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정목스님_유나방송

정목스님_나무아래 앉아서 제19회

Buddhastudy 2014. 11. 30. 20:44

"> 출처: 불교TV

 

 

마하비라는

벌거벗은 맨몸으로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 다녔다.

 

신발도 옷도 없었다.

 

그러나 때로

그렇게 맨몸으로

떠돌아다니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길가의 가시들은

얼른 뒤로 물러섰다.

 

안녕하세요. 나무아래 앉아서 정목입니다. 인도의 성자인 마하비라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 이야기, 참 인상적이지요? 신발도 없이 걸어 다니는 마하비라의 발을 보호하기 위해서 길가의 가시들이 저절로 물러났다. 이걸 한번 상상해보세요. 마치 영상을 보듯이 말입니다. 가시들이 길가에서 도열해서 엎드려 있다가, 마하비라라는 성자가 한걸음씩 걸어갈 때마다 그의 맨발을 보호하기 위해 가시들이 쫙~ 물러선 그 아름답고 멋진 영화 같은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분의 성자가 밝혀놓은 에너지가 얼마나 자애로운 것인지를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1월 달이 시작되었는가 싶은데, 벌써 이렇게 2주를 달려왔죠? 하루하루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

 

보통 주기와 받기 이러면 기부 앤드 테이크 이런 개념을 가지잖아요. 그런데 이 음악이 담고 있는 기빙 앤 리시빙, 주기와 받기라는 건, 내가 이만큼 줬으니까 너도 그 만큼 내. 이런 개념이 아니고요. 어떤 면에서 누가, 고통을 주더라도 그걸 다 수용하고 받아지겠다. 이런 보살심의 기빙 앤 리시빙이 아닌가. 전 그렇게 생각됩니다. 오늘 첫곡으로 올려드렸습니다.

 

여러분 헬렌켈러 잘 아시죠? 앞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중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누구보다도 사실 가치 있는 생을 살았던 위대한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헬렌켈러가 친한 친구를 만났는데, 마침 그 친구가 숲속을 오랫동안 산책하고 돌아왔데요. 산책하고 돌아오는 친구에게 헬렌켈러가 물은 거예요. “숲속에서 뭘 보았어?” 그랬더니 친구는 그냥 뭐, 심드렁하게 으흠, , 별거 없었어.” 이렇게 대답했데요. 산책을 하는 일이라는 게 그저 뭐, 밥 먹고 일어나면 세수하고 신문보고 이렇게 하듯이 일상적인 일과의 하나라고 생각을 했겠죠.

 

그러다보니까 늘상 가던 그 숲길을 걸어갔지만, 그 친구에게는 별다른 감응이 없었던 거예요. 친구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헬렌켈러는 자신의 책,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 그 이야기를 쓰면서 그때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눈이 멀쩡한 사람들도

실제로는 보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한 시간 동안이나

숲을 거닐면서

눈에 띄는 것을

하나도 보지 못했을까?

 

그런 글을 남깁니다. 정말 의미심장하죠? 실제로 사람들이 멀쩡한 눈을 뜨고 걸어 다니고 있는데, 사물도 보고 사람도 보고 숲도 가고 하는데, 사람들은 뭘 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뭔가 가슴에 콱~ 울림을 주지 않나요?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소망했던 헬렌켈러는 자신이 만약에 대학총장이라면 눈을 사용하는 법이라고 하는 강의를 필수과정으로 개설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눈을 사용하는 법. 그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와~ 우리가 눈은 가지고 있는데 눈을 사용하는 법에 대해서 우리가 별로 깊이 있게 생각 안하고 살잖아요.

 

지금 여러분께서 TV를 통해 보고 계시는 이 화면, 이 화면 하나를 보기 위해 지금 이 스튜디오 안에는 여러 명의 촬영감독들, 그리고 여러 개의 기계. 카메라의 눈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화면을 오른쪽 왼쪽 앞뒤를 비추고 있어요. 이 공간 안에 여러 눈이 비추는 그 화면을 여러분은 또 TV를 통해서 보고 있는 거죠. 하지만 같은 TV화면을 보면서도 똑같은 장면을 똑같이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여러분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누구에게는 저만 보일 거고, 또 어떤 분에게는 저 등이 보일 거고, 어떤 분에게는 저 뒤의 배경화면이 더 관심이 있게 보일 수도 있죠.

 

올해는 우리가 모두 마음의 눈을 뜨고

나 자신의 구석구석을

조명하고 비추어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구요,

 

여러분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들의 마음 또한 조명을 비추듯이 구석구석 비추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건 아니란 말씀이지요. 깊은 관심이고 관심은 곧 사랑 아니겠습니까?

 

..

