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 1604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잡아함경 과거에 지은 업이 있으면 거기 따라 보를 알아서 받을 거예요. 그런데 죄지은 사람이 나도 아니고 죄를 받을 사람이 나도 아니에요. 그거는 짓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어요. 그냥 업보만 있어요. 업보는 인연따라 일어나는 거니까 받으면 되는 거고 뭐 거부할 수 없는 거고. 그래서 우리는 이대로 안전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옛날에는 나쁜 놈이었어도 지금 안전하다니까요. 지금 무죄라니까요, 무죄. 옛날에 죄가 있었어도 지금 무죄라니까요. 옛날에 잘 나가는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이었어도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지금 이대로에요. 불교는 에고가 절망하는 공부거든요. 우리는 불교 영적인 공부를 하면서 내가 더 에고의 우월감을 느껴요, 처음에는. 근데 나중에는 이 마음공부는 자기의 우..

대행 스님 법문_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태어나서 시발점으로 이렇게 종교를 믿고 이렇게 가는데 여기까지 와서 여기를 한 번 뛰어넘어서…, 이게 생사에 관한 건입니다, 이게 지금 말하자면. 물질세계에서 이리로 와서 여기를 다시 뛰어넘으면 이제 피안의 세계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넘어간다 이런 소리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이것이 쭉…, 이게 살아서 열반이라고 하는 경계입니다. 죽어서 열반은 없어요. 그러니까 한 번 내가 모든 것을 놔서 돌아서 죽은 세상까지 살아있는 세상과 죽어있는 세상이 동시에 같이 있는데 거기를 찰나찰나 이렇게 한 바퀴 돌 줄 알아야 모가 나지 않게 돌아갈 줄 알아야 50% 50%, 100%를 같이 굴릴 줄 알아야 이게 됩니다. 지금 그것을 뭐라고 그러셨죠? 처음에 물으실 때. 내 듣고도 또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보는 것이 전부다

그 생각에 자꾸 끌려가지 않도록 그냥 그걸 바라보면 돼요. 볼 뿐. 전부에요 그게. 이건 너무 단순한 공부예요. 이 공부는 그냥 보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명상 마음공부를 어떻게 하냐면 이걸 보고 나서 “봤으니까 내가 알아차려서 이걸 없애야 돼”라는 생각이 막 뒤따라오다 보니까 보고 나서 “봤으니까 사라지겠지. 이거 진짜 아니야. 이거 없애야 해. 이건 진실이 아니라 그랬어, 스님 법문에. 여기 끌려가지 마. 너 지금 끌려가고 있어” 이러면서 자꾸 속삭인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생각으로 생각을 뒤덮으려고 그래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보면 돼요, 그냥. 아주 가볍게. 그냥 보고 보는 거예요, 그냥. 그게 다예요.

대행 스님 법문_ 해마다 백종 천도재를 모시는 이유

우리가 왜 밥을 먹고 또 밥을 먹습니까? 왜 아침 먹었으면 됐지, 저녁까지 점심까지 왜 먹고 그 이튿날은 또 왜 먹습니까? 보십시오. 아침 쇳송(종송鐘頌)에 부모의 은혜를 갚고, 국왕의 은혜를 갚고, 만물의 은혜를 갚고 모든 이 생물의 은혜를 다 갚고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듯이, 우리가 낳아서 길러서 이렇게 해서 성장시켜서 놓은 부모입니다. 그러면은 그 부모가 낳아서 기르느라고 이 도리를 잘 배우지도 못한 채 그냥 허덕지덕 허덕지덕 하다가 돌아가셨다 이겁니다. 지금 이 도리 알고 돌아가시는 분들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천도시킬 때는 다시 짐승으로 태어나지 말고 이 지금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무죄 석방으로…, 예를 들어서 개같이 살았으면 개로 태어나야 하고 독사같이 살았으면 독사로 ..

