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MBC1919-2019 기억-록

[기억록] 이소연, 박경식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Buddhastudy 2019. 8. 30. 20:39


밥 좀 주시오.”

고향에 좀 보내주시오.”

 

일제시대, 일본과 만주 등

토목공사나 탄광에서 혹사당한 조선인들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만

1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매일 합숙소에서 작업장까지 끌려 다녔다.

병으로 일할 수 없는 자는 학살되었다.

때론 숨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생매장을 당했다.

 

 

참혹한 조선인 강제연행의 진상을

최초로 고발한 한 권의 책

 

이 책을 쓴 박경식 선생님은

조선인 강제징용문제를 조사하기 위해서

일본 전역을 다니셨다는데요

공사 현장이나 탄광을 일일이 찾아다니시고

생존자들을 만나고 치열하고 철저하게 증거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일본의 여러 광산이나 토목공사 현장 등에

동포의 유골이 수 없이 묻혀진 채로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이런 잔학한 일을 망설임 없이 자행하고

어떤 반성의 빛도 없는 사람들에 대해

정의와 인도의 이름으로 고발하고 싶다.

-박경식

 

유리바 탄광

1945년에 동포수가 약 1만 명을 돌파했다.

 

12교대로 12시간 노동했으며

갱도 곳곳에는 감시가 세워져 있었다.

갱내에서는 자주 연장이나 채찍으로 때리는 소리와

용서해달라는 비통한 부르짖음이 메아리쳐

마치 생지옥 같았다고 한다.

 

일본 나가노현

조선인 6천여 명 강제연행

 

공습에 대비

일황 등을 대피시키기 위해 만든 거대한 지하 동굴

강제동원 된 조선인이 동굴 벽에 남긴 흔적

 

이곳에 진상을 최초로 고발한 이도

박경식이었습니다.

 

여기에 강제 연행된 동포 수천 명이 군의 감시 아래 노동을 했다.

이들 중 기밀 장소를 판 수백 명은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이는 당시 군부의 지배층이 기밀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 동포를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조선인 강제연행을 고발하는 강연을

쉴 새 없이 이어간

박경식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일흔이 넘어서도 벼룩시장을 누비며

단 한 장의 자료라도 더 찾기 위해 노력했던

박경식

 

2018.10.30 대한민국 대법원 확정판결

일본기업은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1억 원 씩 배상하라

 

 

다른 민족을 압박하는 민족은

자유로울 수 없다.

 

박경식

(1922.12.7~1998.2.12)

 

이소연

박경식을 기억하여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