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5분 시사고전

[쥐픽] 4.19 한 방에 정리

Buddhastudy 2018. 6. 26. 19:16


오늘 419일이지. 어디보자...그럼...! 4.19 58주년이네. 오늘이. 벌써 내가 무슨 말할 지 알 것 같지? 맞아. 오늘은 4.19 혁명에 대해서 정리해 줄 거야.

 

4.19가 뭔지 어렴풋이는 알겠지. 1960년에 시민들이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거잖아. , 근데 사람들이 도대체 왜 들고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디테일이 살짝 아리까리하지? 그러니까 따라 오세요.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그를 둘러 싼 자유당 정권은 주욱 독재를 정치를 펼치고 있었어. 이승만이 1948년에 처음 대통령이 되었으니까 4.19가 나던 해인 1960년 기준으로 벌써 12년째 해먹고 있었던 거야.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을 두 번만 할 수 있게끔 정해놓은 헌법도 지 맘대로 고쳐서 3번 해먹고, 정치적 라이벌도 누명 씌워서 죽이고, 부정선거도 하고... 무리수를 엄청나게 많이 던지고 있었지.

 

그런데 그 시기에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매우 거셌거든. 그냥 고분고분한 백성이 아니었어. 아니 솔직히 신기하지 않냐? 어떻게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은지 얼만 안 된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이 민주주의라는 걸 알았을까?

 

우선 당시는 우리나라에 근대 교육이 막 자리 잡던 시기였기 때문에 교육열이 어마어마했어. 누구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너도나도 학교에 갔지. 이승만 정권도 국력이 높이기 위해서는 학생 엘리트가 많아져야 된다는 논리로 교육에 엄청나게 투자를 했거든.

 

또 당시는 냉전시기라서 북한과의 체제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하던 때였잖아. 그래서 모든 국민들이 반공 교육을 엄청 빡세게 들어야 했는데, 거기에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교육도 포함이 되어 있었거든.

 

생각해봐. 처음으로 학교에 갔는데, 학교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걸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쳐. 그런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랑 현실은 또 너무나도 달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 여기에 불을 지핀 게 바로 언론인들이었지.

 

1950년대 당시에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어. 솔직히 요즘에는 그녀의 숨막히는 S라인 헉, 충격, 이럴 수가!” 이런 자극적인 기사로 먹고사는 기자들도 많지만, 당시에는 기자 한 명 한명이 옛날의 선비처럼, 민조 지사같은 이미지였지.

 

대부분의 언론인들은 이승만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계속 알렸어. 그래서 이승만은 처음에는 언론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언론을 막 탄압했거든.

 

정치깡패를 동원해서 기자들을 줘패거나 신문을 폐간시키려고 하거나 해서 말이야. 아무튼 오래오래 해먹으려고 하는 이승만의 무리수가 심해질수록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더욱 커지고 있었지. 혁명은 필연처럼 다고오고 있었어.

 

그러던 와중에 1960315일 정부통령선거가 열리기로 결정이 되었어. 정부통령선거는 지금의 대선이랑 비슷한 건데 대통령과 지금의 국무총리하고 역할이 비슷한 부통령을 같이 뽑는 선거였지. 그러니까 뭐 대선이라고 보면 돼.

 

, 그런데 4년 전인 1956년의 3대 대선에서는 이승만이 사실상 패배를 했어. 국민들이 하도 지긋지긋해 했거든. 당시 야당의 대통령 후보는 민주당의 신익희, 진보당의 조봉암이 있었고, 부통령 후보로는 자유당의 이기붕과 민주당의 장면이 맞붙었거든.

 

근데 이승만 정권이 온갖 방해 공작을 펴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유세 도중에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선거 결과는 이승만에게 아주 불리하게 나왔어. 진보당의 조봉암 후보가 30%나 득표하고,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선출되는 이변이 벌어지지.

 

이승만의 자존심에 엄청나게 큰 스크래치가 난 거야. 그래서 이승만은 1960년의 대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만 한다고, 그리고 자기 꼬봉인 이기붕을 반드시 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를 갈면서 준비하지.

 

그러던 중에 227일 대구에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장면의 유세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어. 그때가 일요일이었는데 정부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오라고 한 거야. 영화관람이나 토끼사냥 등을 이유로 해서 말이야.

 

졸라 어이없잖아. 투표권도 없는데 유세장에 갈까봐 일요일에도 학교에 나오라고 시켜? 그래서 등교한 학생들이 술렁거리다가 바로 거리로 뛰쳐나가서 시위를 벌였어. 시위는 스케일이 점점 커져서 다음 날인 228일에 절정을 이뤘지.