 

어릴 때 부르던 동요 중에서 혹시 숲속 작은집 창가라고 하는 노래, 기억나시는지요? 이게 40대 후반 되시는 분들은 생각 나실텐데요, 우리 어릴 때 이렇게 불렀거든요? “숲속 작은집 창가에 노루가 한 마리 있는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와 문 드리면 하는 말이렇게 율동을 하면서 불렀던 노래가 생각이 나요. 저는 그게 그냥 우리나라의 노래인 줄 알았죠. 크면서 독일의 작가인 뉴타바오의 그림책을 노래로 만든 것이다. 하는 걸 알게 되었어요.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오늘은 바랑속의 책 한권, 제가 쓴 신간서적 비울수록 가득하네.’에서 숲속 작은집 창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사랑이 가득한 이야기입니다. 들어보시죠.

 

어릴 때 부르던 동요 중에서

숲속 작은 집 창가에란 곡을

기억하나요?

 

이 곡은 독일 작가인

뉴타바오의 그림책을 노래로 만든 것이라 해요.

 

숲속 작은 집에 노루가 살고 있었어요.

어느 겨울 날,

노루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마침 토끼 한 마리가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었죠.

 

따뜻하고 안전한 집안에서

그 모습을 보던 노루는 토끼를 염려합니다.

 

그때 마침 토끼가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말하지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사냥꾼이 절 쏘려고 해요.”

노루는 문을 열어 토끼를 반갑게 맞으며 손을 잡아줍니다.

 

토끼야, 어서 들어와. 이곳에서 편히 쉬렴.”

그런데 이번엔 토끼보다 조금 사나운 여우가 사냥꾼에게 쫒기고 있었어요.

 

여우도 노루의 집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죠.

똑같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말입니다.

 

노루는 여우가 무서워서 조금 망설이지만,

이내 문을 열어주며

여우의 손을 잡아줍니다.

 

토끼에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말이죠.

여우야, 어서 들어와. 이곳에서 편히 쉬렴.

 

한번 상상해 보세요.

모두 사냥꾼에게 쫓기는 신세라 급히 노루의 집안으로 들어왔지만

토끼와 여우, 그리고 집주인 노루까지

한 공간에 있는 것이 결코 편하지는 않죠.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몸을 녹이며

한숨 돌리던 3마리 동물은

때마침 들려오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랍니다.

 

...

빠끔히 밖을 내다보니

문밖에 무시무시한 사냥꾼이 떡 하니 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사냥꾼은 벌벌 떨면서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절 좀 살려주세요.”하며 간절하게 애원했어요.

 

알고 보니 토끼와 여우를 모두 놓치고

매서운 눈밭을 헤매던 사냥꾼은

완전히 지쳐서 숲속 한가운데서 얼어 죽을 신세가 된 거에요.

 

과연 노루가 어떻게 했을까요?

문을 열어줄까요?

사냥꾼이 숲속에서 얼어 죽도록 내버려 둘까요?

놀랍게도 그림책 속 동물들은

이 무시무시한 사냥꾼에게 문을 열어줍니다.

 

어서 들어와요. 하면서.

동물들 모두 나와 사냥꾼의 손을 잡아줍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생각하면 가슴이 참 따뜻해집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죽이려 총을 들고 쫓아온 사냥꾼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기운을 차리고 난 뒤

또 언제 자기들을 헤칠지 모르는데도,

숲속 동물들은 어떻게 사냥꾼을 받아들 수 있을까요?

 

그건 아마도 그 순간,

숲속 동물들이 사냥꾼을

자신을 죽이려하는 무서운 인간이 아니라,

추위에 떨며 목숨을 구하고 싶어 하는

가련한 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모든 존재는 그렇게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비록 사냥꾼이 무서운 총을 들고 다니며

자신들을 잡으려하는 사람이지만,

그 또한 자신들처럼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하나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동물들은 연민의 마음을 일으킨 것이지요.

 

다른 모습을 하고

다른 역할을 하며

다른 행동을 하고 있을지라도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행복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면 우리는 모든 존재를

그저 존재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뜻 보기에는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에 따라

냉정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라보면

식물이나 동물, 사람들 모두

서로가 서로의 삶에 기여하면서

의지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고,

행복을 원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 존재를 향한 연민의 마음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지요.

 

..

 

벌써 발원문 올릴 시간이네요. 오늘 아름다운 소원 공양 올리겠습니다.

 

<내 마음의 성소 - 발원문>

이 세상에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있는 한

그들의 질병이 모두 치유될 때 까지

제가 의사가 되고 간호사가 되고 약이 되게 하소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굶주림과 갈증이 사라지고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할 때에는

제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되게 하소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제가 무진장한 보물이 되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어 항상 그들 곁에 있게 하소서.

보호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제가 보호자가 되고

길 떠나는 이들을 위해 안내자가 되며

물을 건너려고 하는 이들을 위해

배가 되고 뗏목이 되고 다리가 되게 하소서.

육지를 찾는 이들을 위해 제가 섬이 되고

빛을 찾는 이들을 위해 제가 등불이 되며

쉼터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쉼터가 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제가 도우미가 되게 하소서.

 

과거의 모든 성인들께서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키시고

수행의 모든 단계를 완수하셨듯이

저도 모든 생명들을 위해

그와 같이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키고

수행의 모든 단계를 완수하겠습니다.

 

이번 한주도 우리 이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저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당신과 내 안의 신성한 빛, 거룩한 불성에 경배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