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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상식 세계사] 니카라과 10분 완벽정리

Buddhastudy 2022. 3. 17. 18:34

 

 

1. 소개

 

니카라과로 알려진 국가의 정식 명칭은

Republic of Nicaragua, 니카라과 공화국입니다.

 

국명은 니카라과 호수 주변에 살던

인디안 부족의 주장 니카라과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니카라과 국기의 바탕은

파란색과 흰색이 가로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하양은 국토와 조국의 순수성을 나타내고

파란 부분은 니카라과가 태평양과 카리브해, 두 개의 태양에 둘러싸여 있음을 나타냅니다.

국기의 중앙에는 니카라과의 국가 문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삼각형 속의 무지개와 산들이 나란히 있는 형태로

이 산들은 중미 5개국을 대표하는 5개의 화산을 상징합니다.

산 위의 빨간 모양은 모자이며

이 빨간 모자는 중앙아메리카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음을 의미하는 자유의 모자입니다.

삼각형 주변의 윗부분은 니카라과 국명이 쓰여있으며

아랫부분은 중미라는 의미의 아메리카 센트럴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삼각형은 동일성을, 무지개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니카라과는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하며 수도는 마나과입니다.

니카라과의 북쪽으로는 온두라스

남쪽으로는 코스타 리카와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국토 면적은 약 130,000km2로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국가이며

대한민국의 면적 약 100,000km2 보다 좀 더 큰 편입니다.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약 6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는 부산과 대구를 합친 인구수와 비슷합니다.

 

니카라과의 1년 총 GDP2017년 기준 약 138억 달러

이는 세계 118위로

비슷한 수준의 국가로는 가오와 모리셔스를 꼽을 수 있습니다.

 

니카라과의 인종 구성은 메스티소인이 70%

백인 20% 그 외 흑인와 인디언들이 있습니다.

종교는 가톨릭교가 85%이며 개신교가 15%, 공용어는 스페인어입니다.

 

 

2. 역사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기 이전 니카라과인은 니키라오족, 초로테가족, 위스키토족 등 아메리카 원주민 동족 집단이 살고 있었습니다.

 

1502년 콜럼버스가 처음으로 니카라과의 동해안을 발견하였고

이 지역을 스페인의 영토로 삼았습니다.

 

이후 스페인은 원주민에 대한 착취와 탄압, 가톨릭 교회의 무자비한 종교정책 등을 자행하며 혹독한 식민 통치를 했습니다.

게다가 스페인인들의 이주를 통해

천연두와 같은 낯선 전염병이 중남미에 퍼지기 시작하자

면역이 약했던 원주민의 인구가 급감했습니다.

 

열악한 환경을 견디다 못한 니카라과 원주민들은 독립운동을 펼쳤고

1821년 니카라과는 다른 중립국가들과 함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잠시 멕시코의 일부였다가

다음에는 중미 연합의 일부

그리고 마침내 1838년 완전한 독립을 성취했습니다.

 

독립 후 니카라과는 북부 레온중심의 자유주의자와

남부 그라나다 보수주의자 간의 정치적 투쟁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했습니다.

 

양 진영 간의 팽팽한 내전이 계속 이어지던 상황에서

1855년에는 자유주의자들이 불러들인 미국인 용병 윌리엄 워커가

대통령을 자처하는 등 헤프닝도 있었습니다.

 

미국은 니카라과 지역에 자국의 영향력을 보장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친 무력 개입을 자행하였으며

1912년부터 1933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총 19년간

미국 해병대를 니카라과에 주둔시켜 간섭하였습니다.

 

이에 저항한 니카라과의 게릴라 세력은

장군 산디노를 중심으로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산디노는 1934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베시아에 의해 죽습니다.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베시아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1979년까지 약 40년간 족벌독재정치를 실시하였습니다.

 

하지만 1961년 산디노의 전통을 계승하여 결성된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이

소모사 독재 체제에 대한 무장 저항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은 쿠바의 지원하에 게릴라 활동을 벌였고

1979년 수도를 점령한 후 국가재건위원회를 구성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FSLN의 주도 아래 니카라과 혁명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고

이렇게 세워진 혁명 정부는

정치적으로는 다원주의적 경쟁을 허용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혼합 경제체제를 채택하였습니다.

 

하지만 쿠바의 지원을 받은 좌익 정권이 들어서면서 니카라과와 미국의 사이는 크게 나빠졌습니다.

미국은 지속적으로 니카라과 혁명 정부의 안정화 정책을 저지하는 간섭을 자행했습니다.

 

혁명 정부는 미국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10년간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원조를 받았고

소련과 쿠바와도 연대를 강화해 왔습니다.

 

하지만 10년에 이르는 전쟁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니카라과 국민들은 산디니스타 혁명정부에 대한 지지를 상당수 철회하고

이 결과 미국이 지지하는 우파 세력 중심의 참호로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3. 정치 & 경제

니카라과는 대통령 중심제로 대통령이 국가 원수및 정부 수반을 겸합니다.

내각은 여러 개 부처로 구성되며

대통령은 직접 보통 선거로 선출하며 임기는 5년입니다.

 

니카라과는 단원제 의원을 채택하고 있으며 의원은 92명입니다.

1990년에 출시된 대선에서 보수 세력인 참호로 정권이 출범했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니카라과의 정치에서는 연이어 부정부패 스캔들이 터지고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등 계속해서 불안정한 편이었습니다.