 

이게 바로 2.28 대구 학생민주의거야. 이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게 되면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지. , 그런데 진짜 결정적인 계기는 선거 당일인 3.15일에 생겨. 그 유명한 3.15부정선거 때문이지!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더 오래 해먹으려고 저지른 무리수의 극한이었어. 우리나라 선거 역사상 가장 길이 남는 흑역사이기도 하고. 온갖 기상천외한 주작질이 동원되었는데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첫 번째, 사전투표!

40% 정도 되는 표를 미리 찍어놓고 투표함에 채워 넣는 거야.

두 번째, 야당 쪽의 참관인을 두들겨 패거나 납치해서 쫓아내버리기.

세 번째, 뇌물 뿌리고 깡패들 동원해서 협박하고 건 너무 당연한 거고.

네 번째, 이건 거의 예토전생인데,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선거인 명부에 올려서 강제로 자유당을 찍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야.

다섯 번째, 어둠을 틈타서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는 올빼미 표.

 

여섯 번째, 왜 그 투표지 보면 엉뚱한 곳에 도장이 찍히면 무효표 처리 되잖아. 그것을 노려서 개표원이 인주를 손에 바른 다음에 피아노를 치듯이 투표용지에 막 묻혀. 이렇게 무효표를 만드는 피아노 표.

 

일곱 번째, 이게 제일 막장인데, 예를 들어 투표지가 이렇게 쌓여 있어. 맨 아랫장과 윗장에 이기붕 표를 놔. 그러면 중간 것들은 들춰보지 않는 이상 안보일거 아니야.

이거 다 이기붕 표야!” 이렇게. 검표사지도 않고 이기붕 표라고 해버리는 샌드위치 개표. 얘네가 너무 열심히 주작질을 쳐서 이기붕의 표가 115%에 달하는 결과가 나와버렸거든.

 

그래서 당황한 자유당이 오히려 또 표를 줄였어. 이승만 80% 이기붕 70% 이렇게. 표를 또 줄여. 졸라 어이없잖아. 이럴 거면 선거를 왜 해? 아니 국민들이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이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겠지?

 

그래서 선거 당일부터 마산에서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려. 그게 마산 의거야. 경찰은 시위대에게 총을 쐈지. 8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당했어. 그런데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줬지 갖고 놀라고 준 게 아니다.” 이러면서 강경진압을 부추겼어. 진짜 개새끼네.

 

, 여기서 안 그래도 불타오르던 시민들의 마음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 생겨. 315일 마산의거 직후에 실종된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 411일 신포동 부둣가에 떠올랐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이었지.

 

김주열 군은 315일 시위에 참여했다가 최루탄에 맞아 숨졌는데, 경찰이 시신을 은폐하려고 바다에 그냥 던져버렸던 거야.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 되자 시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어. 마산을 넘어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지.

 

고등학생들이 먼저, 그리고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서울, 대구, 부산, 마산을 비롯해서 전국적으로 시위를 벌였어. 그리고 419일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그 날이 찾아왔어. 경찰은 또 시위 군중을 향해서 무차별적으로 총을 쐈지. 서울에서만 104명이 희생되었어.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정부는 419일 당일에 계엄령을 선포했어. 근데 당시 계엄군은 경찰과 달리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시민들을 강경하게 진압하지 않았어.

 

당시 일부 시민들은 이미 무장을 하고 경찰과 총격전까지 벌였는데, 밀리고 밀린 시민들이 고려대 교정에 들어가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는 모양새가 되었거든. 근데 이때 계엄군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학교로 밀고 들어가지 않고, 자기 하고 부하 2명만 데리고 캠퍼스로 들어가서 희생자들 앞에 정중하게 조의를 표했어.

 

그 모습을 본 시민들은 모두가 자진해서 무기를 버리고 해산했다고 해. 드라마틱하지? 아무튼 시위가 계속 진행되면서 미국도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고, 국무의원이 총사퇴 하는 등, 이승만은 점점 궁지에 몰렸어.

 

그리고 결정적으로 425일에 대학 교수들이 시위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더 끓어오르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까지 시위에 나서면서 대세는 완전히 시민들 쪽으로 기울었어. 급기야는 아예 군인들과 시민들이 하나가 되어서 시위를 했다니까.

 

결국 이승만은 426일 하야를 발표하고 곧 하와이로 망명을 가게 되지. 비로소 시민들이 승리한 거야! 물론 4.19가 끝나고 들어선 민주당 정권이 우왕좌왕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1년 뒤에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대한민국은 다시 긴 독재의 시기에 접어들지만,

 

4.19 혁명은 불의한 독재정권에 맞선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시민혁명으로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기억해야할 거고. , 이제는 4.19 혁명에 대해서 잘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