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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8회 눈 바른 것을 귀하게 여길 뿐 (43:46)

Buddhastudy 2012. 1. 29. 22:10

  방송 보기: 불교TV

옛 어른이 말씀하셨다. 옛날 어느 큰 스님 말을 인용 소개합니다. . 이산스님이 제자 앙산스님에게 해준 말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단지 자네의 눈 바른 것을 귀히 여길 뿐. 자네가 정견을 갖추었느냐? 그게 중요하다 이거요. 가령 공부라는 거는 학생들의 경우에 결국 학력이라는 거는 많이 배워서 시험을 쳤을 때 높은 성적이 나오는 그게 일단 평가가 되는 거에요. 다른 거보다도 많이 알고 그걸 통해서 지식을 통해서 시험을 치면 좋은 성적, 점수가 나올 수 있는 이게 중요한 거에요. 학업에 있어서.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수행에 있어서도 다른 눈을 갖추어야 만이 올바른 수행이 이루어진 것이니까 그 눈을 귀히 여길 뿐이다.

 

그대의 살아온 履歷이력을 귀히 여기지 안노라. 뒤에 이어지는 말은. 눈이 바른 것을 귀히 여길 뿐, 어떻게 살아왔느냐? 예를 들면 뭐, ~ 고생을 많이 했다. 또는 편안하게 남보다 참 좋은 환경에서 잘 살아왔다. 그런 어떤 캐리어랄까?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현재 눈이 바로 떠져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이게 중요하다는 거죠. 그래서 이 말이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옛적에 앙산이 앙산혜적스님이 계셨습니다. 양종을 창시한 스님이죠. 스승이 이산 영우선사였고, 그 제자가 앙산혜적이었는데, 두 분이 선의 다섯 가지 종파 가운데 양종이란 종을 창시했어요. 그런데 이 산이 앙산스님에게 뭘 물었을 때 앙산이 이런 말을 했어요.

 

열반경 40권이 모두 마구니의 말입니다. 이건 전자에도 한 번 이런 말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인가? 한번 설명 했습니다마는 선에서는 경전의 말씀을 중요시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불경스럽거나 부처님을 소홀히 여긴다. 이렇게 볼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런 거는 아니에요. 선은 선독으로서 깨달음을 얻어내고자 하는 특별한 길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길에만 충실하면 된다. 이런 논리에서 경전의 이런저런 말씀이 때로는 참선의 화두를 바로 들고 공부를 하는데 장애가 될 소지도 있다. 이렇게 보는 거에요. 그래서 공부를 장애 하는 거는 마구니 거거든요. 공부를 장애 하는 거는. 그래서 부처님 최후설법을 수록해 놓은 경전이 열반경입니다. 열반경. 대승경전. 권수가 40권에 달해요.

 

이 경전에 설해져 있는 부처님 말씀이 말하자면 쓸데없는 필요 없는 말입니다. 이런 식에요. 선 쪽에서 선을 강조하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사람은 무얼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이게 전부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거든. 그 외에는 필요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열반경 40권이 모두 마구니의 말입니다. 하고 앙산이 대답을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한 것이 앙산의 눈이 바로 떠진 거다. 이런 뜻이에요. 이렇게 선을 바로 참구해서 바른 눈을 얻은 분상에서는 경전의 말, 그 중요하지 않다. 이거요. 불법이 이러니저러니, 부처님 법이. 뭐 그걸 설명하는 거 그거 뭐 중요하겠어요.

 

우리가 물론 부처님 말씀을 많이 알아야 되고, 그대로 실천도 해야 되고, 불자의 신분에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이 있지만은 내 개인의 공부 분상에서는 내가 바른 소견을 빨리 가지면 되는 거에요. 그게 눈 바른 겁니다. 그래서 이 말을 두고 앙산의 눈이 바르다. 이렇게 말했다. 이거요. 또 앙산이 지나온 자취의 이력을 물으매, 물었을 적에 이 말이오. 이 산이 대답을 했다. 과거에 어떻게 공부를 해 왔는가? 과거의 경력. 이게 중요한 거는 아니다. 현재 바른 눈을 갖추었느냐? 갖추지 못했느냐? 이건 참~ 선수행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인간사 전체에서 이 점이 중요하지 않겠어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마음이 어떠한가? 마음이.

