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진리는 마음 안에 있다?! 정말 그럴까?

Buddhastudy 2022. 4. 27. 19:20

 

 

수행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마음 밖에서 깨달음을 구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마음밖에는 진리가 없다는 얘기인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과학의 급속한 발달은

인류의 문명을 수직으로 상승시켰고, 그만큼 지식도 풍부해졌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은 미미합니다.

과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우주의 1% 정도에 해당하는 정보를 겨우 알아냈다고 하니까요.

 

오늘날 인류의 지식이 이 정도라면 과거에는 어땠을까요?

상황이 이러니 마음 밖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과학이 수억 년은 더 진보해 우주의 절반 이상을 밝혀낼 때쯤에야

마음 밖에서 깨달음을 구해도 된다는 말이 나올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인류가 지닌 지식의 한계에 의해 깨달음은

마음 안에서 찾는 쪽으로 정해졌습니다.

여기서 일체유심조가 자연스럽게 나오면서 수행의 지남차가 되었고요.

 

 

그렇다면 정말로 깨달음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맞을까요?

 

우리는 이 시점에 마음의 안과 밖을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사실상 마음뿐입니다.

마음 밖으로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마음의 안과 밖이라는 구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수행자들이 말하는 마음 밖이란 외부(대상)에서 들어오는 정보들로 한정됩니다.

그리고 마음 안이란 그런 정보들을 처리하는 사유작용을 가리키고요.

그렇더라도 외계의 정보와 그것을 처리하는 사유작용에 어떤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집단의식과 생명과학에서 말하는 거울뉴런을 고려하면

더더욱 마음의 안과 밖이 모호해집니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존재란 거대한 유기체적 정보 덩어리이고

이 가운데 극히 일부가 폐쇄되면서 라는 관념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의 마음이란 것도

일종의 정보 현상일 따름이고

그렇기에 마음의 안팎을 나눌 이유가 없게 됩니다.

 

물론 세상만사 생각하기 나름이니

억지로라도 마음의 안과 밖을 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 안에서 외부 정보를 처리하는 사유작용에 초점을 둘 수도 있고요.

 

이렇게 되면 수행의 방향이 주관적 체험에 쏠리면서

생각이 정지된 삼매와 생각이 정화된 열반

그리고 생각에서 자유로워진 해탈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인식하는 순수의식이 부각하면서

참나(불성)’가 중심소재로 자리 잡게 됩니다.

깨달음의 전체 지도가 근사하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마음 안에서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현상들은

깨달음에 얼마나 근접해 있을까요?

 

가령 어떤 수행자가 생각이 끊어지며 마음이 텅 비게 되었다고 칩시다.

그랬더니 란 것이 없어지고 어떤 알아차림(순수의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곳엔 생로병사가 없어 영원하고, 에고(ego)가 없어 청정하며

모든 것이 가 아닌 게 없어 무한합니다.

 

이때 , 내가 바로 알파와 오메가였구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이며 내가 존재 그 자체였구나!”라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생각이 다시 일어나며 현재의 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선정에서 경험한 것을 끄집어내어

내가 붓다였구나!”를 되새기며 진한 감동에 젖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체험이 도대체 뭐가 어떻다는 건가요?

명상을 하다 뇌파가 떨어지면 평소에 갈구했던 것들이 꿈처럼 그려지게 됩니다.

일종의 유사몽이며, 여기서 그려지는 초월적 현상들은

그냥 신기루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런 체험을 백날 해봐야 진리에 대한 자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체험으로 깨달았다는 수행자들의 영력은 변한 것이 없고

오히려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됐다는 아상으로 인해

볼썽사나운 모습만 보이게 됩니다..

절밥 20년에 괴물이 된다는 얘기가 이래서 나오는 것이고요

 

아무튼 체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란

뇌에서 상상으로 꾸며낸 것들로

뇌가 멈추면 모조리 포맷될 환영입니다.

 

물론 수행자들은

육신과 관계없이 참나는 영원하다고 말하지만

그 참나가 영원한 이유를 증명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수행자들은

체험해 보면 안다고 반론하지만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어보면 안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체험이 논리로써 증명되지 않으면

그것은 일종의 신앙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수행의 체험이란 것은

모조리 쓸모없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진리적 자각을 화두로 삼았다면

선정에서 얻어지는 체험들은 화두를 푸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방향만 뚜렷하면 그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은

죄다 수행의 추진력이 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하는 체험들입니다.

방향이 올바르지 않으니 체험에 빠지면서 온갖 병폐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진리적 자각이라는 명확한 기준이 세워져

온갖 현상들에 흔들리지 않는다면 체험의 함정을 경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튼 당신의 이성을 작동하는 데에 마음의 안팎은 따로 없습니다.

진리는 당신의 이성 속에 흠뻑 스며있으니까요.

 

따라서 당신은 진리를 알고 싶은 마음을 내면 됩니다.

그 마음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면

당신의 수행은 체험에 구애받지 않고

분명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