대행 스님 법문_ 시기심을 다스리는 이치

내가 시기 나는 마음이 생기 걸랑은 ‘시기 안 나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놓으라고 그랬죠. 또 즐거운 마음이 생기걸랑은 ‘즐거운 마음을 내게 해서, 같이 내게 해서 감사해.’ 하는 것도요. 그러니까 양면을 다 거기다가 놓으라고 그랬죠. 이게 똑 부러지는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잘되게 스스로서, 거길 믿으면 스스로서 잘되게 이끌어 갑니다, 이렇게. 댁은 그냥 어느 한 개체의 물건과 같은 겁니다. 로보트 있죠? 로보트가 어떠한 물건을 할 때는 누르고, 기계를 누르고, 그 시키는 데가 있어서 이 몸뚱이가 움죽거리듯 지금 우리가 전체가 그럽니다. 그러니까 ‘아이, 잘 가게 해서 감사해’ 또 어디가 고장이 났다 이런다면 ‘ 고장이 나게 한 것도 너니까 고치게 한 것도 너 아니야?’ 하고 놔야 합니다. 그..

대행 스님 법문_ 선과 악을 받아들이는 법

긍정적인 일은 해야죠? 그런데 부정적인 일은 하지 말아야죠? 그렇게 댁에서 ‘긍적적이다 부정적이다’ 하는 걸 알고 벌써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묘법이죠. 그 알고 있는 자체가. 그러니까 벌써 알고 있기 때문에 안하게 되고 알고 있기 때문에 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그것이 긍정이다 부정이다 하는 것이 한 구멍에서 나오는 거지 두 구멍에서 나오는 게 아니죠. 그러니까 나오는 대로 긍정적으로 나오는 거 이것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나오는 것은 ‘부정적으로 나오는 것도 너한테서 나오는 거니까 긍정적으로 나오는 것도 너한테서 나올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가 놔라 이 소리예요. 한 구멍에다가! 누가 하라는 게 아니에요. ... 이거 봐요. 받아들이라는 이치는 이게 나쁜 사람이 나한테 접근을 해올 때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_ 들숨에 미소, 날숨에 평화

틱낫한 스님께서 들숨에 숨을 들이쉬면서 ‘미소’ 날숨에 ‘평화’ 이렇게 말씀하신 게 억지로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보게 되면 미소가 띠어지게 돼요. ‘또 올라왔구나’ 하고 내가 거기 바로 올라온 생각을 따라가느라고 경직되는 모습을 보게 된단 말이에요. 보면서 그냥 스르륵 미소가 띠어져요. 그 말이 뭐냐면 스르륵 긴장이 풀린단 말이에요. 스르륵 그게 실제가 아니라는 걸 보게 되는 거예요, 그냥. 그래서 그냥 웃어넘겨요. “또 끌려갔구나” “또 끌려갈 뻔했구나” 그게 보인단 말이에요. 그냥 보면 그냥 미소가 띠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속에 평화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바라보면 돼요. 그러면 두려운 것도 없어요.

법상스님의 목탁소리_ 두려울 때 그저 볼 뿐

마인드 플리스, 알아차림 지관, 사띠, 위빠사나 멈추고 보라는 거예요. 왜? 진짜가 아니니까. 두려운 생각이 일어날 때 그냥 보라는 거예요. 다른 거 아무 것도 할 것도 없다. 없애려고 애쓸 거 없다. 없애려고 애쓰려고 하면 없애려고 애쓰는 마음이 여기 힘을 실어 줘요. “없애야 되는데” 하는 막 강력한 생각을 부여하기 때문에 “안 없어지면 어쩌지?”하는 두려움도 같이 부여해요. 그러니까 없애려고 애쓰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두려운 마음 생길 때 “이러다 병나는 거 아니야?” 뭐 이런 두려운 마음이 딱 생길 때 그걸 없애려고 애쓰는 거는 이 생각을 더 강화한단 말이죠. 애쓸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가볍게 보면 돼요, 그냥. 지관, 생각을 더 그 생각에 자꾸 끌려가지 않도록 그냥 그걸 바라보면 돼요. 볼..

대행 스님 법문_ 물질보시와 마음보시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렇습니다. 한 바가지 주면 한 바가지가 이자가 늘어서 세 바가지가 올 거고 한 바가지를 훔쳐 갔으면 세 바가지가 손해를 보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천연적으로 그렇게 돼 있어요. 한 바가지를 주면 세 바가지가 오지만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한 바가지를 훔쳐 갔다면 세 바가지가 외려 손해가 난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그런 마음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그런데 없으면 채워주고 없으면 채워주고 할 수 있는 자기 그 보배가 모두들 여러분한테 있습니다. 있는 거를 해서 자기가 가질 생각은 자기가 있는 데서 자기 거 먹을 생각은 안하고 딴 거를 물질로써 훔치려고 한다면 그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그 아상(我相)이나 인상(人相)이나 뭐 수자상(壽者相) 이런 게 상이 많아서 남을..

