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공덕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나만 희생했다는 생각이 들고
억울한 마음이 많이 들어서
무주상보시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무주상보시를 남편에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실천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왜 또 굳이 실천을 하려고 해요?
실천하기 어려우면 그냥 안 하면 되죠.
스님한테 화를 참기가 어렵다고 질문하면
스님은 ‘화를 내라’ 이렇게 말합니다.
‘화를 내고 나니 괴롭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면
‘그러면 화를 내지 마라’ 이렇게 말해요.
여기 음식이 놓여 있다고 합시다.
이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할 때
‘그 안에 독 들었다’ 하고 알려주면
더 이상 질문을 안 하고 거기서 끝이 나야 합니다.
독이 들었다는 걸 알았으면
먹고 싶은 마음이 탁 끊어져야 하는데,
독이 들었다고 알려줘도
‘그래도 먹고 싶어요’ 그러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그래도 먹고 싶어요’ 하고 말하면
저는 ‘그러면 먹고 죽어라’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독이 들었다고 알려주면
거기서 끝이 나야 하는데, 굳이 그걸 먹고 싶다고 하니까
‘그러면 먹고 죽어라’ 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독이 든 줄 모를 때는
‘먹고 싶어요’라고 하면
‘거기에 독이 들었다’ 이렇게 말을 해줄 수 있지만,
독이 들었다는 걸 알려줬는데도 먹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먹고 싶으면 먹고 죽어라’ 하고 말하는 수밖에 없죠.
그래서 여러분이 스님한테 처음 물어볼 때는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지만,
그 얘기를 듣고서도
‘그래도 하면 안 될까요’ 하고 다시 물으면
‘그러면 그렇게 해라’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것처럼 화가 올라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도
‘다만 알아차려라’ 이렇게 말해줍니다.
‘화를 내는 것은 독이 든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하고 알려줄 뿐입니다.
그러면 독이 든 줄 알고 알아차려야 하는데,
‘그래도 화가 나는데 어떡합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그래도 먹고 싶은데요’ 하는 말과 똑같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는 대화를 잘 들어 보세요.
‘이 음식을 먹고 싶어요.’
‘거기에 독 들었다.’
‘그래도 먹고 싶어요.’
‘그럼 먹어라.’
‘죽기 싫어요.’
‘그러면 먹지 마라.’
‘그래도 먹고 싶어요.’
‘그럼 먹어라.’
‘죽기는 싫어요.’
‘그럼 먹지 마라.’
이렇게 스님이 대화를 하니까 여러분은
스님이 남의 심정을 모르고 말한다고 하는데
먹고 싶어도 독이 들었으면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도 먹고 싶으면 죽는 걸 감수해야 합니다.
이게 사실이기 때문에
여기에 다른 이야기가 더 필요 없습니다.
본인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먹으면 죽는다고 알려주는 것이고,
또 죽기 싫다고 하니까 먹지 말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알려줄 뿐입니다.
스님이 지금 자기 인생도 살기 바쁜데
무엇 때문에 남의 인생에 간섭까지 하겠어요?
지금 질문자가 괴롭다는 건
남편에게 뭔가를 해주고 나서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너를 보고 싶어 했는데 너는 나 안 보고 싶니?’
‘나는 널 사랑하는데 왜 너는 나를 사랑해 주지 않니?’
‘나는 밥을 해줬는데 너는 왜 고맙다는 말을 안 하니?’
이렇게 늘 바라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길 가는 사람한테는
해주는 것도 없고 바라는 마음도 없는데,
가족한테는
해주는 것도 많고 바라는 마음도 많습니다.
가족 관계에서 갈등이 심한 이유는
뭔가 해주고 나서 그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투자를 하고 나서 이익을 바라는 마음과 같습니다.
그것이 물질적으로 투자를 하고 나서 칭찬으로 보상을 받든,
칭찬으로 투자를 하고 물질적으로 보상을 받든,
뭐가 되든 보상을 받아야 마음이 풀리는 거죠.
또한 받을 때는
항상 이익을 조금 더 붙여서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서는
보상이 아예 오지 않거나
오긴 오는데 충분하게 오지 않아서 손해 보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이 장사를 하는데
거래처 사이에서 계속 손해가 나면
‘거래를 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거래를 끊으려고 해도
막상 다른 거래처가 마땅한 곳이 없으면 고민이 됩니다.
다른 거래처가 있으면 아예 그쪽으로 가면 되는데
마땅한 거래처도 없고
이 거래처와 계속 거래를 하자니 적자가 나고
그렇게 되면 계속 거래를 하면서도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지금 질문자가 남편한테 불만을 가지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나한테 이익이 되는 다른 남자가 있으면
벌써 정리를 하고 갔을 텐데
다른 남자가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지금의 남편보다
이익이 남는다는 보장이 없는 거죠.
지금 거래하고 있는 남편이 이익을 보장해 주면
가장 좋은데
현재의 남편은 이익 보장을 안 해주고
그렇다고 다른 거래처는 없고
그래서 지금 고민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고민의 핵심은
내가 이익을 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익을 보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차피 이 사람과 거래를 이어나가면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데
계속 이익을 볼 생각을 하고 있으면
괴로움이 쌓여서 결국 거래를 끊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손실이 나는 것처럼 느껴져도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꼭 손실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너무 이익을 따지지 말라는 거예요.
이때 아무런 보상이나 이익을 따지지 않는 것이
바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좋아요.
