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46. 욕심내지 않으면 다툴 일 없다

Buddhastudy 2019. 1. 24. 20:17


안녕하세요.

어느 날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제자들을 데리고 말라족들이 사는 마을에 들어갔어요.

다시 말하면 부처님하고 카스트가 틀리는 사람들이죠.

 

말라족 사람들이 부처님은 석가족이니까 석가족이 자기 마을에 온다.

그러니까 일종의 배타성이죠. 다른 족에 대한, 다른 민족, 다른 종족에 대한 그런 배타성으로 이 마을에 오면 저 사람들 물도 못 마시게 하자.

 

공양을 주는 건 자기가 안 주면 되잖아. 그죠?

그런데 물은 우물에 있으니까 자기들이 떠먹을 거 아니오. 그러니까 그 물먹는 것도 배가 아픈 거요. 이 질투심 때문에. 이것은 배척했다는 거요.

 

경전의 여러 곳을 보면 부처님이 배척을 참 많이 당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 훌륭하신 부처님이 왜 사람들로부터 온갖 오해도 받고 배척을 당할까? 그러니 배척을 안 당하는 게 도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수많은 배척에 대해서 부처님은 전혀 구애받지 않으셨다.

이게 자유란 말이오.

 

그런데 얼마나 배척을 했느냐? 물도 못 마시게 하려는 거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아마 점잖았나봐요. 어떤 바라문들은 욕을 하고, 흙덩이를 집어던지고 이랬는데, 이 사람들은 그럴 용기가 없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쩌면 더 나쁜 인간들이라서 그런지, 물에다가 왕겨 있죠, 겨하고 지푸라기를 집어넣어서 물을 더럽혀서 물을 못 먹게 만들어 버린 거요.

그래서 부처님과 제자들이 이 동네에 있지 못하도록.

 

그런데 부처님께서 그 역내에 들어가서 나무 밑에 앉아 쉬시면서

아난다여, 먹을 물을 좀 떠오너라.”

아난다가 이 사실을 아는데 어디 가서 물을 떠와, 우물마다 다 이렇게 더럽혀 놨는데.

부처님이시여, 말라족들이 저희들을 배척해서 우물에다 왕겨와 지푸라기를 집어넣어 물을 흐려놔서 먹을 물을 뜰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다시

아닌다여, 먹을 물 좀 떠오너라.”

아난다가 또

부처님, 지금 먹을 물을 뜰 수가 없습니다. 왕겨와 지푸라기를 집어넣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또

아난다여, 먹을 물을 좀 떠오너라.”

불가에서는 3번 얘기하면 간다고 그랬죠.

 

그래서 아난다가 바루를 들고 우물에 물을 뜨러 갔어. 그런데 우물이 철철철철 넘치는 거요.

그러니까 우물이 넘치지 않아야 거기 겨를 넣어놓거나 지푸라기를 넣으면 더렵혀지지,

물이 넘치니까 어떻게 되요? 다 떠내려 가버렸죠. 우물이 넘치게 되니 다 떠내려 가버렸어. 물이 깨끗한 거요.

 

아난다가 너무너무 놀라고 신기해서 물을 떠서 옵니다.

그때 아난다가 기뻐서 이렇게 소리쳤다고 그래요.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조금전만 해도 지푸라기와 왕겨로 뒤덮여 있었는데, 불타께서 물을 길러 오라고 원하시니 우물은 맑은 물로 넘치게 되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아난존자 수준은 우리하고 수준이 좀 비슷한 거 같아.

이런 사실 자체가 굉장히 신기한 거요.

이런 거로 불타의 위신력, 부처님은 위대하시다. 위대하셔라. 이렇게 찬탄을 하는 거요.

그런데 부처님은 전혀 다르시다.

 

이렇게 물을 떠 와서 부처님께 드리니 부처님께서 물을 마시고 난 뒤에 이렇게 게송으로 말했어요.

물이 만약 항상 넘친다면 우물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

물이 부족해야 사람들이 다투죠.

물이 항상 철철철철 넘치면 물 때문에 다툴 사람이 없죠.

 

마찬가지로 욕심이 없다면 아무도 다툼을 일으키지 않는다.

부처님은 이런 사건에 임해서도

봐라, 부처님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존재냐이렇게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고, 이런 사건도 뭐로 전환시킨다? 설법의 소재로.

 

우리에게 욕심이 없다면 사람은 다툴 일이 없다는 거요.