 

그래서 한때 세도를 누리고 권력을 누리던 사람들이 예를 들면 정치적인 그런 면에서 볼 때, 세계는 수많은 독재자들이 있었거든. 처참하게 무너지잖아요. 뭡니까? 리비아, 독재정권을 오래 누리던 사람, 얼마 전에 처참하게 생애를 마쳤다. 이런 보도도 세계 뉴스를 타고 다 보도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무엇을 남기는가? 저 인도에 타고르라는 시승이 있었습니다. 노벨문학상도 받고 이런 분이죠. 우리나라를 조용한 아침의 나라다. 모닝캄. 이 분이 한 말이거든요. 그런데 이 분이 아주 깊은 어떤 명상시라 할 수 있는 시를 많이 남겼어요. 그분이 시구 속에 시 속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나중에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인생은 결국 마지막이 죽음의 문제에요. 이 죽음 문제를 가지고 지어놓은 시가 있는데, 죽음이 그대를 찾아올 때, 죽음을 손님에 비유해가지고 내 집에 외부에서 어느 손님이 찾아오는 것에 비유해가지고 쓴 시구입니다. 죽음의 손님이 그대를 찾아올 때 그대는 죽음의 손님에게 무엇을 받칠 것입니까? 손님 대접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 말이에요. 누가 우리 집에 방문해 왔을 때 내가 주인으로서 손님을 맞이한 거다. 이거요. 그때 손님 대접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 말이오.

 

나는 내게 찾아오는 죽음의 손님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손님 대접을 후하게 해 드리겠다. 이 말이오. 죽음의 손님 대접을 후하게 해 드리겠다. 나는 내 생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것을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아서 죽음의 손님 손에 들려 보낼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내 일생에서 가장 빛났던 거, 아름다웠던 거, 그거를 선물 주겠다. 이거에요. 바구니에 담아가지고 이걸 가져가지오. 선물 주겠다. 이거에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나는 내게 찾아오는 죽음의 손님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 다 죽을 때 죽음 손님 대접 잘해야 돼요. 그거 잘 하려고 불교 공부하는 거요. 멋진 시죠.

 

그래서 인생이 궁극적으로는 이 문제에 부딪혀요. 이 문제. 그래서 불교는 모든 이 세상의 근본문제. 인생의 근본 문제는 딱 요약을 하면은 나고 죽는 생사의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자. 그래서 불교의 근본 사상을 교리적으로 설명할 때도 생사 해탈이라. 이럽니다. 생사 해탈. 앞서 일념자를 탁하고 터트려야 된다. 그렇게 하면 생사가 끝난다. 이게 생사문제 해결하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이제 다음, 중요하게 강조하는 말이 등장을 하는데 눈 밝은 것이 그게 귀한 것이다. 소중하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려면은 눈이 밝아져야 된다. 이 말인데. 눈이 밝아지게 하기 위해서는 단박에 깨닫는 공부를 해야 된다. 돈오. . 이게 단박에 몰록. 단박에 깨닫는 공부를 해야 된다. 돈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돈오. 돈오 점수거든요. 선가귀감에서도 근본 대의는 돈오점수입니다.

