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정토회)

즉문즉설_법륜스님***제18편 어린 아들을 잃었는데...

Buddhastudy 2011. 8. 17. 17:50

  방송 보기: 정토TV

직장 생활하다가 이번에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에서는 저한테 딸이 하나 있었고 아들이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아들을 이번에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10년을 채 못 살고 갔는데 장애인이었습니다. 스님께서 일전에 법문하신 내용 중에 포승줄에 묶어있던 그 상에서 다리도 묶여있고 말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대화는 눈으로만 했습니다. 할 수 있는 단어는 아빠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치료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돈을 더 벌어가지고 애를 나중에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좀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 목적도 없어져버렸고 지금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 하고 또 애가 살아 있을 때 그 고통을 더 덜어주지 못했던 것, 한 번씩 되게 보채서 힘을 주고 한다고.. 나중에 목욕을 시키려고 하니까 온 가슴이 벌레에 물려가지고. 이런 것들이 죄책감으로 밀려오고. 지금 당장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것, 지금은 잘 있다고 하는 그런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고 싶은 그런 안타까움.

또 장사를 하면서 웃어야 된다는 것, 또 제 부모님도 계시고 장인 장모님 다 계시기 때문에 그 앞에서 감정표현도 자제해야 된다는 것, 나머지 또 아이들 앞에서도 감정표현도 자제해야 된다는 것. 이런 것들이 갈수록 상황은 조금 나아지고 있습니다만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이런 상황들이 좀 갑갑해서..(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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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는 거 보다 그러니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거 보다는 요, 옷을 갈아입는 게 나은 것처럼 몸을 바꾸는 게 훨씬 좋은 거요. 그런데 이게 잘된 줄을 알으셔야 된다.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얼마나 이제 자유로워졌느냐? 그 고통도 사라졌고. 그 속박도 사라졌고. 자유의 몸이 된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기도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다시 몸을 받을 때는 이제 건강한 몸을 받아라.’ 이렇게 기도를 해야 된다. ‘건강한 몸으로 다시 받아라.’

그러면 건강한 몸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아이가 건강한 몸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뭘 해야 되겠느냐? 이 살생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살생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첫째 방생을 해야 된다. 방생을 많이 해야 된다. 방생을 많이 해야 된다는 것은 우선 굶어 죽는 아이들. 병들어서 죽는 아이들, 이런 사람을 살리는데 다만 얼마씩이라도 끊임없이 보시를 해서 우선 방생을 해야 되. 물고기 방생하는 것도 당연히 해야 되고. 어디든지 죽어가는 생명을 늘 살려주는 그런 방생을 해야 된다.

두 번째 병고, 이 살생의 업보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가 단명보고, 두 번째가 병보고, 세 번째가 좋은 일하고 늘 구슬을 듣는 과보가 따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첫 번째 이 이걸 벗어나려면 첫째 살생의 업보의 첫 번째 단명보를 벗어나려면 방생을 해야 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됩니다. 두 번째 병고의 업보를 벗으려면, 앞으로 다음에 병고의 업보를 벗으려면 이 아픈 사람을 늘 돌보는 일을 해야 된다. 세 번째 이 구슬의 업보를 들으려면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하소연을 들어주고 늘 그편이 돼야 된다.

이런 세 가지 기도를 하셔야 된다. 이런 세 가지 기도를 할 때 그 아이에게 지금 돌보던 것보다 수백 수천 배로 더 실제로 도와주는 게 된다. 지금 울고, 지금 괴로워한다해서 그 아이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이거야. 나를 괴롭힐 뿐이지. 그 아이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게 뭘까? 그것은 이렇게 세 가지 길로 기도를 하시고 행을 하시면 그것이 바로 아이들에게 아이에게 가장 좋은 보탬이 되는 일이다.

제가 볼 때는 아이가 살아있을 때 결국 아이가 살아있다 죽었다는 거는 아이를 뭐로 보는 거예요? 육신으로 보는 거 아니오. 그죠? 육신이 참 내가 아니다는 걸아시면 아이가 죽었다. 이런 생각을 벗어 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생사가 없다 그러잖아. 나고 죽음이 없다. 우리가 난다느니 죽는다는 거는 몸뚱이의 상을 가지고 말하는 거란 말이오. 그걸 떠난다면 나느니 죽느니 하는 것들은 벗어 날 수가 있습니다.

법당에서 엎드려서 절을 하면 감정촉발이 됩니다. 본인이 보기에는 잘못된 거 같지만 스님이 볼 땐 잘된 겁니다. 잘됐다고 생각할 때는 따로 감정이란 게 없어요. 그러니까 그런 감정이 쌓여있다면 그것은 절에 가서 아까 그 세 가지 ‘부처님 관세음 보살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제가 제 본연의 과보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알고 보니 살생의 인연이 있었군요. 그러니 이 살생의 인연을 깊이 참회합니다. 방생하겠습니다. 병든 이를 구제하고 보시를 행하겠습니다. 억울하고 분한사람을 늘 보살피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시면 좋아지세요. 집안 가족에게 감정표현을 어떻게 하시고 싶어요? 울고 싶다 이 말이오? 뭐 그런 건 숨길 필요가 없어요. 그냥 눈이 벌겋게 해서 나가시면 되지. 아 눈이 왜 벌거냐? 아들 생각해서 좀 울었습니다. 웃으면서 얘기하면 되지. 그것을 자꾸 그냥 억제를 하게 되면요, 병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타인을 해치는 게 아니냐? 상관없어요. 솔직하게 살아야 되요. 인생은.

슬프면 슬픈 데로 얘기를 하고 이렇게 살아야지. 그걸 자꾸 억누르게 되면 이제 가슴에 큰 병이 되죠. 그리고 사업을 할 희망이 없어졌다 그러는데 지금 이 세 가지 일을 하려면 오히려 더 희망이 있죠. 제가 세 가지 뭐하라는 건 기억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