대행 스님 법문_ 나를 발견하는 관법

그냥... 생활선법(生活禪法)이 아닐까요? 그냥 우리가 생활하면서 하되 그렇게 모든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그냥 내 주인이 그렇게 시키고 있고,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 주인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래라 이런 게 참선입니다, 그냥. 그대로 참선이에요. 그런데 이게 두 가지 여건에서 세 가지 단계로 내가 얘기한 겁니다, 그게. 왜냐하면 나를 발견을 못 했으면 진짜 공부를 못 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면 저녁이면 조용한, 남이 다 자고 조용한 틈을 타서 한 30분이라도 앉아서 '이놈아, 네가 너 있다는 증명을 할 수 있는 거지 누구가 증명을 해주느냐.' 이거죠. 당신이, 당신이 있다는 것을 당신만이 증명을 해줄 수 있는 거지 누가 증명해 주느냐 이거야. 그것이 똑바로 직속 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_ 내버려 두면 알아서 한다

“얘가 잘 알아서 할 수 있을까?” 다음 주에, 다음 달에 중요한 발표가 있거나 중요한 자식 시험이 있거나 중요한 남편 진급에 달렸는데 “이게 잘 될까?” 막 조바심 내지 않아도 돼요. 지가 알아서 할 거예요. 내가 그러지 않아도. 얘가 알아서 할 거에요, 그냥. 얘는 어떻게 알아서 하느냐? 전자동으로 알아서 해요. 어떤 전자동일까요? 그게 업습이거든요, 업식이고. 업이라는 건 과거에 지어왔던 수많은 행위들이잖아요 행위들이 식, 의식으로 쌓여서 자기 인식에 다 아뢰야식 속에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식은 얘가 아뢰야식 속에 다 가지고 있어요. 다 취해서 이걸 나라고 알고 있는 에고가 있잖아요. 이건 얘가 할 일이에요, 그냥. 얘가 알아서 할 거예요. 여러분이 걱정 안 해도 얘가 알아서 ..

대행 스님 법문_ 이유가 많으면 문이 닫힌다

묻는 거를 그렇게 길게 물으면 어떡합니까? 하여튼, 그 말뜻은 우리가 배우는 측에 있어서 맡겨놓는다, 이게 맡겨놓는 그 선을 세워야 우리가 마음이 안위가 되고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러나 걷지도 않고 뛰려고 한다면 안 돼요! 지금 말하는 거 보니까 걷지 않고 뛰려고 하거든. 내가 진짜 걸어 보고 내가 뛸 수 있어야 뛰는 것이지 걸어 보지도 않고 뛰려고 한다면 그건 말이 안 돼. 댁이 그 뜻을 알았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렇게 묻질 않아. ‘내가 놓을 것도 없다’ ‘놓을 것도 없는 데에 놔야 된다’ 이런 것은 뭐냐 하면 ‘돌려 놔라. 돌려 놓지 못하면 입력된 게 그대로 나온다.’ 입력돼서 나오는 거는 피하려야 피할 여지가 없어. 그러니까 입력돼서 나오니까 그것을 다시 바꿔서 입력을 해라, 이 소린데 이 세상..

대행 스님 법문_ 시험을 앞둔 사람들에게

그런데요, 아까 내가 얘기했죠. 한발짝 떼어놓으면 한발짝 없어지고 또 한발짝 떼어놓으면 한발짝 없어진다고요. 그랬죠? 그것이 가만히 편안하게 다 버리고 있으란 말이 아니죠. 어떻게 들었어요? 연방 발이 고정되게 붙어있는 게 아니라 떼어놓는 거죠. 그러니까 아까 얘기할 때 ‘나를 버려야 된다’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자불(自佛)이 하는 거다’ 한다면 나를 완전히 버리는 거예요. 안 그래요? 간략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나를 버려라’ 하는 것은 나를 버리고 중심, 즉 자불만 믿어라 이 소리거든요. 당신이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없으면 몸은 송장이 되거든? 그 내 몸이 없는데 어떻게 자불이 있겠나. 그러니 몸뚱이는 자동차와 같고 자불은 운전수와 같거든. 그러니 차는 운전수를 믿어야지? 또 딴 걸로..