 

그래서 돈오를 해야 되는데 돈오를 하기 위해서 자기 마음을 깊이 믿어라. 여기에서 돈오가 나온다는 거에요. 그래서 원컨대 도를 닦는 자들은 도를 닦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깊이 묻을 뿐이다. 내 마음, 우리 전부 마음가지고 살잖아요. 내가 내 마음을 깊이 믿어서 거기서 돈오한다는 거에요. 돈오의 방법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오. 내가 내 마음을 깊이 믿으면은 거기서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불성공덕이 가득하다는 걸 알게 된다는 거에요. 이게 중요한 건데, 사람들은 이걸 어렵다고 생각하고 난 자신 없다.’ 이렇게 스스로 포기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내 마음을 깊이 믿지 못하고 아이고, 부처는 부처가 하는 것이지 내 같은 중생이 뭐~ 부처가 되겠느냐?’ 말하자면 스스로 나약해지는 거. 불자들이 간혹 그런 말을 하는 경우를 보았어요. ‘스님, 내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닙니다.’ 무슨 상말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부처님 가운데 토막은 또 뭐요? 내가 부처인 줄 아느냐? 이래요. 이 말은 반대로 나는 부처가 아니고 평범한 중생이다. 물론 어떤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중생이 부처를 말하자 면은 외면하고 중생 핑계를 댈 때는 좋은 생각 가집니까? 나쁜 생각 가집니까? 대부분 나쁜 생각을 가져요.

 

나는 중생이다.’ 할 때는 변명하려고 그런 말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전부 나는 중생이다. 중생이다 할 때는 중생의 업 짓는 쪽으로 가거든. 그게 묘하잖아요. 중생이라 할 적에는 중생의 나쁜 업 짓는 쪽으로 마음을 돌려. 그러니까 핑계를 부처에다 대야 돼. 내가 아직 중생이지만 나도 부처다 할 때 부처는 거룩하거든 생각도 중생처럼 악업 쪽으로 기울지 않거든요. 그래서 중생이 중생 핑계를 대지 맙시다. 그래서 이 말을 이 대목에서는 비굴해지지 말고 내가 부처인데 부처가 아니다라고 비굴해지지 말라 이 말이오. 비굴해. 비굴해지는 거는 남한테 굽실굽실하면서 자기 주체의식을 포기하고, 이렇게 아첨을 하거나, 이런 자세를 갖는 걸 두고 하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내 마음을 깊이 믿어서 비굴해지지 말라. 비굴해지지 마라 이거에요. 또 반대로 그렇다고 아직 수행이 익어지지 않았는데 겉멋에 치우쳐서 뽐내지도 말아라. 이 대목에서 이제 경책하는 말이 이렇게 설해져 있습니다. 비굴해 지지도 말고 뽐내지도 말아라. 비굴해 지지도. . 사실 불교는요, 마음에 어떤 감동이 느껴지느냐? 이게 중요한 거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사람이 서로 마음과 마음 사이에 감동이 되면은 그 마음, 진실해 지면서 거기에 인격적인 그런 본래의 모습이 나타나는 거에요. 수산 성염선사라는 스님이 계셨어요. 이 스님 한때 법화경을 열심히 외웠어요.

 

그런데 스승 되는 스님이 어느 날, 통곡을 해. 스님이 막~ 대성통곡을 해. 어른 스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어느 회상에서 통곡을 해. 그래서 스님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크게 우십니까? 하니. 내 법이 아무에게도 전해 줄 수가 없다 이거요. 옛날 큰 스님들은 슬하에 자기 밑에 큰 제자가 배출되어서 자기 법을 전해주기를 바래. 그것은 마치 세속에서 옛날 가문의 대를 잇기를 바라는 거와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옛날은 남아선호사상이 있었잖아요. 가문의 대가 이어져 내려가야 된다는 거에요. 그렇듯이 선사들도 법을 전해줄 때가 있어야 자기 역할이랄까 도리를 다하는 거로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왜 그렇게 우십니까? 하니 법을 전해 줄 수 없다 하니, 그럼 제가 아직 부족하지만, 스님 법을 전해 받으면 되지 않을까요?

