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조_시래기톡

[시래기톡] 김병조의 그때 그 시절 유년시절편 -하-

Buddhastudy 2019. 3. 4. 19:35


Q. 선생님의 어린시절은 어떠셨나요?

 

나는 어렸을 때 비록 집은 가난해도 좀 귀한 대우를 받았다고 할까

우리 어머님이 16에 시집을 오셔가지고 26에 저를 낳았어요.

우리집은 장손집이다 보니까 아드님 아드님을 바라던

그때는 남아선호 사상이 아주 극에 달했던 시기니까.

 

결혼하시고 7년 만에 누님을 보시고, 그리고 10년 만에 저를 보셨기 때문에

집안의 화제였지. 화제.

나는 원래 별명이 배추머리가 아니고 용 알덩어리에요. 용 알덩어리. ㅎㅎ

 

우리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아주 그냥 보물이지. 보물.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을 때는 일을 해야 해요.

학교에 갔다 오면 나무하러 가야 돼.

또 쉬는 시간에 꼴을 베어야 돼.

고향말로 깔 빈다 그러는데 꼴을 베서 소를 한 마리씩 키워요.

어린 소를 가져와. 큰 소를 만들고 그 소가 새끼를 낳으면 그 어른 소는 돌려주고, 그 새끼소가 내 소가 되는 거예요.

 

그때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시기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만한 일을 찾다보니까, 소나 닭이나 염소를 키우게 되는데

그거를 대게 어린이들이 담당을 해요.

어른들은 나가서 농사를 지어야 되니까.

 

만약에 나한테 누가 일을 시켰다.

무슨 뭐, 나무를 해오라고 시켰다던가,

그땐 우리 할아버지한테 불호령이 떨어지는 거지.

우리 귀한 놈을...

 

그래도 이제 나는 나무하러 가면 안 되는데 나무하러 가는 게 재밌어서

재밌어요, 나무 하러 가는 게. 높은 산을 올라가가지고.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등산이지.

 

나무도 해오고, 그러다가 혼나기도 하고, 그럴 정도로 내가 아주 귀하게

비록 집은 가난했지만 귀하게 이렇게.. 귀남이지. 귀남이. 요즘 말로는.

 

그런데다가 내가 아주 유명했어요.

내가 이제 장성 사거리 국민학교라는, 그때는 초등학교라고 하지 않고 국민학교라고 그랬는데

왜 유명했냐 그러면

지금은 설날이나 추석날이 명절인데, 우리 어렸을 때는 운동회날이 명절이야. 운동회날.

 

우리 아버님 형제가 9남매야. 아홉. 아홉을 두셨는데, 고모가 세분이고, 작은 아버님 남자 형제분 여섯 분, 그래서 9남매가 아버님 형제분들이신데

지금 생각을 해보며 그렇게 엄하시고 우리 할아버지는 아버지보다도 더 엄하셨으니까.

조선조 때 분이니까 1890년대 태어나신 분이니까.

 

그랬는데도 지금 생각하면 아! 그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셨다.

이게 바로 아버지 마음이라고 느끼시는 게

그 세 따님을 멀리 보내는 게 짠하셔서 다 면 안에 시집을 보낸 거야.

 

9남매가 장성군 북이면 안에 사는 거야.

9남매가 다 학부형일거 아니야.

운동회날은 다 모이는 거여.

 

예를 들면 환갑 때나 무슨 명절 때는 무슨 일이 있어서 못 만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식이 우선이니까, 그날은 학부형의 입장에서 다 9남매가 모이게 된다고.

그러면 이제 오빠, 동생, 그리고 도시락도 먹고.

 

우리 할아버지는 특히 장손이 학교를 다니고 그러니까,

원래 학교 잘 안 오시는 분인데, 학교도 오시고

온 시구가 모이는 날인데, 그 날은 내 날이야. 왜냐?

응원단장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웃겼어요.

 

나는 어렸을 때 라디오 한 대, 텔레비전 한 대 없는 데서 자랐어요.

내가 라디오를 처음 본 게 4학년 때, 우리 당숙이 인천에 사시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시골에 오시면서 자석 라디오라 그래가지고 안테나를 감나무 꼭대기에다가 안테나를 달고

그걸 밑에다가 어스라고 그래서 자석식 라디오.

그게 우리 동네에 처음 왔던 거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예술에 대한 재능이 취미가 있어가지고

그 라디오에서 연속극을 해요. 연속극. 회전의자라고.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하는 라디오 드라마가 있어요.

