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식_죽음이야기

4. 최준식 교수의 죽음 이야기 6월 26일 방송 (29:51)

Buddhastudy 2012. 1. 8. 22:05

  출처: 유나방송

우리 마음이 얼마나 간교합니까? 상상임신 예를 저는 많이 드는데, 아이를 갖고 싶은 일념이 너무도 강한 나머지 스스로 임신했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있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어떤 반응이 생겨납니까? 멀쩡하던 생리가 끊어지죠. 이게 함부로 끊어지는 게 아닌데, 전쟁 때 피난 갈 때나 이런 때나 끊어지는 거거든요? 전쟁 피난 갈 때는 여성 같은 경우에는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재생산하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자기 목숨 부지하는 게 힘들어지는 그런 위험에 빠지는 그런 위험상황에 들어가기 때문에, 몸이 스스로 알아서 생리를 못하게 합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상상임신의 경우에도 그런 경우가 벌어지죠.

 

그다음에 구역질이 나요. 배가 불러옵니다. 어떤 경우는 아이가 발로 배를 차는 그런 느낌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아이 안 나오는 거 빼고는 똑같습니다. 이게 우리 마음의 그 힘이죠. 이걸 좋게도 쓸 수 있는 거죠. 이런 것이 가능한 게 바로 우리는 인간은 스스로를 대상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겁니다. ~ 그러면 여기서 진짜 중요한 얘기가 들어갑니다. 인간은 그러면 언제부터 자아의식을 갖게 됐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이런 자아의식이 있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태어나서는 동물과 같습니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따라서 엄마한테 젖을 먹을 때도 엄마라는 존재가 밖에 존재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것은 외부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이유부터만 가능하게 됩니다. 이게 과연 언제가 되느냐? 대체로 두 살 부근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때 두 살 부근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은 저쪽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이전까지는 아직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될 수 있지만, 인간은 아닙니다.

 

그런데 두 살 되기 전까지 혹은 두 살 부근에 인간의 자아의식이 발전되려면 문제는 인간 사이에서만 커야 됩니다. 만일에 인간이 없는 환경에서 크게 되면 인간적인 자아의식을 못 갖게 됩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죠. 인도에서 있었다고 그러죠. 늑대 소년소녀 얘기. 남매 얘기죠. 아주 어릴 때 몇 개월짜리 일 때 늑대한테 납치가 된 거죠. 늑대 사회에서 크게 됩니다. 10대에 15~16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때 사람들에 의해서 발견이 돼서, 인간사회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제일 먼저 언어를 가르쳐야 되죠. 못 배웁니다. 언어를. 이게 바로 언어가 얼마나 자아의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혹은 자아의식의 결과가 언어인가? 이거를 얘기해주는 겁니다. 아이들이 결국 동물의 외마디소리 그런 괴성만 지르고 언어를 못 배우고, 그다음에 더 나아가서는 인간사회에 적응을 못 하고 일찍 죽게 됩니다. 굉장히 좋은 예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이런 자의식이 없다가 두 살 근방에 생겨나고, 이런 이야기들을 전하는 기가 막힌 신화가 있습니다. 신화라고 그러면 인간의 내면의식을 설명하는 굉장히 좋은 이야기거든요.

 

이게 불교에 있는 게 아니고요, 기독교에 있습니다. 기독교에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신화. 이게 바로 인간의 자아의식이 발현이 되는 그것이 말해주는 아주 기가 막힌 신화입니다. 뭐 여러분들 가운데는 불교도가 더 많겠지마는 다른 종교도 우리가 배워야 됩니다. ~ 어떻게 시작합니까?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 살고 있죠. 하느님이 그 선악과만 따먹지 마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어떻게 됩니까? 벌거벗은 채로 살고 있죠. 이건 무슨 얘기인고 하니요, 자아의식이 없을 때는 수치, 이런 게 없습니다. 도덕심 이런 게 없어요. 아이들, 베이비, 그 몇 개월 된 아이들이 무슨 도덕심이 있습니까? 바로 그 상태를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선악과를 따먹게 되죠. 다른 얘기도 많습니다. 여자가 먼저 이브가 따먹고 남자를 먹게 하고. 이런 식의 얘기가 있습니다만 다 생략하고요. 따먹은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눈이 밝아지면서 그다음에 제일 처음에 알았던 게 뭐에요? 서로 벗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사실은 고 이전단계에 있는데, 고건 잘 묘사가 돼 있지 않습니다. 서로를 벗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상대방을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그건 바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대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다음에 옷 벗고 있어 수치스럽다. 이런 것들은 한참 뒤에 나오는 개념들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자아의식이 없는 상태에 있다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아의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자아의식이 생겨나면 어떻게 됩니까? 아주 중요한 겁니다. 고통의 시작입니다. . 왜요? 나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죠. 그럼 바로 내 것, 이 개념이 생겨납니다. 욕심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바로 모든 고통의 근원입니다. 왜냐하면, 욕심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경에도 나오죠. 온 우주가 금은보화, 온갖 보석으로 돼 있고, 그게 내 것이라 해도 인간의 욕심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다.

 

또 목이 마른 사람이 짠물을 들이키는 거와 같아요. 먹을 때는 조금 시원한 거 같지만 조금 뒤에 더 많은 물을 필요로 해요. 이게 바로 인간의 욕심이다. 불교에서는 인간 고통의 원인을 집착으로 얘기하지 않습니까? 고집멸도. 집착. 애착. 이렇게 얘기를 하죠. 사실은 집착은 끊을 수가 없습니다. 집착 자체로는. ? 집착의 근원인 나, 나를 이게 극복을 해야 되는 거고. 바로 내가 없어지든지, 아니면 초월하든지. 이래야 근본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렇게 멋있는 신화를 갖고 있으면서도 제가 보기에는 제대로 해석한 거 같지 않아요.