대행 스님 법문_ 선행하는 것도 악행하는 것도 다 내 한마음에 있다

말이야 항상 하는 말이 그 말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전부 차원이 달라지고 그러겠죠. 그냥, 보통 그냥 ‘저 스님은 저런 말씀, 항상 저런 말씀하신다.’ 이러고 그냥 가지 마세요. 이 보이는 게 없으면 여러분들이 보이는 게 없어서 공부하는 데 지장이 많아요. 그러니까 보이는 게 있을 때 여러분들도 같이 공부를 하시구요. 아까도 그런 말을 했지만 악한 거 선한 거…, 이 악한 거를 쓸 때는 어떻게 되고 선한 거를 쓸 때는 어떻게 되나. ‘주는 거 나쁘다고 하는 사람 없다. 그런데 악한 걸 주면 나쁘다고 한다.’ 이런 거요. 그런 걸 여러분들이 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냥 여여하게 살 수 있는 겁니다. 다 알고 계시잖아요. 악한 거는 나쁘고 선한 거는 좋다는 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대행 스님 법문_ 마음공부에도 욕심이 필요할까요?

욕심이 있고 없고 간에 자기 분수대로 자기가 능력대로 지금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죠? 거기에는 자기의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더하고 덜함도 없겠죠. 자기 지금 능력대로 살고 있는 겁니다. 그 능력대로 살고 있는 그 자체를 그대로 자기가 하고 있고 자기가 살고 있고 하니까 아까도 얘기했듯이 주인공, 자기한테 되놓는 겁니다. 현재 자기가 과거 자기한테 그냥 다 놓듯이 현재 자기와 과거 자기가 둘이 아니게 바로 삼심(三心)이 일심(一心)으로 공했으니까 주인공(主人空)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하고 가는 거 자기한테다 놓는다. 그러나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이 그냥 자기가 하고 자기가 그냥 하고 있는 자체 자기가 공했으니까, 주인공이니까 그대로, 그대로 놓고 아주 편리하게 편안하게 그대로 ‘너가, 네 놈..

대행 스님 법문_ 감사함은 모든 것을 녹인다

그런데 말이야 그 지금 마음이 아니라 다 그렇게 욕심부리고 그러는 마음 말고 말이야 움죽거리지 않는 마음이 바로 중심이 되거든. 심봉이 돼. 그 마음과 이렇게 동일하게 됨으로써 거기에다 코드를 꽂거든? 그러니까 지금 그 욕망, 의욕, 그것도 좋은데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으면 그대로 왔다야 그거는, 아주. 시쳇말로. 그냥 감사, 모든 게 다 감사하다면 그냥 뭉청뭉청 무너져 유전성이라든가, 영계성이라든가, 업보성, 인과성, 세균성이 그냥 몽땅몽땅 무너져. 무너지게 되면 환하게 문 아닌 문이 보여. 그랬을 때에 그 문으로 털썩 들어서면 들어서는 사이 없이 들어서게 돼. 그러면 그 뭐,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그 주인이 자긴데 뭐 그러니 얼마나 좋겠어. 그러니까 그저 감사하면 모두가 녹아지게 돼 있어. 그전에 내..

대행 스님 법문_ 좋은 인연을 만나려면

그거는 마음을 내고 안 내고가 없어요. 자연적으로 이 마음공부 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어떤 사람을 만나면 아주 친근하게 생각이 되고 어떤 사람을 만나면 아주 냉랭하게 그냥 담담하게 생각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을 만나면 불쌍한 생각이 들고 이러죠? 그렇죠? 그랬을 때에, 또 어떤 사람을 보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어떤 사람을 보면 못하게 보이고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집안 환경 때문에 아주 곤궁하게 불쌍한 사람이 있고. 이러한 모든 시시때때로 각각 이렇게 보이는 게 있는데 그 보이는 거를 지혜로운 마음이라면 불쌍하면 불쌍치 않게 모든 과거 미래 현재를 한데 싸서 이게 주인공에다 거기다 놓으면 그냥 삼세가 통하는 일이에요, 이게. 그래서 주인공이거든요. 그러니까 거기다 놓고 마음 한 번 탁 내주면 그쪽도..