그런데 무주상보시까지는 안 되더라도,
너무 이익을 따지지는 말아야 내가 덜 괴롭습니다.
부부 사이는 상거래를 하는 사이가 아닌데
자꾸 부부 사이를 상거래처럼 따지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말하는 사랑은
가만히 보면 전부 상거래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해' 라고 요구하는 것은
‘내가 얼마 해줬는데 너는 얼마 해줄래?’ 하고
상거래를 하는 것과 똑같은 관점이에요.
모든 갈등이 상거래를 하는 관점을 갖고 있어서 생깁니다.
상거래를 하는 관점을 가지면
같이 살면서도 계속 갈등이 생깁니다.
상거래를 하는 관점을 놓아버리면
갈등도 사라집니다.
꼭 무주상보시로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남편과 상거래를 끊자고 입장을 정리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계속 거래를 하려면
이익을 보려는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겁니다.
남편과 안 살겠다면 모르지만
계속 살려고 하면서도 상거래적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괴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이 남편과 거래를 안 할 수도 없다면
남편한테서 이익을 보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내 괴로움이 적어집니다.
우리가 성매매라고 하는 것도
결국 성을 가지고 상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부부가 되면
성을 가지고 상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 사이에 상거래하던 걸, 부부가 되면
더 이상 상거래하지 않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동시에 부부가 되어도 여전히 많은 부분을 계속 상거래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표현할 때
성을 가지고 상거래를 하면 성매매라고 하고
상거래를 안 하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합의하에 이뤄지지 않거나
상거래를 하는 관계에서 지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걸 성추행이라고 합니다.
괴로움이 없으려면
성매매를 하는 수준에서 사랑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일을 시키고 돈을 안 주는 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입니다.
일을 시키고 돈을 주는 것은
사장과 노동자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노동은 여전히 거래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을 하되 돈 받을 생각이 없는 자원봉사는
사랑과 같습니다.
남녀 사이의 사랑처럼
인간관계에서 거래를 안 하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저 상대가 필요해서 도와주고,
상대가 목마르다고 하니 물 한 바가지 떠 주는 것이 사랑이에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내가 이거 해주면 너 얼마 줄래?’ 이러지 않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거래를 안 하고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정토회 안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상거래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고
정토회는 자원봉사자로만 운영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입니다.
이러한 운영 방침은
상거래가 일상인 자본주의 사회와는 많이 다릅니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키울 때도
상거래하는 관점을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크면
은근히 상거래하는 관점이 생깁니다.
‘내가 너를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너는 내 심정도 모르고’
이렇게 말하는 건
상거래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상거래하는 관계이긴 합니다.
그러나 해탈을 하려면
상거래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상거래를 하면
늘 손해와 이익이 생기니까
희로애락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손해가 날 때는 괴로웠다가
이익이 생기면 기뻤다가 하는
희로애락의 윤회가 반복되는데,
이러한 희로애락에서 벗어나려면
상거래를 그만둬야 합니다.
손해와 이익의 관점에 서지 않으면
윤회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무조건 상거래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로서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사람은
상거래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이익을 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윤회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게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거래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무주상보시’란 내가 뭔가를 할 때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뭔가를 하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바라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핵심이에요.
내가 내 손으로 얼굴을 씻고 나서
얼굴한테 뭔가를 바라지 않듯이,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일을
나의 일로 삼아서 하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가 안 된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일반 사람인 거예요.
모든 사람이 다 상거래를 하면서 살아가니까요.
그러니 질문자도 상거래를 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냥 보통 사람인 거예요.
그러나 해탈이 목표인 수행자라면
상거래를 멈춰야 합니다.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면
상거래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상거래를 하는 세상에 익숙해져 살아가기 때문에
상거래를 안 하기가 어렵죠.
사실 정토회도 자원봉사로만 운영한다는 원칙을 지켜나가기 위해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들의 관계를 상거래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로 설정을 했기 때문에
전부 자원봉사로 정토회를 운영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해주셨기 때문에
정토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정토회의 규모가 커지면
전문가들을 필요로 하는 분야가 많아질 겁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상거래하는 의식이 매우 강합니다.
비전문가들은 봉사를 하기가 그나마 수월한데
전문가는 상거래에 익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원봉사를 하기가 힘들어요.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거나 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하나를 발표해도
사회에서 고액으로 임금을 주기 때문에
자원봉사로 일을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조직이 작을 때는
전문적인 영역이 크게 필요가 없지만,
조직이 커지면
전문적인 영역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집니다.
방송도 전문적인 영역이고
영상 편집도 전문적인 영역이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유튜브에서 수익을 많이 발생시켜서
전문가를 고용하는 비용을 감당하면 되지 않느냐고 제안을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정토회가 더 이상 수행 단체가 아니라 회사가 됩니다.
사람을 고용해서 운영하면
아주 효율적인 회사가 될 수 있겠지만,
정토회의 핵심 가치인
수행 단체라는 정체성을 잃게 됩니다.
그것처럼 질문자는
작은 가족 회사를 운영할 거예요?
아니면 사랑의 공동체를 운영할 거예요?
이미 부부로서 동업은 시작한 거예요.
동업자한테 ‘나는 일을 많이 했는데, 너는 일을 적게 했다’ 하면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
아예 동업을 깨든지
아니면 가족 회사를 사랑의 공동체로 바꾸든지
이제 질문자가 결정을 하세요.
누구나 질문자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모두가 무주상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괴로움이 없는 해탈을 목표로 한다면
상거래를 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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