목과 자사, 태수들은 각기 저마다 의병을 일으켰는데 여기에는 후장군 원술을 비롯하여 각 지역의 자사들인 한복, 공주, 유대, 왕광과 태수 계급의 원소, 장막, 교모, 원유, 포신, 장초 등의 무리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연락하며 동맹을 맺고 동탁을 쳐야 한다는 목표 아래 각오를 다졌는데 반동탁 무리를 형성하는데 뒤에서 힘쓴 사람들은 채널 내 삼국지 36편에 등장했던 동탁의 신임을 받고 있는 주비와 오경이었습니다. 한편, 교모는 반동탁 의용군을 모집하기 위해 헌제의 칙서를 위조하였는데 교모의 위..

삼국지 37 - 반동탁연합군

후한 말 190년, 십상시의 난 때 혼란을 틈타 정권을 장악한 동탁은 즉위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소제를 폐위시키고 8살배기 헌제를 꼭두각시로 세우며, 황제 보위에 올렸습니다. 동탁의 만행을 참지 못한 각지의 제후들은 원소를 맹주로 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조직했는데 잠시, 이번 영상을 제작하는데 개인적으로 어려웠던 점은 반동탁 연합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시점에서 정사 삼국지의 내용에 비해, 소설 삼국지연의의 전개가 상당히 많은 창작이 이루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평소, 채널 내 재생목록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정사 삼국지를 기반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반동탁 연합군 부분은 우선 유명한 소설 속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본 후 정사 삼국지 부분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동탁에 맞서는 제후들은 총..

삼국지 36 - 동탁 토벌 음모 & 조조와 여백사

189년, 9살의 황제인 헌제가 등극한 지 한달 뒤 동탁은 신하의 신분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인 상국(相國)이 되었습니다. 동탁은 황제 대행이라는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게 되자 포악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며 자신에게 반박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쳐내거나 궁녀들과 공주 등 눈에 보이는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겁탈하고 다니며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조정을 손아귀에 넣고 권력을 남용하는 동탁을 보고 있자니 기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고위 관료들이나 지방의 자사들은 영제와 환관의 시대에 이어 또다시 한숨과 걱정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명문 출신의 고위 관료들이 볼 때 그나마 환관 시절만 하더라도, 한나라의 정통성에 있어 황제로부터 합법적으로 절차를 받은 자들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반해 동탁의 상국 벼슬은 ..

삼국지 35 - 동탁의 폭정

십상시의 난 이후, 어린 황제가 도주하는 등 궁정의 대혼란을 겪은 와중에 동탁은 황제의 신변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무혈입성으로 낙양을 차지하고 동시에 여포를 손에 넣었습니다. 대부분의 조정 내 신하들과 장수들은 대군을 이끌며 낙양에 입성한 동탁을 보고서 어쩔 수 없이 상황을 그저 두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탁은 조정 내 가장 경계하고 있었던 원소를 불러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황제 폐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고 이에, 원소는 동탁의 야욕에 놀라며 그 자리에서 나와 낙양을 떠나, 기주로 향했는데 이때, 낙양성문에다가 ‘언젠가 동탁의 목을 칠 것이라’는 부절을 걸었습니다. 동탁은 원소가 자신에게 따르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지명수배를 내려 원소를 잡아들이려 했지만 원소와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던 오..

삼국지 34 - 동탁 & 여포

십상시의 계략으로 대장군 하진이 처형되자 분노한 원소가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서 약 2,000여 명의 환관이 살해당하는 ‘십상시의 난’이 벌어졌습니다. 원소는 기민하고 주저 없는 판단력으로 무자비하게 환관들을 모두 처치하고서는 권력투쟁의 승리자가 되는 듯하였지만 살아남은 환관들과 어린 황제가 도망가는 대혼란을 틈타 동탁이 황제의 신변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고 동탁은 3,000명의 군사를 대동하여 궁성 주변을 장악하며, 낙양에 입성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동탁의 입성에 대해서 중앙 정부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던 원소, 원술이나 하진이 지휘하던 부대들은 동탁에게 그리 위압감을 느끼지 않았는데 동탁의 병력들이 수천 명 정도라는 예상과는 달리 거의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새로운 군사들이 도착하는 모습..