대행 스님 법문_ 공심으로 쓰는 지혜

오늘 처음 오셨습니까? 그러면 아리송하죠. 얼른 쉽게 말해서 육바라밀이 따로 없고 또는 지혜가 따로 없이 여러분들이 생활하고 가시는 데에 지혜롭게 마음 쓰시는 것이 지혜로우면 그것이 지혜고 그 뭐 별다로 따로 없습니다. 그 속의 진의는 여러분들이 다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 마음,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 아니게 쓰는 마음은 지혜롭고 그거를 정신계와 물질계를 같이 쓰지 못하고 즉 말하자면 물질계에서만 쓰게 되면 그것이 지혜롭지 못하다 이런 말이죠. 그래서 이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 아니게 쓰는 사람들은 공덕이 있지만 그냥 육안으로 그냥 쓰는 사람은 공덕이 하나도 없다. 이 물질만 보고, 내 물질이 물질만 보고 기도 하거나 그런다면 그건 상대를 보고 기도를 하기 때문에 내 마음이 한마음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공덕..

대행 스님 법문_ 불법의 인연을 이어주는 길

우리가 이런 인연 만나는 거는 천 년에 한 번 만나기 어렵다고 그랬어. 그러는데 그런 마음이 얼른 닿겠어, 그거? 그러니까 자꾸 재주를 부려야지, 당신이. 왜냐하면 이렇게 건수가 이리로 이렇게 해서 공부하게끔 건수가 생겨야 되거든. 그러니까 건수를 만들라고. 그저 너무 잘못 되게 하면 안 되니까 그저 편안하게 오게끔 자꾸 건수를 만들라고. 당신이 다리를 놓지 않으면 누가 놔. 그러니까 한생각만 잘하면 올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한생각을 잘해도 오지 않더라 이러거든. 그런데 그것이 마음과 마음에 맘대로 응용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든. 그 영혼을 붙들고 저거 해야지 몸과 말로 해서 그 몸뚱이를 끌려고 그러면 끌어지지 않어. 그것은 마음으로서 마음을 끌어야지 되는 거지 아무리 몸뚱이하고 말로 해서 끌려고 그러면..

대행 스님 법문_ 고라 생각 말고 항상 주인공에 기쁘게 놓으세요

여러분들한테 줄창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나간다면 “아유 팔자운명이다, 뭐 어쩌다” 이런 얘기들을 하고들 삽니다. 그러나 이 마음공부를 하고 가시는 분들에 한해서는 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자기고 마음을 허탕하게 쓰는 것도 자기입니다. 자기가 이 마음공부를 하다 보면 옳고 그른 거, 하지 않아야 할 거 하여야 할 거, 이거를 다 알고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자체를 쓰는 대로 고다, 고가 아니다 하는 것이지 고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본래는. 그런데 고라고 한 것은 오히려 자기를 승화시키는 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막다른 데를 들어가 보지 않았으면 그 처참하고 갈 길이 없어서 쩔쩔매고 이렇게 해보질 못했으면 그런 데가 앞으로 또 닥치면 기가 막히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대행 스님 법문_ 자기 마음의 주인을 무조건 믿어라

어떻게 믿긴 뭘 어떻게 믿어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있는 거니까 믿어야죠. 자기 끌고 다니는 그놈이 바로 자기 마음의 주인인 놈인데 주인 놈이 과거로부터 이끌고, 지금도 또 이끌고 가고 있고 그러는데 어떻게 안 믿겠소? 허공을 믿겠소, 이름을 믿겠소, 고깃덩어리 형상을 믿겠소, 무엇을 믿겠소? 나부터 믿어야, 나부터 알아야 상대를 알고 상대를 알아야 우주를 알고, 세계를 알고 내 나라도 생각할 수 있고, 내 가정도 생각할 수 있고 사회, 국가 모두 생각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나는 이상스럽게 생각이 들어요, 어떤 때는. 어떻게 믿습니까? 이런단 말이에요. 아니, 자기도 자기를 못 믿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믿고 돈은 주고, 또 돈을 남의 보증을 서고, 망하고 온통 이 짓이 나요. 자기가 자기를..