 

자네는 안 된다 이거요. 왜 안 되느냐 하면은 법화경에 빠져있어. 만날 법화경만 독송하고 법화경에만 빠져있다 이 말이오. 선에서는 때론 너무 지나칠 때는 금기시키는 거요. 그러면 제가 법화경을 버리고 스님 법을 바로 공부를 해서 전해 받겠습니다. 이래서 공부를 바로 해가지고 그 법을 전해 받았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스님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큰 선풍을 떠날리게 되었는데. 어느 날 어떤 분이 찾아와가지고 묻는 거에요. 스님, 부처님 가르침 근본이 뭡니까?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 말하자면 불교의 근본핵심이 뭐냐? 이런 뜻이죠. 선에서도 뭐 여아시 조사설해인있고, 하는 여러 가지 공안에 해당되는 질문이 많이 있습니다.

 

이 분은 단순히 불교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가? 이렇게 알고 싶어서 궁금해서 여쭈어 본 거에요. 이 질문을 받은 이 스님이, 잘 듣게. . 시어머니와 며느리 한집에 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두 사람이 있어요. 어느 날 시어머니가 나귀를 끌고 나와 가지고 나귀 등에 며느리를 앉혀놓고, 등에 타게 하고 이 말이오. 고삐를 잡고 끌고 간다. 이게 불법이라는 거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비식이죠. 불교가 무엇입니까?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었는데, 나귀가 나오고 시어머니 며느리가 나오고, 그런데 시어머니가 어른이고, 며느리가 소하 사람이잖아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시어머니를 태우고 며느리가 끌고 가야지. 그 게 일반적으로 볼 때는 그게 상식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경우는 며느리를 나귀 등에 태우고 시어머니가 고비를 들고 하인처럼 말이에요. 이 관계가 상전 종 관계가 아니고 며느리와 시어머니, 고부간 아닙니까? 이랬거든. 이 얘기를 보충해서 좀 설명하자 면은 상식하고 다르다. 이거요. 시어머니가 타고 며느리가 고삐를 잡아야 될 텐데, 반대로 돼 있다. 이거요. 그런데 그럴 사정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가령 며느리가 아파서 몸이 안 좋을 때, 이 경우는 이렇게 얘기를 만들면 됩니다.

 

며느리가 애기를 가지고 있는 임산부에요. 갑자기 얼굴색이 안 좋아지더니 땀을 뻘뻘 흘리고 몸에 이상이 있는 거 같애. 그래서 시어머니가 깜짝 놀랍니다. 쟤가 몸이 무거워졌는데, 임신을 해 있는데, 무슨 사고가 생긴 것이 아닌가? 겁이나요. 그래서 마구간에 나귀를 끌고 나와 가지고 어서 타거라 건넛마을 의원 집에 가보자. 요새 말로 병원에 가는 거에요. 그래서 아~ 며느리가 애기를 배 있는 임산부인데, 몸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아서 시어머니가 깜짝 놀라 건넛마을 이웃. 요새말로 하면 병원에 가려고 그렇게 며느리를 나귀 등에 태우고 고삐를 잡고 간다. ~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구나. 그래서 상식적인 경우하고 다른 상황이 되었구나.

 

이럴 때 어떻게 돼요? 감동이 돼요. 감동. 이 얘기의 주제는 감동이에요. 그래서 사람 마음이 감동이 될 때, 내 마음 너 마음이 서로 감동이 될 때, 감동이 되는 그 자리에 부처님 법이 있다. 이 말이오. 얼마나 멋진 법문이에요. 감동이 될 때. 감동이 될 때는 마음이 가장 진실해지는 거고, 정성스러워지는 거고, 착해지는 거고. 그래서 마음의 감동이 없으면 법이 없는 거에요. 따지고 보면은. 이런 뜻을 갖고 있는 말입니다. 아무튼, 이 대목의 얘기를 다시 요약 정리하면은 원컨대 도를 닦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깊이 믿을 뿐이오, 내 마음 깊이 믿어라. 마음 밖의 엉뚱한 짓 하지 마라. 이 말이오. 오늘 법회는 이것으로 마치고 다음 주에 또 나와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