삼국지 33 - 십상시의 난 & 동탁

189년, 한나라는 영제 사후 대장군 하진이 주요 권력을 잡고서 원소의 독촉으로 십상시를 압박하던 도중 궁지에 몰린 장양을 비롯한 십상시는 되려 하진을 함정에 빠뜨려 처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른 조서를 위조하여 그간 환관들과 가깝게 지내온 번릉과 허상을 각각 사례교위와 하남윤으로 임명했습니다. 하지만, 하진의 충직한 부하였던 오광과 황실 근위대의 지휘 책임자였던 원술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에 놀란 장양과 무리들은 태후와 어린 황제를 협박하여 유협인 진류왕을 함께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환관들은 북궁으로 통하는 통로를 따라 도망가다가 멀리서 환관들을 찾아 나서던 노식과 마주쳤는데 무기를 들고 있던 노식이 환관 단규를 향해 소리치자, 놀란 단규가 하태후의 손을 놓쳤고 이 틈을 타 하태후는 혼자서 도망을 쳤습니..

삼국지 32 : 십상시 장양의 노여움

영제 사후, 소제의 시대로 접어들어 군권 장악은 대장군 하진에게 모두 집중되면서 하진은 오랜 세월 동안 환관들과 대립각을 세워온 사대부들의 환관 숙청 바램을 모른 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질 경우 십상시가 정치적인 압력을 가하여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생각에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원소가 전국에 있는 명장들과 군벌들을 낙양 근처로 불러들여, 대규모 병력으로 하여금 환관들을 말소시킬 수 있는 명분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하진은 원소의 제안에 적극 찬성하였습니다. 주목받는 이들로는 이미 서량의 난을 제압한 후 조정으로부터 군대를 반납하라는 명을 어기고 장안에서 추이를 관망하고 있던 동탁과 무예와 용맹이 뛰어난 병사들을 이끄는 무맹도위 정원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무맹은 ..

삼국지 31 : 환관 숙청 계획

189년, 영제가 세상을 떠난 뒤, 소제가 후한의 13대 황제로 즉위하면서 새로운 황제의 시대로 접어들자 궁궐 내 권력 중심의 기류는 기존 십상시 무리들에서 하태후의 오빠인 하진 중심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건석은 환관의 세상이 완전히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소제를 폐하고 동시에 하진도 함께 처리하여 다시 왕을 내세우자고 십상시를 설득했지만 십상시는 쿠데타 계획이 무모하다 판단하였고 되려, 건석의 역모를 하진에게 일러바치면서 건석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제, 조정은 하진의 천하가 된 듯 하였으나 환관들은 우선은 자신들이 살기 위해 건석을 버리면서도 한편으로는 하진을 견제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습니다. 소제의 어머니 하태후와 맞서기 위해서는 환관들은 기존 영제의 모친인 동태후와 그의 조카 동중을 중심으..

삼국지 30 : 하진 vs 건석

189년, 후한 제12대 황제인 영제가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궁궐 내 분위기는 하태후, 유변을 지지하는 하진 중심 세력들과 동태후, 유협을 지지하는 동중 세력들로 나뉘어졌습니다. 건석은 영제가 죽기 직전, 유협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공식적으로는 후계자를 정해놓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남인 유변이 후한 13대 소제로 즉위하였습니다. 새로 즉위한 소제는 10대 초중반의 나이로 어머니 하태후가 정사를 대리하였고 외숙부 하진과 원소의 숙부 원외가 정사를 보좌했습니다. 소제의 시대로 접어들며, 권력 중심에 한층 더 가까워진 하진은 우선순위로 평소 자신을 노리고 있던 건석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진은 대장군 자리까지 승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으로는 스스로 천민 출신이라..

삼국지 29 : 영제의 사망 그 후..