만약 물이 철철철철 넘치면 다툴 일이 없는 것처럼, 그 비유를 가지고 우리들 마음속에 욕심이 없다면 사람들은 다툴 일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다투는 것은

다 이익 때문에 다투죠?

욕심 때문에 다투는 거요.

 

말은 다 정이니 평화니 그럴듯하게 국민을 위하여, 인민을 위하여, 민중을 위하여 이렇게 말하지마는 다 내면에 보면 이해관계, 욕심 때문에 다툰다.

 

또 하나는 자기 견해, 자기가 옳다 하는 그런 견해 때문에 다투게 되죠.

다툼의 근원이 욕심 때문이다.

 

한 이불 밑에 사는 부부도 요즘 많이 다툰다 하죠.

다투는 원인을 가만히 보면, 부부지간에도 욕심 때문에 그래요.

 

재산도 누구명의로 할거냐. 용돈도 누가 많이 쓰느냐. 왜 내가 벌었는데 쓰기는 네가 많이 쓰느냐, 뭐 이런 거부터 해서

우리 돈이 친정에 많이 가느냐, 시댁에 많이 가느냐, 이런 거 갖고 다투기도 하고,

뭐 여러 문제로 다투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 이익 때문에 다투게 된다.

 

친구지간에도 마찬가지에요.

남자들보면 돈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으면 되는데, 자기가 형편이 되면 사주고 없으면 얻어먹고 이러면 되는데, 술 먹는 사람들 보면 내가 3번이나 샀는데 저 친구는 한 번도 안 샀다. 괘씸한 놈이다. 이렇게 하는 걸 가끔 보거든요.

 

얼마 전에 시골 노인들을 만났는데, 그 노인분들 얘기가 그래요.

노인정에서 놀 때도 차를 몇 번 샀는데도 어떤 노인은 안 산다. 뭐 이런 거 갖고 다투기도 하죠. 구두쇠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또 그런 것이 싫으니까 차를 접대해도 안 먹는데요. 양심적인 노인은. 먹으라 그래도.

그거 얻어먹으면 자기도 한번 사야 되는데, 자기는 차를 살 용돈이 없기 때문에.

이런 어떻게 보면 참 우스운 얘기 같지만 그것도 다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은 욕심 때문에 다투게 되는 거요.

만약에 우리가 욕심이 없다면 다툴 일이 없다. 이 말이오.

 

사람이 욕심이 많으면 뭐 같다고 그래요? 돼지 같다. 이런 말 하죠.

그런데 돼지가 욕심이 많을까요?

사람보다 더 욕심이 많은 생명은 없습니다.

사람이 제일 욕심이 많아.

 

그래서 이건 바꿔야 되요. 돼지 중에 좀 욕심 있는 돼지가 있으면 뭐라고 그래야 된다?

저 돼지는 사람 같다.” 이렇게 말해야 되는 거요. 왜 그런가?

 

짐승은요, 먹을 것을 주면

자기 배고를 때 다른 짐승에게 양보 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합니다.

심지어는 짐승사이에 암수, 부부라 하더라도, 그렇지 않으면 새끼하고라도 양보를 잘 안 해요. 서로 먹으려고 그래요.

 

먹는 것은 그 육신을 가진 생명의 본능입니다.

거기는 양보가 없어.

그것은 욕심 때문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그걸 서로 다툽니다. 그럴 때는. 그러다가 힘이 딸리면 그 먹이를 버립니다.

왜냐하면 먹는 건 뭣 때문에 먹습니까? 살려고 먹잖아. 그죠?

그런데 다퉈서 죽게 될 때는 아무런 미련 없이 먹이를 버립니다.

죽으면서 까지 억지로 물고 있는 그런 짐승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자연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어요.

양보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내가 배고픈 대도 다른 배고픈 사람을 보면 나는 배고 푸지만 일부러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합니다. 안 그런 사람이 많지만 그런 사람도 있죠.

이것은 짐승들의 세계에는 없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신적인 현상이에요. 육체의 현상이 아니고.

 

그러면 반대로 돼지든 개든 자기가 배가 부르다. 그럼 그만 먹습니다.

자기가 다 먹고 그만 먹고 누워있는데, 다른 짐승이 와서 그것을 먹으면 못 먹게 쫓습니까? 놔둡니까? 놔둡니다.

이게 생명의 원리에요.

 

그런데 유독 사람만 한쪽에서 굶어죽는데도 자기는 버리면서도 잡고 있어요. 이런 건 짐승세계에는 없습니다.

이것도 육신의 현상이 아니고 생명 현상이 아니고 이것도 정신 현상이에요.