그거 들으러 라디오 드라마 하는 날엔 난 공부고 뭐고 없이 울타리에서 듣는 거야.

난 당숙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울타리에서 그거 라디오도 듣고.

 

하여튼 뭐, 처음으로 라디오를 접한 게 4, 5학년이었을 정도로

텔레비전은 아예 생각도 못하고

그랬는데도 그렇게 웃겼어. 응원하면서.

파자마 춤추고, 337박수 이렇게 뭐, 춤추고 이러면서 아주 유명했어요.

 

또 그런데다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장성군 웅변대회 반공 웅변대회야 반공.

그때는 반공이었으니까.

반공웅변대회에 나가서 1등도 하고, 그래 가지고 아주 똑똑한

또 그러면서도 공부도 잘하고,

대게 응원 잘하고 웅변 잘하는 아이들이 공부를 좀 소홀하기 마련인데 난 공부도 잘했거든.

 

이제 소문이 날거 아니야. 좁은 동네니까.

우리 어머님 댁호가 영광댁이신데

영광댁 큰 아들 똑똑하다더라.’ 이러게 소문이 나서 할아버지 귀에 들어간 거지.

그렇지 않아도 귀한 우리 장손이, 바라만 봐도 용알덩어리 같은 우리 장손이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다 그러니 가르쳐야 될 텐데.

 

우리 할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나, 이렇게 생각을 해보는데

우리 장성은 감이 많아 감.

그러면 아침 새벽에 일어나. 할아버지하고 같이 방을 썼어요.

 

우리는 큰 방이 있고, 가운뎃 방이 있고, 할아버지 방이 있어.

큰 방에는 할머니, 어머니, 누나 동생들이 한 이불속에서 살아.

가운데 방에는 아버지하고 어머니하고 막내 동생.

사랑방에 할아버지하고 나하고 둘이 잠을 자는 거야.

 

할아버지가 이제 아침에 할아버지하고 같이 잠을 자고 일어났어.

근데 할아버지가 안 계셔.

어디갔나 했더니 몇 시간 있다가 몇 분 있다가 감, , 감을 주워 오셨드라고.

 

감을 한 10개를 주워오셔 가지고 홍시는 나를 주시고 땡감은 할아버지가 잡수신 거야.

나는 그때 어렸으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땡감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

지금 생각을 하니까, 귀한 우리 손주한테 다디 단 홍시를 주시고

본인은 얼마나 배가 고프셨던지 땡감을 드셨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가끔 이제 홍시 있잖아. 홍시. ‘홍시를 보면 어머님 생각이 난다는 박인로 선생의 시가 있잖아.

반중 조홍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은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그로 설워 하노라.

..’

하는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난다 이런 시가 있는데

나는 홍시를 보면 할아버지 생각이 나.

할아버지 드리고 싶고.

 

그런데 우리 아버지 어머님은 내가 스타가 되는 걸 보고 돌아가셨어.

우리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어.

내가 임종을 지켜봤거든.

 

어렵게 어렵게만 살다가 가신 분이라, 나는 제일 그리운 분이 우리 할아버지야.

내가 이렇게 서울에 집 짓고 사는 것도 보여 드리고 싶고

특히 우리 손주 놈 광제 보면은 어쩔 줄 몰라 하실텐데.

 

나는 이제 그 광제를 보면서 우리 손주를 보면서

나는 우리 할아버지를 늘 생각하게 돼.

할아버지가 그리워.

그런데 안 계셔.

 

참 묘하지.

고맙고, 훌륭하고, 모시고 싶고 그럴 때는 안 계신다 이 말이야.

살아있을 때 그걸 느껴야 되는데.

 

나는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 운동회

그리고 나는 사진이 없어. 사진이.

어렸을 때를 회고 하고 싶은데

사진을 찍을 만한 여력이 없었어.

 

사진이 딱 한 장 있었는데,

도민증이라고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는 아저씨가 고모께서 나를 업고 다니셨는데

내가 어렸을 때는 좀 예쁘게 생겼었다네.

그래가지고 찍어준 사진이 있어요.

그거를 어떤 신문사에서 어린시절에 관한 기사를 쓰고 싶다고 사진을 가져갔는데

그 뒤로는 사진이 없어졌어.

그나마 한 장 있는 사진도 없어져 버렸어.

 

난 앨범도 없고.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앨범이 없어.

앨범을 살 돈이 없었어.

행복했지만...

하여튼 그립긴 해.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가라고 그러면 난 가고 싶지 않아.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