후한 말기. 영제의 외척인 하진은 키가 큰 미인, 누이동생 ‘하태후’라는 배경 덕에 대장군까지 승진하며, 권세를 누렸습니다. 하진은 황건적의 난 때 대장군이라는 직책으로서 당고의 난 이후, 환관들에게 억류되었던 청류파 인사들을 구하는데 앞장섰고 점차, 청류계 사이에서 명망을 넓히며 십상시들마저 압박하는 위치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다거나 청류파 인사들을 환관들로부터 보호해 주는 모습과는 별개로 하진의 개인적인 권력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영제와 하진의 누이동생 하 황후 사이에는 황자 유변이 있었는데 영제는 유변보다 왕씨 사이에서 낳은 유협을 더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왕씨의 본명은 왕영, 통칭 왕미인으로 불리는 후궁으로 지체가 높은 집안의 출신이며 총명하고 영리하여 궁중에 선발되었..

삼국지 28 : 명문가의 천출, 원소

황건적의 난이 진압되었을 무렵 기도위로 활약했던 조조는 제남상으로서 빼어난 행정 능력을 보였으나 조정에서는 조조의 재능을 탐탁지 않게 여겨 제남상 자리를 박탈시켰습니다. 조조는 중앙 정부에서 잠시 벗어나 고향에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조조와 친한 친구 사이였던 원소는 대장군 하진의 신임을 얻어 ‘호분중랑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중랑장이라는 직책은 부서에 따라 황제의 호위와 궁중의 경비를 맡거나 혹은 밖으로 정벌을 나가는 역할 등을 맡은 직책이었습니다. 한 예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황보숭은 좌중랑장, 주준은 우중랑장, 노식은 북중랑장, 동탁은 동중랑장을 임명받았습니다. 황건적의 진압 후에는 인사이동이 일어났는데 중랑장 중에서 원소는 주로 황제의 근위대장 역할을 하는 ‘호분중랑장’으로 젊은 나이..

삼국지 27 : 조조의 친인척 4인방 장수들

황건적의 난을 진압할 때 기도위로 출전해 공을 세운 조조는 제남상으로 임명된 후, 뛰어난 행정을 이끌어 전국의 관리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남에서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던 환관들의 친인척인 귀척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줄어들자, 조조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결국, 조정에서는 귀척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조조를 제남상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습니다. 황제와 주변 무리들은 백성들의 삶이 피폐하여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난이 일어나는데도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으니 조조는 잠시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낙향을 결심하게 됩니다. 고향에 있는 동안 조조는 앞으로 나라의 혼란이 올 것에 대비하여 독서와 산책 등을 통해 자기계발에 힘쓰며 친인척 4인방 장수들을 비롯한 무리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조조의..

삼국지 26 : 조조 & 유비 첫 만남

삼국지에서 가장 대립 관계에 놓여있는 두 인물 조조와 유비의 첫 만남은 언제였을까요?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의용병을 이끌고 황건적을 토벌하던 중, 전장에서 우연히 조조를 만나지만 역사 기반의 정사 삼국지 기록은 황건적 난 때, 유비의 존재는 매우 미미하였고 조조는 조정에서 주목받는 젊은이로써 기도위에 임명되어 당시, 둘의 만남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습니다. 후한 말에는 184년부터 황건적의 난을 비롯하여 서량에서는 양주의 난, 하북에서는 장거 장순의 난 등 여러 차례 중앙 정부를 향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유비는 장거 장순의 난 때 참전하여 반란을 제압한 공으로 기주 안희현의 현위가 되기도 했지만 군의 감찰관인 독우를 폭행한 죄로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황건적의 난 때 진압된..

삼국지 25 : 공손찬 vs 유우

187년, 전 중산국상을 역임한 장순과 전 태산태수 장거는 삼군오환 및 선비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하북 지방의 백성들을 약탈하고 일대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때, 장순, 장거의 무리들을 제압하고 다니는 자는 ‘백마장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공손찬으로 그의 백마부대는 유주 지역에서 특수부대로 유명했습니다. 공손찬은 쉴 새 없이 반란군들을 쫓아다니며 각종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이어 나갔고 반란 무리들을 토벌하고 다닌 공으로 기도위로 승진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가 워낙에 많았던 삼군오환 무리들은 공손찬의 활약에도 세력이 줄어들 기세가 보이질 않았고 되려, 삼군오환 무리들을 맹렬히 추격했던 공손찬 부대는 요서 관자성에서 구력거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구력거는 요서군에서 장순, 장거의 반란을 후원한 인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