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29. 여인을 보고 애욕에 빠진 비구

Buddhastudy 2018. 9. 20. 21:10


오늘은 우리 몸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몸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몸에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구해서 먹고, 또 몸에 바르고, 또 몸을 이것저것으로 잘 꾸미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또 가만히 살펴보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몸에 집착하는데 이 몸이 병들고 늙고 죽어가게 되면 우리는 그런 몸을 보고 슬퍼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서 우리는 자신의 늙음에 대해서 비관하는 사람이 많고, 병들었을 때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죽게 되면 두려워하고 가족 중에 누군가가 죽게 되면 크게 슬퍼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분명 큰 고통입니다.

 

이 몸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3가지 정도의 교화사례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원정사에 있을 때 얘기였습니다.

제자가운데 한 젊은 비구가 어느 날 걸식을 하러 갔다가 길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는 그만 그 여인을 사랑하는 마음, 애욕에 휩싸여서 말 못할 그런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아파서 즉, 요즘 말로하면 상사병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심한 병에 걸려서 결국은 몸져눕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같이 수행하는 도반이 친구가 시름시름 앓고 얼굴색도 안 좋고 그러니까 병문안을 갔다가 자세히 물어봤나 봐요. 무슨 병인가? 왜 아픈가?

이렇게 자세히 물어보니까 자기의 고민을 털어놓는데, 한 여인을 사랑해서 그 애욕을 잊지 못해서 이렇게 심한 병에 걸렸어요.

 

그래서 그 도반이 이 몸이라는 것은 무상한 거다. 출가수행자는 애욕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설복을 시켰지만 도무지 이 비구는 그 여인을 잊지 못하는 거요.

이 말이 맞기는 맞지만 이 마음속에서 놓여지지가 않는다는 거요.

이렇게 해서 큰 병에 든 것을 보고 결국은 그 친구가 부처님께 말씀을 드렸고,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비구를 병문안을 오게 된 거요.

 

그래서 이 비구의 얘기를 다시 들으시고는 부처님께서 그렇다면 내가 자네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이렇게 하자 이 비구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너 소원을 성취하도록 도와줄 테니까 일어나서 밥을 먹어라하니까 금방 일어나서 밥을 먹고 생기가 돌았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난 이 비구를 데리고 대중들을 데리고 그 여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여인의 집을 방문했는데, 마침 그 여인, 그 처녀가 죽은지가 3일이나 됐어요. 그 집을 방문하니까.

 

그런데 그 부모도 딸이 너무 아름답다가 갑자기 죽게 되니까 그걸 잊지 못해서 장례를 치르지 않고 3일 동안이나 시신을 집에 놔뒀어요. 날은 덥고 그러다보니까 시신이 허물어져서 진물이 생기고, 그 모습이 아주 흉측했어요.

 

그것을 이 비구에게 보여주었어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기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인이 눈을 감으면 늘~~~ 나타나는 잊을 수 없는 그 여인이 이렇게 냄새나고 흉측한 모습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고 이 비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있고, 인연이 모여서 이 몸을 이루고 인연이 다하게 되면 흩어져서 땅으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고, 불로 돌아가고, 물로 돌아갈 뿐이라는 것을.

 

그런데도 어리석게 이 몸에 집착을 해서 애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도리어 큰 고통이 따른다. 이런 내용의 게송을 읊었습니다.

 

그 게송을 듣고 이 비구는 크게 깨달아서 즉, 무상을 깨쳤다.

모든 것들이 다 항상 하는 것이 아니고 변한다는 것. 그래서 그 어디에도 집착할 바가 못 된 다는 것.

 

또 그 허물어진 여인의 몸에서는 자기가 사랑했던 그 여인이라는 것을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는 거요.

나다 할 것이 없다는 것을 크게 깨닫고 바로 아라한 도를 성취했다.

 

이런데서 우리 중생이 이 상에 집착을 해서, 이 몸 모양에 집착을 해서 괴로움의 원인을 만들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몸이 그렇게 영원한 것도 아니고, 애지중지할 만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마치 잘 채색된 항아리에 똥을 담아놓은 것처럼 겉에서 보면 아름답지마는 사실은 아름답다할 것이 못된다.

 

또 이것은 물거품 같고 아리랑이 같아서 금방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몸에 집착을 하지 마라.

 

이렇게 해서 수행자들이 하는 관법, 사념처관이 있습니다.

4가지에 의지하라고 한 그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념처관이 있는데, 그 사념처관 가운데 첫 번째가 관신부정(觀身不淨)입니다.

몸을 있는 그대로 관하면, 이 관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본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조견, 확연히 비추어 본다. 이런 말과 같은 거예요.

 

몸을 있는 그대로, 진실 되게 관하면

이 몸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성스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다.

이 몸은 결국은 허물어져 부서지고, 더러운 것이다.

 

그래서 관신부정, 몸이 정하지 않다, 깨끗하지 않다라는 것을 확연히 알아야

우리가 이 몸에 쓸데없는 집착을 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게 수행의 첫째입니다.