 

그래도 그것은 뭐라고 그럽니까? 아담과 이브가 여기서 원죄를 지어가지고 고통이 시작됐다. 어떻게 묘사를 합니까? 이브는 애를 낳은 고통이 있고, 또 아담은 밭을 갈고 일을 해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이죠. 애를 낳는 게 동물 보세요. 새끼 낳을 때 그렇게 고통스럽습니까? 조금 끙끙대다가 낳고, 바로 또 돌아다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죠. 새끼를 낳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자연의 순환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아픈 고통이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요가를 제대로 해서 몸이 제대로 잡혀 있으면 크게 고생하지 않고 낳습니다. 그게 고통이 아니에요. 일하는 것도 얼마든지 즐겁게 일할 수 있지 않습니까? 좌우간, 인간이 자아의식을 가진 순간부터 고통에 들어가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원죄.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를 하는데요. 아담과 이브는 그 상태에서는, 자아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복종이다. 불복종,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왜요? 아니 다른 사람이라는 개념. 외부세계가 없는 그런 상황인데 무슨 거기에 뭐 복종, 죄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담과 이브는 인간이 진화되는 과정, 그 순서를 그대로 넘어선 거, 따른 거뿐이에요. . 그런데 그다음에 아주 기가 막힌 비유가 나옵니다. 아담과 이브는 어떻든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죠. 그런데 쫓겨나간 다음에. 이건 제가 기독교인들한테 얘기를 해주면 전혀 모릅니다. ~ 굉장히 중요하고 멋있는 신화인데, 쫓겨난 다음에 뒤를 돌아봤더니 에덴동산의 입구에 천사가 불 칼을 들고 있어요.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거에요. 이게 뭘 상징하는 거겠습니까?

 

한번 자아의식이 생겨나면 다시는 자아의식이 없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그런 얘깁니다. 맞는 말씀이겠죠. 우리가 인간이 됐는데, 다시 동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못 돌아갑니다. 그것은. 아무리 발광을 하고 자아의식을 없애도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아의식의 단계에서 한 단계 업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초월적인 단계입니다. 이걸 조금 학술적인 얘기로 하면은 우린 태어나서 전인격적 단계로 들어갑니다. personal stage라고 얘기합니다. 거기에서 두 살 경에 이 두 살 경에 자아의식을 갖게 되죠.

 

이때 이제 미국에선 terrorble tow라고 그래요. 아주 가증스러운, 말 안 듣는 두 살. ? 그럴 수밖에 없어요. 자아의식이 생겨나니까 이제부터는 엄마한테도 아니, 안 돼. 싫어. 이런 부정적인 얘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전까지는 그냥 엄마 품속에서 전혀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굉장히 말을 안 듣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거에요. 사실은 그래서 이 두 살 때 자아의식을 갖는 거는요, 우리가 사춘기 때 변화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엄청난 변화입니다. ? 동물에서 인간이 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그래서 prepersonal, 전인격전 단계에서 personal단계. 인격적 단계. 인간이 됩니다.

 

~ 인간이 된 다음에 아까 말씀드린 데로 다시 그 전 단계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그랬죠. 다음 단계는 뭡니까? 그 다음 단계는 transpersonal. 초인격적 단계입니다. 인간은 바로 이 길로 가야 됩니다. 이 길이 뭐냐? 바로 불교나 기독교. 이런 세계적인 종교들에서 말하는 사랑과 자비. 뭐 지혜. 이런 걸 통해서 자아를 넘어서는, 자아를 없애는 게 아닙니다. 그 자아를 포용하면서 초월하는 단계로 가는 겁니다. 바로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 이런 단계입니다. 어떻게 간다? 지금 말씀드린 대로 지혜와 자비, 사랑. 이런 것으로만 갈 수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세계 모든 종교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 모든 종교는 초인격적인 단계로 가라고 권유하고 있고 가는 단계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용서, 사랑, 자비 이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혜. 저는 이걸 제가 뭐 안게 아니고, 켄 윌버 (Ken Wilber | Kenneth Earl Wilber) 라는 현대의 토마스 아키마스, 동서양의 심리학 종교를 총망라한 그런 거대한 사상가가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에서 공부를 했고, 제가 미국 유학 때 불교를 배웠던 미국교수님한테도 들었던 얘기이기도 합니다. 이 캔 윌버 책 중에 Up from Eden. 에덴으로부터의 도약, Up from Eden. 이런 책이 있습니다. 이게 뭔고 하니, 제목이 뭔고 하니, 에덴동산으로부터 업. 진화된 거에요. 인간은. Fall from Eden. 에덴동산으로부터 타락한 게 아니라고 그랬죠.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에덴동산의 신화는 우리가 인간이 되는 과정을 얘기하는 거지. 거기서 죄를 짓고 타락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이런 건데 아까 말씀드린 데로 기독교인들은 이걸 그렇게 부정적으로 해석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이 되고 우리 앞길은 더 이상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데 있겠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 오늘은 조금 철학적인 내용입니다만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혹시 이 부분이 좀 어려우시면요, 그냥 건너뛰셔도 됩니다. . 뭐 그다음 시간부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문제. 과연 우리 인간은 죽음 이후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또 존재한다면 어떻게 어떤 상태로 있게 되는가? 또 그쪽은 있다면 여기와 어디가 다르고 같은가? 그런 상당히 재미난 문제이면서 또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그러면 장시간 강의를 들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다음 시간에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