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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22 : 동부의 맹장, 공손찬

Buddhastudy 2024. 1. 18. 19:45

 

 

유비와 함께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공손찬은

평소 전장에서 주로 뛰어난 궁수 수십 기를 데리고 다녔는데

모두 백마를 이끌고 다녀

백마장사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공손찬의 집안은 대대로 태수급 고관의 가문이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적자가 아닌 서자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출신 때문에, 성인이 되면서도

고위 관직으로서 진급하는 기회가 없었고

공손찬은 문하서좌라는 말단 관리 자리를 맡았습니다.

 

문하서좌는 공문서를 정리하는 관리로

비서역의 말단 자리였지만

그는 자신이 맡은 말단 자리에 대한 불만보다

최선을 다해, 다른 이들보다 탁월한 정리 능력을 보였습니다.

 

각 부처마다 견해가 종합적으로 여러 차례 쏟아지는 만큼

넓고 포괄적인 사무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는데

공손찬의 손을 거치면, 짧게 정리되면서도

논리정연한 결과물로 효율적인 일 처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잘생긴 외모에 키도 크며

상대방에게 말을 전달하는 목소리 또한 또렷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공손찬은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요서태수인 후태수(侯太守)

특히, 공손찬을 마음에 들어 하여

자신의 딸인 후씨를 시집보내, 공손찬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하급관리로 지내오던 공손찬은 이때부터

후태수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대학자인 노식의 문하로 들어가, 유비를 만났습니다.

 

공손찬은 학업을 마친 후에는 일사천리로 진급하여

수도 낙양으로 가서 군의 군사, 정치, 법률 등

정책 현안을 종합해 보고하는 관직인 군의 계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앙 정부에서의 경력을 쌓아가던 도중

장인의 후임이었던 유기가 비리에 연좌되면서

유기가 낙양으로 소환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공손찬은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서자 출신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가까운 사람들의 은혜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렵사리 얻은 벼슬자리를 버리고

병졸로 사칭하여 유기의 호위를 수행했습니다.

유기에 대한 처벌 결정은 일남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는데

일남의 위치는 현대 사회 베트남 중부 지역이었습니다.

일남은 당시 교통 기준으로는 수도와 거리가 너무 먼 탓에

살아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공손찬은 유기의 수발을 들어주기 위해

일남으로 향하는 귀양길에 같이 따라나섰고

낙양 북쪽에 있는 북망산에 들러 조상에 대한 제사와

앞으로 돌아오지 못할 자신의 장례식도 함께 치렀습니다.

 

하지만, 유 태수는 유배를 가던 도중, 사면이 이루어졌고

귀양길을 따라나선 공손찬도 돌아오게 되면서

군 내에서는 그의 의리와 충성심으로 명성이 높아졌습니다.

이윽고, 효렴으로 추천된 후, 요동 속국 장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장사는 군사적 요충지인 의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직책으로

군 단위에 속하는 요동 속국의 인구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관할 구역에는 오환족과 선비족이 살고 있어

한나라에서는 변경을 안정시키기 위한 군사 조직을 설치했습니다.

 

공손찬은 부임 후, 자주 다수의 기병을 데리고 직접 요새 밖을 순찰하며

한족이 사는 거주 구역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주요 병력이 성을 지키는 데 반해

정찰병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항상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었습니다.

 

하루는 성 밖으로 순찰을 나갔다가 갑자기 10배에 해당하는

수백기의 선비족 오환 기병들과 맞닥뜨렸습니다.

전투력이 강한 선비족을 상대로 소수의 병력으로 맞설 수 없었기에

공손찬은 휘하 병사들을 이끌고 비어있는 관소로 몸을 피했습니다.

 

선비족은 큰 희생을 치르지 않고

소수의 한족 병사들로부터 돈과 말 등을 약탈하기 위해

정찰병들이 몇 일 동안 굶으면 알아서 힘이 빠지길 기다렸습니다.

지친 병사들을 상대로 손쉽게 목숨을 앗을 준비를 하는

선비족의 생각을 알아차린 공손찬은 병사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선비족과의 조우에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오늘 중으로 이 포위망을 뚫지 못하면

우린 모두 그야말로 전멸이다.

내가 먼저 돌파를 시도할 테니, 모두들 내 뒤를 따르라

라며 그의 각오를 보였습니다.

 

병사들은 모두 공손찬을 따르겠다는 결의를 보였고

공손찬은 앞장서서 창검을 잡고 말을 몰아나가

적진을 향해 돌파해 나갔습니다.

선비족 기병들은 갑자기 뛰쳐나온 공손찬 부대의 돌격에 적잖게 당황하며

포위망의 한쪽이 급격하게 무너졌고

제일 앞에서 몸소 수십 명을 베어낸 공손찬은

오환병사들이 계속해서 주변을 에워싸도 이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렇게, 소수의 병사들이 탈출하는 과정에서

공손찬의 일행들도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장이 직접 나서

절반 이상의 병사들을 살렸다는 소문은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공손찬이라는 이름은 선비족에게 깊이 각인시키게 되었고

이후, 선비족들은 공손찬이 부임하는 동안

그의 무용을 두려워하여

한나라의 요새를 노리는 움직임이 크게 줄었습니다.