 

수행자는 이 몸에 집착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얘기에요.

이 몸에 집착을 하게 되면 결국은 선정에 깊이 들어가기가 어렵게 된다. 법의 이치를 확연히 깨닫기는 물론 더더욱 어렵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그래도 사람들은 몸의 아름다움에 집착하고, 이 몸을 가지고 나를 삼고, 이렇기 때문에 초기에는 수행자들이 주로 시체를 갖다 버린 시타림에서 수행을 많이 했습니다.

, 주위에 널브러진 시신을 보면서 이 몸이 무상함을 깨닫는 거죠.

 

그래서 아직도 이런 전통 때문에 남방불교에 가면 백골관이라는 게 있습니다. 죽은 시신을 배를 갈라서 창자가 흐트러지게 나온 그런 것을 유리관속에 넣어서 냉동상태로 해놓고, 수행자가 그것을 바라보는 거예요.

 

또 백골관이라 해서 해골을 놔놓고도 그것을 늘 보면서 이 몸이라는 것은 무상한 것이다.

이 몸이라는 것은 부정한 것이다.

몸에 집착할 바가 못 된다. 이런 것을 확연히 깨닫게 하는 공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또 잘못되어서 이 몸은 쓸데없는 것이다.

이 몸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또 잘못 치우쳐져서 자살하는 사람이 또 생겨났어요.

이 더러운 몸 빨리 버려버리자.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렇게 몸을 함부로 하는 것도 또한 정진에 바른 길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백골관을 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부작용이 생겼어요.

 

그래서 나온 것이 소위 수식관이다. 이 말이에요.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그래서 정신을 한 곳에 오롯이 집중을 해서

, 코끝에 집중을 해서

숨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줄 알고,

나갈 때는 나가는 줄 알아차리는 이런 집중수련, , 수식관이다.

아나빠나라 그러죠.

 

이런 공부를 해서 선정을 닦고 그 다음에 나아가서 이 몸이 부정함을, 그리고 우리의 느낌이 임을,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항상 하지 않고 늘 변하는 무상함을, 그리고 제법이 무아임을 관하는 이 4가지 관법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지도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애욕에 사로잡혀서 즉, 아름다운 몸매를 보고, 이성에 대한 그런 어떤 욕망 때문에 몸부림치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 몸이 허망함을 깨닫게 해주셔서 그 괴로움에 벗어나게 했다. 하는 하나의 사례가 되겠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사례는 스스로 자기 몸의 아름다움에 도취가 되어서 교만하고, 거만하고, 남을 업신여기고,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많죠.

어릴 때부터 예쁘다, 예쁘다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아주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이런 게 강하지 않습니까.

 

빈비시라왕의 왕비가 여럿이 있는데, 그 가운에 한 왕비가 케마왕비입니다. 케마왕비는 아주 절세미인이었나 봐요. 그래서 자기 몸에 아름다움에 도취되어서 사람이 아주 거만하고 남을 업신여겼다 그래요.

 

그런데 빈비시라왕이 부처님께 귀의한 이후에 법의 이치를 알게 되었으니까,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 케마왕비가 마음씀씀이가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기 때문에, 이 부인을 어떻게든 부처님의 법문을 듣게 해서 이 좋은 법을 깨치게 해주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고 권유를 했지마는 이 부인이 도무지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거요.

, 부처님을 친견하려 하지 않는 거요.

 

왜 그러냐하면 부처님이 이렇게 몸에 대한 어떤 상, , 몸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하는 이런 법문을 자주하고, 그런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바로

채색된 항아리에 똥을 집어넣은 거와 다름이 없다.

, 집착을 버려라는 뜻으로 말을 했는데,

 

이 여인이 듣기에는 부처님은 미인을 비난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자기가 가면 부처님으로부터 칭찬받기는커녕 도리어 세속말로 하면 야단맞는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부처님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꾸 피했어요.

 

그래서 빈비시라왕이 꾀를 내어 노래는 잘 하는 가수에게 중림정사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시를 써서 노래를 부르도록 했어요. 그래서 가수가 길거리에 노래를 부르니 이 왕비가 그 노래 소리를 듣고

, 어디에 저런 아름다운 숲이 있느냐? 아름다운 경치가 있느냐?” 불러서 물었더니 그게 바로 중림정사라는 거요.

 

그래서 이 케마왕비는 부처님을 만나러 중림정사에 간 게 아니고, 그 아름다운 숲을 보기 위해서 중림정사를 방문하게 된 거요. 그래서 중림정사를 방문해서 숲을 거닐다 보니까, 부처님과 제자들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고 있는데, 그 부처님 주위에 아주 아름다운 여인들이 일산을 받쳐 들고 부채 짓을 하고 있는 거요.

 

부처님께서 케마왕비가 자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었다 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하면 신통으로 환상의 여자를 만들어서 즉, 환영을 보도록 해서 부처님 주위에서 해를 가리는 일산, 우리는 비가 많이 오니 우산이 많지만 인도에는 일산이 많습니다. 뜨거우니까.