 

2006년 대선에서 산디니스타남부부였던 다니엘 오르테가가

16년 만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르테가 정권은 국가의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방만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쳤고

대통령 연임이 불가능한 헌법을 개정하며 장기 집권을 도모했습니다.

 

심지어 201611월 대선에서는 부인 무리요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등

권력에 대한 집착이 국민들의 격렬한 반발심을 불러일으켜 정치적 위기를 자초했습니다.

 

니카라과는 1인당 GDP가 약 2,000달러 수준으로 매우 가난한 나라이며

소득 불균형 또한 심한 편입니다.

전 국민의 약 50%가 빈곤층이며, 불안정 고용인구 역시 45% 이상입니다.

 

농업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농업 국가이며

공업은 식품가공업과 섬유공업이 있지만, 산업화의 수준은 낮은 편입니다.

 

서부 지역의 농지에서는 커피와 사탕수수, 옥수수 등이 생산되고

저지대에서는 주로 면화와 쌀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동부 해안지대에서는 대규모 바나나 농원이 있기는 하지만

넓은 국토 면적에 비하면 토지 이용률은 극히 낮은 편에 속합니다.

 

게다가 전력의 70%를 화력 발전에 의존하고 있어

심각한 전력난을 겪는 상황이 지속되어 경제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니카라과 정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2014년 말 '니카라과 운하' 공사에 착공했습니다.

 

기존 파마나 운하의 한계가 점차 나타나는 상황에서

니카라과 운하가 개통되면

미국 동부와 서부를 잇는 뱃길이 800km 단축되는 효과를 올릴 수 있습니다.

 

니카라과 정부는 홍콩의 니카라과 운하 개발 회사와 공유하여 공사에 착수했고

2019년 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니카라과 운하가 완공되면 중남미에서 아이티에 이어 두 번째로 가난한 니카라과에서 막대한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나

현재까지도 니카라과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와 환경 파괴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4. 자연환경 & 문화

니카라과는 중미에서 가장 큰 나라로

환태평양 지진대에 위치하고 있어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입니다.

 

니카라과는 크게 고도에 따라 태평양 저지대와 북쪽의 산업 지역

모스키토 연안의 카리브 저지대로 나눌 수 있는데요.

비옥한 태평양 저지대에는 약 40여 개의 화산이 있으며

중미에서 가장 큰 호수라고 하는 라구오데 니카라가 있습니다.

 

기후는 무덥지만 공기는 상쾌한 편입니다.

카리브해 저지대는 덥고 습한데다 강수량이 많은 열대 우림 지역으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대신

넓은 대지에 바나나 대농원이 많다고 합니다.

 

중앙과 북부 산업 지역은 기온이 가장 서늘한 지역으로

연평균 기온이 15도에서 26도 사이로 매우 쾌적한 편입니다.

다양한 야생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고 목축과 광산 지대가 있습니다.

 

니카라과는 다른 어떤 중립 국가들 보다 많은 문학 작품을 배출한 국가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가 가장 사랑받는 예술이라고 하는데요.

니카라과 출신의 시인은 루벤 다리오는

중남미 문학의 왕자, 모더니즘의 기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벤 다리오는 중남미 최초의 혁신적 문학 운동인 '루데르니 수모'를 유도하였으며

중남미 문학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니카라과는 2004년부터 매년 그라나다 국제 시 페스티벌을 개최해

세계 각국과 문학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또한 니카라과 사람들은 야구를 매우 즐기며

국가 스포츠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인구 600만이 안 되는 나라에 야구팀만 약 4,500개가 넘고

야구 선수로 등록한 사람들만 7만 명에 가깝다고 할 정도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1968년에 자국 리그를 창설하였고

1972년에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등

국제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때부터 니카라과 출신의 야구 선수들이

미국 프로 야구 메이저리그에서도 활발하게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니카라과 출신의 가장 유명한 야구 선수로는 데니슨, 마르티네즈가 있습니다.

 

 

5. 인물

니카라과에서 유명한 인물로는

전직 모델과 여배우이며 사회 인권 운동가인 비앙카 재거가 있습니다.

재거는 현재 유럽의 친선 대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비앙카 재거 인권 재단'의 창립자이자 회장입니다.

 

비앙카는 1945년 니카라과 마누아에서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녀가 10살 때 부모님은 이혼하여 어머니 혼자서 3명의 아이들을 키우게 됩니다.

 

비앙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도 장학금을 받으며 프랑스 정치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또한 인도를 장기간 여행하며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과 동양철학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197025세 때 프랑스에서 열린 롤링스톤즈 콘서트 파티에서

70년대 아이콘이자 전설적인 락그룹 롤링스톤즈의 리더 닉 재거를 만나게 되고

다음 해 닉 재거와의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결혼식 당시에 입은 화이트 웨딩드레스는

프랑스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입센로랑이 디자인한 옷으로

블라우스 없이 재킷과 스커트로만 구성되어 당시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지금까지도 베스트 웨딩드레스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아 닉 재거와 이혼하였고

당시 그녀의 고향인 니카라과에서는 1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지진이 덮쳤습니다.

 

비앙카 재거는 국제 적십자 대표단과 함께 니카라과에 방문했고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독재 정권의 야망과 억압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비앙카는 사회 인권 운동가가 되어

추후에는 비앙카 재건 인권 재단을 설립하게 됩니다.

 

현재까지도 비앙카 재건 재단에서는

여성들이 기본 인권을 박탈당한 국가들에 대해 고발하며

여성이 열등하다는 인식을 영속시키는 문화 및 사회적 규범에 대해

개선될 수 있도록 많은 캠페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