대행 스님 법문_ 세 번 죽는 도리

주인공을 일심(一心)으로 발견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가, 거지든 거지가 아니든, 남자든 여자든, 중이든 중이 아니든 막론해 놓고, 말입니다. 아까도 얘기한 바와 같이, 동자 얘기를 했듯이 사람은 다리 절름발이가 돼서는 아니 됩니다. 즉 무심(無心)과 유심(有心)이 절름발이가 돼서는 아니 됩니다. 동시에 같이 돌아간다는 자체를 아셔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과 마음 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와 동시에 돌아가죠? 어디 따로따로 돌아갑니까? 눈과 귀가 따로따로 돌아갑니까, 어디? 얼굴이? 그러니까 이것을 동시에 악과 선도 거기 놔라. 악한 거는 놓고 '선하게 이끌어줄 수 있지 않느냐.' 하고 놓고 선하게 돌아가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모든 거를 한군데다가, 놓는 것이 자기가 공해서 본래 ..

대행 스님 법문_ 편안한 경계를 좋아하면 잘못된 건가요?

...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 내 마음이 편안하면 이 육체 안에 있는 중생들도 편안하기 때문이지. 모두가 한데 뭉쳐서 놓을 수 있는, 그 주인공에다 놓을 수 있는 작업이 물러서지 않는 진실이라면 바로 그 마음은 한마음으로 돌아가니까 편안함이 오고 끄달리지 않는 법이지. 그럼으로써 이 우주의 천체는 근본 하나로 돌아가지만, 평등하게 돌아가지만 용도에 따라서 끌어 쓰는 용도는 다 달라요. 그러니까 평등하게 둘로 보지 말고 내 주인공에다 모두 일임해서 놨을 때 그러고 자기한테 용도에 따라서 다가오는 그 모두를 건건이 거기에다가 놓고 거기서 만이 할 수 있다는 그 믿음을 진실하게 가질 때 하늘이 무너져도 거기다가만이 할 수 있을 때 죽고 사는 것을 탓하지 않을 때 그런 때에 비로소 편안하면서도 그 모두를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_ 탐진치 삼독의 참된 의미

어떻게 하는 것이 불이중도(不二中道)의 수행이냐?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고 과도하게 버리려 하지 마라. 탐진치 삼독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라 그러잖아요. 이 취사간택심이 바로 탐진치 삼독의 다른 말입니다. 즉 좋은 것을 취하려고 막 애쓰는 마음이 탐심이죠. 또 싫은 것을 “내 인생에서 없어져야 해” 하고 막 몰아내려고 하는 것도 탐심입니다. 또 좋은 걸 내 걸로 막 갖고 싶은데 가져지지 않을 때 화가 납니다. 그게 진심이죠. 삶은 이대로 완전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탐심과 진심이라는 허망한 분별 망상이 그냥 허망한 분별이었음을 모르니까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을 치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 탐진치 삼독을 여의기 위해서는 불이중도(不二中道)를 실천해야 되고 불이중..

대행 스님 법문_ 마음으로 자기를 다스려서 놔라

일체에 놓는 거라고 그러는 거는 우리가 지금 걸어오셨지마는 뒤 발자취를 남기지 않고 짊어지지 않고 오셨습니다. 고정됨이 없이 그냥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본래는 그냥 놓고 가는 거죠. 놓고 간다는 말 자체도 할 게 없는 거죠. 헌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만날 마음으로 끼워 잡고, 착을 두고, 욕심을 두고, 집착을 하고 이렇게 모두 하니까 그걸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되풀이 해서 말씀해 드리는 거죠.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망상으로써 모든 거를 끄달리고 이렇게 하는 것과 지금 놓는 것과 어떤 것이 더하냐고 했는데, 망상은 망상이 아니라 그대로 자생을 길러내는 원소 자체의 그 과정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고요. 그러니까 망상이라고 할 게 없다 이런 거죠. 그 생각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목석이지 그게 ..