 

일산을 받쳐 들고 옆에서 부채를 부치는 이런 여인이, 너무너무 아름다운 여인이 부처님 주위에서 하고 있는 거요. 그래서 케마왕비가 가만히 보니까, 너무너무 아름다워. 그 여인에 비하면 자기의 아름다움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케마왕비는 가지가 그 동안에 잘났다고 뽐냈던 게 너무너무 첫째는 부끄럽고, 두 번째는 부처님에 대한 소문이 거짓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부처님은 아름다운 여인을 비난한다고 들었는데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옆에 두고 있는 것을 보니까 부처님도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시는 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법문은 귀에 안 들어오고, 그 옆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에게만 관심이 쏠려서 아이고 눈도 예쁘다. 코도 예쁘다부러워하면서 쳐다보고 있는데, 부처님께서 그 여인들의 모습을 빠른 속도로 변화를 시킨 거요.

 

그 여인이 젊은 여인에서 중년의 여인으로 나아가서는 늙은 노파로. 이렇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해서 그렇게도 아름답던 여인이, 조금 전에 자기가 놀랄 만큼 부러워했던 그 여인이 머리는 희어지고, 피부는 주름살이 가고, 이빨은 빠지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케마왕비가 충격을 받은 거요. 너무너무 충격을 받은 거요.

그러면서 결국은 이 몸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이렇게 해서 결국은

이 몸이라는 것은 사대로 구성되어 있고,

늙고 병들어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몸에 대한 집착을 놓도록 해서 그 자리에서 수다원과를 성취했다. 그래서 빈비시라왕이 부처님을 찾아왔어요.

 

왕비가 어떻게 법을 듣고 좀 깨쳤나 해서, 그래서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왕이시여, 케마왕비기 비구니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반열반에 들 것이오.” 했어요.

반열반이라는 것은 완전한 열반 즉, 죽는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대왕이 아깝지마는 죽는 거 보다는 비구니가 되어서 수행하는 게 낫겠죠. 그래서 비구니가 되는 것을 허락을 했다. 그래서 케마왕비는 비구니가 되어서 아라한과를 성취했고, 비구니 가운데 제1비구니가 되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한때 교만했던 사람도 그 진실을 깨우치고, 뉘우치고 수행정진하면 이렇게 훌륭한 도를 성취할 수가 있다. 이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절에 왔을 때도 우리 어머니가 우리 스님을 찾아와서 난리를 피우니까, 우리 은사 스님이 어머니를 불러서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미래를 압니까?”

모릅니다.”

그럼 아는 사람이 가르쳐야 되겠소? 모르는 사람이 가르쳐야 되겠소?”

아는 사람이 가르쳐야지요.”

이 아이는 단명합니다. 절에 오면 단명을 피할 수 있고, 밖에 있으면 단명합니다.”

그럼 스님 아들 하십시오.” 이러시고 갔어요.

 

그러니까 얘기가 비슷하죠. 죽든지 출가해서 수행자가 되어서 살든지, 그럴 때 부모는 자식이 출가하는 걸 반대해도 그래도 죽는 거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뭔가 불교를 모르고 진리를 몰라도 자식을 아끼는 마음이, ‘출가해서 우리아이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하면 허락을 하게 된다.

 

요즘 젊은 어머니들은 이렇게 해도 허락을 안 할 지도 모르겠지요.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증거를 내보이세요.” 아마 이렇게 나올 수도 있다.

 

 

이런데서 부처님께서는

이 몸을 무상하다. 그래서 집착할 바가 못 된다.

이것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가 이 몸에 대해서 너무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오.

 

다음 시간에 제가 디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이 몸에 대해서 집착을 하지 않고도 반대로 생각하면 어떻겠어요? 부처님은 또 달리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대다수 사람들이 몸에 대해서 집착을 하기 때문에 그 집착을 버리도록 부처님께서 지도를 하셨다.

 

, 몸에 대해서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긴다는 거요. 괴로움이.

영원히 살듯이 생각하면 죽게 되면 그 슬픔을 가눌 수가 없게 되고,

영원히 젊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 늙음에 실망을 가눌 수가 없게 되고,

영원히 건강할 거라고 생각하면 어떤 사고로 몸을 다치거나 어떤 중병이 들었을 때, 그 슬픔을 가눌 수가 없어지게 된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손가락을 다치게 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축구를 하는 사람이 발을 다치게 되면 인생을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 같은 사람은 손가락을 좀 다쳤다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고, 발을 좀 다쳤다 해도 약간 불편할 뿐이지, 큰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배우가 약간의 화상을 입게 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지만,

나같이 못생긴 사람은 그런 정도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몸을 다쳤기 때문에,

늙기 때문에, 병들기 때문에,

춥기 때문에 슬픈 게 아니라

 

우리가 영원하리라 하는 어떤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니 우리가 몸을 함부로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이런 잘못된 상에 집착을 하지 말라.

 

그래서 우리가 몸에 너무 집착을 하지 말라.

그러면 인생이 괴로워진다.

이렇게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