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우학스님_금강경

우학스님의 금강경 8_2.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Buddhastudy 2017. 4. 13. 20:25



그래서 다시 원문을 보시면 106페이지 한글 원문을 다시 한 번 봐봐요.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부처님세계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제가 부처님의 말씀하신 뜻을 알기로는 부처님세계라고 이름 할 만한 일정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만한 지난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가 없다.’ 이 부처님은 중생마다마다 설하셨기 때문에 중생의 숫자만큼 법문이 많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 중생은 다 취할 수가 없는 거죠.

 

다 말할 수도 없으면 법도 아니고법이라 할 것도 아니라 이거죠. 뭐냐 하면 부처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거울이라면 거울 앞에 중생이 서면 거울 앞에 선 중생의 모양대로 그만큼 그만한 말씀이 화상으로 나오는 거죠. 영상이 비추어지는 거죠.

 

그래서 또 아니다라고 하는 이 법이라 할 것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거울에 비추어진 자기 모습이라. 우리가 법문이라 해서 법문을 듣고 경전이라 해서 경전을 보고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 모습을 경전에서 보는 거고, 법문에서 자기 모습을 찾아내는 겁니다. 그래서 마치 그것은 거울 앞에선 자기 모습과 똑같은 거죠. 부처님 말씀은 바로 거울에 비유가 되는데, 그렇다면 이것이 고정된 법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법 아님도 아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아니냐? 그러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냐? 또 이렇게 얘기를 할 수가 있어요. 그럼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거기서 아주 중요한 말씀 중에 하나가 해설 2번 보면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런 말이 있어요. 찾았습니까? 이 말은 스님들이 법문 중에도 많이 쓰는 말입니다.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는 일정한 법이 있지 않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둘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일정한 법이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법이 없다.’ 요 해설이 더 좋습니다. 이것을 현재 우리 신도님들의 그 어떤 수행수준에 맞추어서 말씀드리면,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세계다. 깨달음의 세계다. 이렇게 볼 수 있는데, 이 깨달음의 세계가 되었든, 부처님의 가치가 되었든지, 또는 부처님 가피가 되었든 간에, 딱 거기까지 부처님 가피고, 그 위로, 그러니까 우리가 세속적으로 80점 이상은 합격이고, 80점 이하는 불합격이다. 이런 잣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보는데 있어서는.

 

그러니까 내가 1년차에 들어와서 공부하는 그 마음의 어떤 기쁨이나 진리의 기쁨, 법열이 다르고, 2년차에 또 가서 공부하는 법열이 다르고, 3년차에 또 다르고, 다 다릅니다, 이게.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보면, 처음에 기도할 때, 그때 느끼는 그 감정, 법열과, 또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어서 또 절에 가서 기도하거나 혼자 기도할 때 느끼는 감정이 또 달라요. 그런데 공부를 제대로 해가면 이 느끼는 부처님 몸으로부터 느끼는 이 법열이 차츰차츰 나아지고 있고,

 

나중에는 이것이 , 부처님의 접근하는 이 법열, 깨달음의 세계가 무한대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있어요. 바로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여기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것이 부천 세계다 하고 딱 고정된 것은 없어요. 아욕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일정한 법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무위법이라는 말이 있어요. 무위법. 무위법은 유위법의 상대개념으로 쓰여 진다. 유위법이 조작되고 만들어진 법이라면,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법은 다 유위법이죠. 그런데 진리 그대로의 법, 그것은 무위법입니다. 그래서 허공이니 열반이니 진여니 하는 표현을 빌리기도 하나, 실은 말을 용납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