 

그러니까 전자의 생명현상이 아닌 이 정신 현상을 우리가 보통 선이라 그러고

후자의 짐승이 갖고 있는 않은 이 정신 현상을 악이라 그러는 거요.

 

그러면 짐승들의 생명 현성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하나의 원리만 있어요.

물질세계에서 무거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듯이

, 떨어진다 하는 물리적 현상이 있고, 그 다음에 화학적 현상이 있는 것처럼,

생명은 그 생명이 살고자 하는 하나의 현상이 있다.

배고프면 먹어야 돼. 피곤하면 쉬어야 돼.

 

그런데 이 정신 현상 가운데서는

배고픈데도 나눠먹을 수 있는 그런 정신 현상도 하나 있고

배부른데도 매고픈 사람 못 먹게 하는 이런 정신 현상이 하나 있어.

 

그런데 사람이 배부르면서도 남이 배고픈 것에 음식을 버리면서도 안 주는 이런 현상을 동물에다 견주어. 저 돼지 같은 놈. 이렇게 말하는데 돼지는 그렇지 않다는 거요.

이거는 인간에게 있는 독특한 현상이오.

 

그런데 배고픈 대도 남과 나눠먹는 것은

동물에게 없는 동물보다 우위로 가는 길이고

배부른 대도 음식을 나눠주지 않는,

찌꺼기 남는 음식을 버릴 지언정 배고픈 사람에게 안주는, 이런 정신 현상은 짐승세계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짐승보다 못한 현상에 속하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사람이 짐승을 기준으로 짐승보다 나은 세계가 인간세계와 천상이지 않습니까? 누가 인상세계와 천상세계로 갈 거냐.

짐승보다 못한 세계가 지옥아귀인데, 누가 지옥아귀로 떨어지느냐 하는 것은 그건 하나님이 심판할 필요가 없어요. 딱 보면 알아.

 

-배고플 때는 양보 안하고 배부르면 누가 먹든 상관 안하면 짐승수준이요. 동물 수준이다.

-배고픈데도 다른 사람하고 나눠먹는 수준이면 천상계로 가는 거요.

-자기는 배부른데 저쪽이 배고픈 데도 자기 거라고 안 주면 이거는 짐승 밑으로 가요. 지옥아귀로 가는 거요.

 

집도 한번 보세요.

새는 자기가 집을 지어놨는데, 다른 새가 와서 날씨도 춥고 비 오는데 좀 쉬었다 가자고 들어오면 들어오라고 그래요? 쫓아내요? 쫓아내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방어를 하다가 힘에 죽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버리고 가죠.

그냥 순순히 들어오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올해 와서 새집을 지었다. 그럼 과거 자기가 살았던 집에 다른 짐승이 와서 살면 개입합니까? 안 합니까? 문 잠가 놓는 거 봤어요? 지키는 거 봤어요?

 

그런데 사람은 어떠냐? 자기 집인데 다른 사람이 어려워서 좀 쉬었다 가자하면 쉬게 하는 경우도 있죠.

반대로 자기 새집 사서 이사 가서 살면서 저쪽 집은 문 잠가 놓고 그 앞에 사람이 길거리에서 노숙하고 있어도 그 방에 넣어줍니까? 안 넣어줍니까? 안 넣어줘.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지옥 가는 지 아시겠습니까?

 

어렵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자기 자신도 한번 가만히 보세요.

이게 정신현상에서 오는데 앞에 게 선심, 뒤에 것이 악심이에요.

이 악심은 어디서 오느냐? 탐진치 삼독에서 오는 거요.

 

하는 욕심 때문에

하나는 자기 성질, 분노 때문에. 기분이 나쁘면 이렇게 되요.

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뭘 몰라서.

 

이런 현상을 보면서 수행자는 짐승 이상으로 가야 될 거 아니냐.

그러기 때문에 이 탐진치 3독을 버려야 된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욕심을 버려라. 이러면 욕심 버리고 어떻게 삽니까?’ 이렇게 말하는데, 배고플 때 밥 먹는 걸 욕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피곤할 때 잠자는 것을 욕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추울 때 옷 입는 것을 욕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추울 때 불 때는 걸 욕심이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배가 부른데도

음식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먹으면

이건 욕심보다 어리석음이에요. 자기 몸을 괴롭히니까.

 

또 자기가 충분히 먹을 것이 있는데도

음식을 창고에 비축해놓고도

다른 사람이 굶어죽는데 안내어주면 이건 욕심이에요.