대행 스님 법문_ 지금 말을 하게 하는 주인공을 믿어라

스님 법문에서 주인공에게 맡기라는 말씀을 들었는데요. 그러면 그 주인공은 제 몸 속에 있는 것인지, 우주에 다, 허공 법계에 꽉 찬 것인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주인공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그러면 염불이나 기도는, 주인공에 맡길 경우 꼭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여쭤봅니다. 사람은 뭐, 문이 여기도 많죠. 염불해서 가는 문이 있고 경을 읽어서 가는 문이 있고 선(禪)을 해서 가는 문이 있고 여러 가지의 문이, 이 문 저 문이 많죠. 그러나 문밖에 나가면 그저 다른 문이 아니죠. 이 주인공(主人空)이, 이 마음 자체가 내놓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빛깔도 없습니다. 이 허공도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허공이 있다는 것은 아시죠? 그렇다면 그와 같은 겁..

대행 스님 법문_ 마부의 지혜로운 다스림

불씨는 우리 원소의 에너지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불씨로 하여금 마음을 내게 할 수 있는 그런 활동력이 있죠.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치면 불이 들어오듯이 그렇게 불이 들어올 수 있게끔 마련한 그 자체가 바로 원소 자체의 에너지입니다. 그러면 그 에너지, 불씨라고 합시다. 불씨가 없으면 마음을 낼 수 없고 마음을 낼 수 없다면 육체가 움죽거리지 않는데 어떻게 할 겁니까? 삼합이 동일하게 하나가 돼서 지금 움죽거리고 말을 하고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니 바로 소를 타고 피리를 분다 이 소리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소를 타고 달구지를 끌고 다닙니다. 예를 들어서 마부는 마음이요 바로 육신은 달구지요 소 는 자기의 주인공, 바로 조상입니다. 과거에 살던 자기, 현실에 사는 자기. 현실에 사는 자기는 달구지..

법상스님의 목탁소리_ 집착 없이 하면 더 큰 열정이 생겨

집착 없이 하게 되면 집착을 가지고 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열정과 에너지와 뭔가 막 삶의 뭐랄까 요즘 말로 파이팅이 넘치게 되는데 하되 함의 없이 할 때는 과도하게 애쓰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열정과 에너지가 이렇게 막 나도 모르는 무언가의 어떤 힘이 나를 끌고 가는구나 내가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어떤 그런 자각이랄까 그런 일이 생겨납니다 이처럼 사실은 잘하려고 기를 쓰면 잘해지지 않아요. 릴렉스 할 때 이완할 때 턱 내맡길 때 그때 무위로써 유위 조작하려 하지 않을 때 진짜 잘 되는 일이 벌어지거든요.

법상스님의 목탁소리_ 문제가 나를 찾아온 이유

이 문제가 나에게 찾아온 것은 괴로움으로써 나를 죽이기 위해서 문제로써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부처로서 찾아왔단 말이에요. 왜? 여러분이라는 이 70억 인구 가운데 하나의 존재, 하나의 삶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펼쳐지고 있을까요? 그게 여러분으로 피어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대로일 때 가장 완전한 부처예요. 발 아래에 있는 꽃다지가 “나도 장미꽃처럼 강렬하고 화사한 꽃이 될 거야”라고 한다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평생 자괴감에 빠져서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살아야 할 겁니다. 문득 꽃다지가 지금 이대로를 허용하게 됐을 때 “나는 이렇게 볼품없는 꽃다지로서 완전히 허용하고 받아들이고 이 꽃다지의 삶을 살겠어” 라고 받아들여줄 때 그때 꽃다지인 채로 문제가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대행 스님 법문_ 경전을 대하는 마음 자세

부처님께서는 49년을 설하고 경전을 편집해서 냈어도 이날까지도 그 마음을 모두 모르고 모르면서 그 마음을 움죽거리고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나로서는 경전을 봐야 옳다 경전을 안 봐야 옳다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죠. 왜냐하면 이 오장육부 속에도 천차만별의 모습들도 다르고 행도 다르고 모두 다르듯이 이 세상만사의 모든 마음 내는 그릇은, 마음 자체는 다 똑같지만 마음 내는 자체는 다 다른데, 천차만별로 다른데, 그건 그릇대로 자기의 생각대로 할 뿐이지 누구가 봐야 옳다, 안 봐야 옳다 할 수는 없죠. 그러나 우리가 참고적으로 생각을 해보세요. 경전을 써놨어도 풀이를 해 놨어도 기복으로 풀이를 많이 해놨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기복으로 써놓은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참고적으로 우리는 지혜를 넓혀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