이후, 공손찬은 변방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탁현(琢縣) 현령으로 승진하였는데

탁현에는 공손찬과 인연이 깊었던 유비가 짚신 장사를 그만두고

관우, 장비를 포함한 유협들과 어울리며 백수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 때의 유비는 아직 이렇다 할 기반이 없는

20대 중반의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

원소나 조조처럼 명문가문의 자제도 아니었고

손견처럼 신흥 호족 가문도 아니었기 때문에

황실의 핏줄이라는 것 외에는 홀어머니 손에서 자란 환경이었습니다.

 

유비는 전공을 세워 입신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사병으로 의병 모집에 지원하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혹은 스승이었던 북중장랑장 노식의 휘하로 들어가

전투에 참여하고 싶기도 했지만

노식은 황건적의 난 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죄로 해임되었습니다.

 

 

 

공손찬이 요동에서의 명성을 얻고 탁현 현령으로 부임하자

유비 또한 공손찬과의 형님 동생으로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 힘 좀 꽤나 쓰는 호걸, 건달들이 모여들고

거상인 장세평과 소쌍은 유비를 재정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청년 시절의 유비는 탁현의 소년배들을 이끌었는데

황실의 후손이라는 핏줄 덕분에

자신의 세력을 모으는데 있어

다른 이들보다 명분에서 경쟁력을 갖추기에 용이했습니다.

 

거상 장세평과 소쌍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의 의기와 인품에 반하여

자신들이 평생 모아온 말과 물자를 지원해 주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문에 밝은 상인이

사람 됨됨이를 보고 물품을 지원한다는 일은

현실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보다는 당시,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워져

장사하는 입장에서 갑작스럽게 판로가 막힌 상황이라

악성 재고가 된 말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식비를 소모하느니

자신들을 비호해 줄 곳에 투자한 것이라 추측되기도 합니다.

 

유비는 이렇듯 타고난 재정적 배경은 유리하진 않았지만

스스로 자신의 장점을 내세워, 사람들을 모으며

상인들과도 가까운 교류를 통해, 물자를 모아나갔습니다.

그리고, 매관매직이 성행했던 후한 시대 때도 관직을 사지 않고

공손찬에게 후원하거나 자신의 사람들을 돌보는 데 활용했습니다.

 

187, 서량에서 한수가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을 무렵

당시 토벌의 책임을 맡고 있던 장온은

다른 지역에서 추가적으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유주군의 주력이었던 오환족 출신 돌격기병대를 찾았습니다.

 

오환족의 무리들은 저마다 한족에 대하는 태도가 달랐는데

한나라 관군들에게 협조하는 부대도 있었고

반대로 한나라 정부에 위협적인 존재들도 있었습니다.

 

장온은 유명한 오환 돌격기병대를 소집했고

병력이동을 지휘할 행군 감독으로

최근 유주에서 용맹을 떨치는 탁현령 공손찬을 지목했습니다.

하지만, 공손찬이 명을 받고서

이내 오환 돌격기병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이유로는 평소 한나라 조정에서

오환 기병대에 약속한 군자를 제대로 지급하지도 않으며

군량과 포상금 등도 지급이 원활하지 않아

기병대의 일부는 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아울러, 오환 기병대를 비롯한 실병 지휘대를 이끌었던 장순이라는 자가

장온의 토벌군에 참여하고 싶어 했는데

장온이 공손찬에게 일을 맡기자, 불만이 터졌습니다.

 

187, 장순은 고향 친구인 장거를 찾아가

요즘 요서의 분위기가 오환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고

조정에서는 서량의 도적들을 막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한나라가 그 명을 다 하는 것이라며

오환족을 이끌고 구력거를 찾아가자고 설득했습니다.

 

장거와 장순은 오환족 세력들을 선동해

공동으로 연맹을 구성한 다음

반란을 일으켜 성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장순은 스스로를 안정왕(安定王)이라 참칭하고

관리와 백성들을 약탈하며 성들을 공략해 나갔습니다.

 

이들은 우북평태수 유정, 요동태수 양종, 호오완교위 공기조 등을 죽였으며

오환의 구력거 등과 함께 10만의 병력으로

청주, 서주, 유주, 기주 등을 침공하며

관리와 백성들을 학살하며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한나라 서북쪽 서량에서 양주의 난이 한창일 때

하북 지방에서는 장거 장순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공손찬은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차례차례 지역의 반란을 진압해 나갔습니다.

 

조정에서는 해당 지역에 조서를 내려

병력을 동원하는데 열을 올렸고

평원 현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유자평은

평소에 친분이 있던 젊은 청년, 유비를 불러냈습니다.

 

 

오늘은 삼국지 22번째 시간으로

동부의 맹장 공손찬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