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분별이 만든 교묘한 깨달음! 분별이 만든 천지창조의 과정

Buddhastudy 2021. 12. 30. 19:29

 

 

 

5차원 실존에 이르면

··을 비롯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체계가 모조리 부서집니다.

2차원 평면 세계에서 3차원 입체 세계로 넘어오면

그동안 알고 있던 2차원의 지식들은 까마득한 먼 나라 얘기가 되고 맙니다.

 

그렇듯 실존(1원인)

가히 천지개벽을 수만 번 하는 것보다 큰 의식의 변화를 몰고 옵니다.

 

싯다르타는 세 명의 스승으로부터 참나(진아)와 절대, 그리고 해탈의 경지를 배웠지만

그건 모두 4차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물론 3차원의 의식 구조에서 보면 4차원으로의 도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성과입니다.

 

수행자들이 평생을 매진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높고 높은 경지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5차원 실존의 열매마저 움켜쥐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두 개의 차원을 뚫고 실존에 이른 쾌거인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실존에 잠겨 있을 때 어떤 상태였을까요?

그리고 다시 생각을 일으키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요?

아쉽게도 이 대목에 관한 얘기는 불경에 없습니다.

 

싯다르타는 깨닫는 법에 대해서는 설하면서도

깨달은 이후에 대해선 침묵했습니다.

그건 수행자들이 깨달음의 상태를 관념으로 그려

허상에 사로잡힐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시운이 변했으니

에 대한 변화 정도라도 밝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5차원 실존,

이 상태에서 사물을 보면 평상시와 다름이 없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의 형태는 깨닫기 전이나 동일합니다.

다만 한 가지 놀랍도록 달라진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입니다.

 

가 있긴 한데 존재하는 모든 것 자체이기에 매우 모호한 상태에 놓여있게 됩니다.

물론 실존에 몰입해서 보면 그것이 너무 당연해 일모의 의심도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形而下의 관점에서 돌이켜 보면 는 참으로 막연하기만 합니다.

아무튼 실존이 임에도 마치 원처럼 분명히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상태로 쭉 있다가 불현듯 를 분명히 하려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싯다르타의 의식이 중생에서 붓다 쪽으로 향했던 것에 역행해서

이번에는 붓다에서 중생으로 거꾸로 흐르게 됩니다.

이 과정을 잘 살펴보면 분별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도 아니고 도 아닙니다.

非有非無로 한정을 하자 의 윤곽이 희미하게나마 그려집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모호하기는 매한가집니다.

 

그래서 실존은

시야를 더 좁히게 되는데, 이때 나오게 된 것이 이면서 인 것입니다.

가 공존하는 형태의 는 앞선 非有非無보다는 그럴듯해졌습니다.

 

이렇게 가 공존하는

다시 말해 모순된 것들이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는 세계를 일러

4차원이라 합니다.

 

양자역학에 보면 소립자들이 상태중첩으로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들이 나오는데

바로 4차원의 질서에 편승한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랜 수고 끝에 실존은 가 공존하는 형태의 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도 뭔가 찜찜한 구석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존은 다시 한번 시야를 좁히게 되고

어느 순간 가 갈라져 어느 한쪽으로 결정된 세상이 펼쳐집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3차원 세계입니다.

 

이제 는 배경 속으로 잠재되고, 보이고 만져지는 모든 것은 뿐입니다.

실존은 무수한 속에 내재 되어 그것을 라고 믿고 살아가게 됩니다.

3차원까지 응축해 좁혀진 실존,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래서 삼라만상 모든 것은 실존 그 자체이지만

우리가 속한 차원에서 표현하면 라고 믿는 실존이 됩니다.

 

싯다르타는 깨달은 이후 한참의 시간이 흘러 形而下까지 의식이 돌아옵니다.

이렇게 되면서 싯다르타에겐 붓다나 중생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면서도 있는 상태

다시 말해 분별에서 자유로운 의식 상태가 됩니다.

 

싯다르타는 이렇게 중생의 모습까지 회복해

분별과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마침내 깨달음의 숙성 과정까지 마치게 됩니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분별을 마음대로 써도 머무름이 없어 괜찮지만

일반 사람들은 문제가 생깁니다.

 

실존이 를 분명히 하는 과정은 매우 좋았지만

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되돌아가려는 건 고사하고 를 찾던 습성에 의해 계속해서 를 더 분명히 하려고만 합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에 관한 초점을 뚜렷하게 하려는 데서

온갖 번뇌망상이 일어나고 고해苦海가 돼 버립니다.

자신이 실존임을 잊고 를 돋보이게 하려고 혈안이 되면서 중생은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이죠.

에 갇힌 실존의 일부에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바로 수행자들의 구도심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도심에도 여전히 나를 분명히 하려는 욕구인 아상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이것이 수행을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수행을 통해 한두 단계의 성과를 얻으면

아상이 작동해 세 단계 네 단계로 격상시킵니다.

아상은 너무나 교묘해 실존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왜곡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렇게 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작동하는 상대적 비교 심리를 총칭해 분별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필히 분별의 함정을 살펴야 합니다.

 

분별에 속으면 그 길로 수행은 멈춥니다.

특히 명패를 조심해야 합니다.

스승의 명패, 고승의 명패, 큰스님의 명패, 각자의 명패, 붓다의 명패등과 같은 온갖 허울 말입니다.

수행자들은 그런 것들에 손사래를 치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그것에 취해 우쭐하는 마음이 겹쳐져 있습니다.

 

사실 이 없는 것처럼 꾸미는 만큼 큰 건 없습니다.

그래서 붓다 흉내를 내는 것보다 큰 분별은 없고

이래서 사이비나 마군이 소리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요컨대 붓다가 된다고 분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분별은 붓다에게 꼭 필요한 도구입니다.

 

따라서 분별을 없애야 할 적으로 삼지 말고

분별을 관찰해 그것과 벗이 되어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