 

지구상에는 이 욕심으로 인해서 스스로 괴롭고 남을 괴롭힙니다.

소위 말하는 선진제국은 너무 많이 먹어 비만증에 걸려 난리요.

 

살 빼는 약을 먹는다. 잘못 먹고 죽었다. 난리죠.

냉장고 앞에 저울대 갖다놓고 달아보면서 먹는다.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이 문제가.

그래서 신문에도 보면 가끔 어떤 글이 나옵니까?

비만과의 전쟁. 전쟁을 해야 할 정도가 됐어.

 

그런데 저 가난한 나라에 가보면 못 먹어서 또 난리요.

사람이 죽고, 영양실조가 걸리고, 병이 들고,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이렇게 불공평 한 거요.

거기는 못 먹어서 병이고, 여기는 많이 먹어서 병이고.

 

그러니 이 욕심을 버리게 된다면 이렇게 자신을 병들게 먹지 않죠.

적게 먹게 되면 자신의 건강에 좋습니다.

그 남는 것을 배고픈 사람들이 먹게 되면 그 사람들도 건강이 좋아집니다. 우린 적게 먹어야 좋아지고, 3세계 사람은 많이 먹어야 좋아집니다.

 

남의 나라 얘기 할 거 없어.

우리나라 안에도 남쪽에 있는 사람 많이 먹어서 문제이고, 북쪽에는 적게 먹어서 문제요.

남한은 남아서 문제고 저긴 없어서 문제고

 

여기는 버리는 게 큰 과제에요.

그래서 쓰레기 문제 이게 큰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저기는 재료 원료가 없어서 난리요.

여기는 남해안에 가면 배가 남아서 그걸 어떻게 처분할거냐가 난리고, 저기는 배가 없어서 고기도 못 잡고, 바다를 중국에 빌려주고, 고기 좀 받고.

이런 식의 불균형이 있다. 이것이 다 뭣 때문에 생긴 거냐, 욕심 때문에 생기는 거다.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도 버리지 말아야 된다.

그럼 안 버리기 위해서 꾸역꾸역 먹어야 됩니까? 그게 아니다.

처음부터 적게 덜어서 적게 먹으면서 남기지 않아야 된다.

 

내가 음식을 버리게 되면 즉, 우리나라에서는 음식 버리는 쓰레기양이 15조원이 된다. 어떻게 통계가 나왔는지 이렇게 나와 있어요.

그러면 음식을 자꾸 버리게 되면 그만큼 식량을 많이 수입해 와야 됩니다.

그러면 국제 식량 값이 어떻게 됩니까? 오르게 되죠.

그러면 가난한 나라에서는 한정된 돈을 가지고 식량을 그만큼 적게 수입해 가게 되요.

그래서 그들이 굶주림과 직결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밥한 톨 버리는 것과 저쪽 편에서 굶주리는 것이 상관없는 게 아니라 이렇게 딱 연결이 되어 있는 거요.

우리가 고무풍선을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튀어 나오죠. 그거와 같은 원리요. 이게 연기법이에요.

 

우리가 이 연기법의 원리를 안다면

나의 욕심이 나를 헤치고 상대를 헤친다.

만약에 내가 욕심을 버리고 베풂을 한다면

나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게 된다.

 

이러한 원리를 어쩌면 부처님은 저처럼 긴말로 하지 않고, 아주 쉽게 우물에 사람들이 지푸라기를 넣어서 부처님을 배척한 그런 상태, 저 같으면 기분이 나빠서 그 기분에 휩싸여서 법문 해 달라 그래도

, 이 상황에 법문할 정신이 있어?” 이러기가 쉬운데,

그것도 소재를 딱 이용해서 바로

 

물이 철철 넘치면 물로 다툴 일이 없듯이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다툴 일이 없어진다.

 

이렇게 행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부처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이 부처님을 본받아서 지금은 그 수준이 못되지마는 그래도 백번 중에 한번은 흉내를 내보고, 50번 중에 한번, 20번 중에 한번, 10번 중에 한번, 다섯 번 중에 한번, 두 번 중에 한번은 나도 그렇게 되어본다. 이렇게 자꾸 닮아가게 되면 우리도 언젠가는 부처님같이 된다.

 

그래서 번뇌가 없는 사람, 괴로움이 없는 사람, 어떤 경우에도 걸림이 없는 사람, 속박이 없는 사람. 해탈과 열반을 증득한 사람이 될 수가 있다.

모든 우리 불자들이 다 이렇게 될 수가 있다.

법에 귀의해서 수행정진 한다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