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게 제일 중요한 얘기인데
아는 게 아니라, 되는 게 중요해요.
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벌써 생각이 안다는 거예요.
알려면 누가 알아요?
생각이 아는 거지.
나라는 것도 생각에 의지한 거니까.
그런데 옛날에 그 조사라든가 선지식들 얘기를 들어보면
“이건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다.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다.”
뭐 이런 얘기를 자꾸 한단 말이야.
그런데 아는 게 아니라 되는 거라고 했다는 거는
무슨 말이냐면
생각으로 진리자리를 대상화해서 아는 게 아니고
내가 그게 그냥 돼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
여러분, 이걸 듣습니까?
*!
듣지요? 들었지요?
이걸 듣는 자리가 진리자리다.
제가 좀 전에 그런 말을 했죠?
성품자리다. 그죠?
그럼 여러분은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를 하잖아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
이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이 아니에요.
이 소리는 달이 아니라, 진리가 아니고
이걸 통해서 이 배경 자리를 드러나게 하는 거라고.
여러분 성품 자리를.
그러면 여러분이
“그렇구나, 이걸 듣는 게 성품이구나.”
그럼 이건 해오야.
이게 증오가 아니라고.
이게 바로 아는 거에 떨어지는 거예요.
여태까지 여러분은 ‘아는 거’에 머물렀어요.
이제부터 ‘되는 거’로 내가 오늘 안내를 하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안다’는 것은 뭐냐 하면
미세한 생각을 법이라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법상인 거야.
여러분 여기까지 끌고 오기도 힘들지만
이걸 버리고 또 넘어가게 하자니까
나도 힘들어요.
저 말 안 듣는 소 떼들을 때리지도 않고 잘 끌고 가려니, 힘이 안 들겠어?
때리면 또 때린다고 욕할 것이고
비난하면 또 욕한다고 할 것이고.
이거 세웠어요.
“이거를 보는 자리가 그 자리입니다” 하면
여러분은
“아 그렇구나” 그럼 이것도 미세한 생각이야.
정보를 여러분이 이해한 거예요.
정보를 이해했다고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깨달음의 참맛을 몰라.
미세한 생각으로 자꾸 저장만 하고 있어.
“그렇구나, 알았어 알았어”
아는 게 아니라 내가 되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되는 건 뭐냐 하면
이 허공자리하고 딱 그냥 하나로
완전히 모든 것이 허상임을 정견해서 내려놓으면
그냥 그 자리가 나한테 쑥 들어와 버려.
원래 그거니까.
그걸 계합한다, 하나된다 하는 거예요.
그랬을 때 우리는 아는 게 아니라 돼요.
사실은 돼 있지.
따로 된다고 하는 말도 틀린 말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왜 그런가?”
“아 그렇구나”
제가 선문답 하다 보면
자꾸 “왜 그런지 설명해 봐라” 이런 말 하잖아요.
그럼 거기 또 속아서
뭐가 어떻고 어쩌고 이렇게 설명을 해.
그럼 내가 참,
“요 마귀를 어떻게 때려 죽일까?” 난 그 궁리를 합니다.
그게 다 생각이거든.
왜 생각이 힘이 없느냐 하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봐요.
여러분이 우리의 업력이나 우리의 어떤 그 업습이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큰 역경계들이 분명히 살다 보면 와요.
아주 큰 경계
예를 들어 무슨 내 배우자가 갑자기 죽을병에 걸렸다
아니면 자식이 갑자기 죽었다든지
아니면 막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위태위태한 순간에 있다든가
또는 내 재산이, 엄청난 재산이 한두 푼도 아니야.
그냥 재산이 그냥 전체가 날아갈 판인지 부도가 날 판인지 이런 상황이라든가
부모님이 갑자기
병원 가서 전화 왔는데
“지금 곧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 빨리 오세요” 라든가
이런 상황에 있을 때
여러분들이 법에 대해서 아는 게 무슨 도움이 돼요?
그거 도움이 안 돼.
그게 다 아는 거에 불과하다는 거야.
진짜 자기가 이 자리에 계합하면
그 어떤 상황에도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돼.
[태연자약]할 수 있어야 돼.
왜?
내가 없으니까
모든 게 생멸하는 오온의 작용임을 보니까.
여러분이 그 정도의 정견력과 법력을 갖지 않으면
깨달은 게 아니에요.
정견은 그래서 모든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다 환영임을 금강경에 있죠.
여몽완포영이란 말이지.
“모든 게 환영이라는 걸 끝까지 봐라.”
그래서 우리가 지혜가 생기는 거예요.
“모든 것이 나를 쥐고 흔드는 환영이다.”
근데 그 환영, 그것만 봐서는 안 되고
대승불교는 자꾸 그 얘기만 하는데
그것만 봐서는 안 되고
[법력]이 있어야 돼요.
[법력]이라는 건 뭐냐?
이 세상에 내가 무서운 게 없어야 돼.
시어머니가 무섭잖아요.
여러분, 시어머니를 귀엽게 볼 수도 있어요.
직장 상사 무섭잖아요.
그건 지 마음이지, 직장 상사도 지 집에 가면
자기 마누라 앞에 고양이 앞에 쥐야.
법력이라고 하는 것은
또 예를 들어
내가 무슨 어떤 욕망을, 감당 못하는 욕망
그게 뭐가 됐든
담배를 못 끊는다라든가
식욕이 됐든, 성욕이 됐든, 충동심이 됐든 뭐 어떤 거가 됐든 간에
자기의 욕망을 이렇게 딱 인내하고
그거를 넘어서는 내적인 힘이 없으면
내공이라고도 하죠.
그 힘이 없으면
결국은 그 욕망이 나를 쥐고 흔들거든.
그러니까 공부하는 사람이
그 자기를 쥐고 흔드는 그 지배하는 그 욕망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공부하면 어떻게 되냐면
고만치만 도가 돼요.
고만 치만 돼.
그거를 넘어선 법력이 없어.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그 욕망이 죽어서,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그거 따라가게 돼 있어.
그럼 다시 윤회하는 거야.
딱 그만치 가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불교의 이 깨달음 공부가
여러분이 견성 이후부터 천차만별로 경지가 나뉘는 거예요.
경지가 뭐 그게 다 하나지 무슨 뭐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냐?
그런 말 하면 다 사이비다, 이런 말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거는 머리로 하는 공부고
실제로는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나한테 왔을 때
그럼 나는 그거에 대해서 정견도 못하고, 법력도 없다는 얘기야 .
어느 날, 속이 좀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당신 위암입니다, 폐암입니다, 간암입니다.
앞으로 한 두세 달 살고 돌아가시겠습니다. 마지막 준비하세요.” 이랬을 때,
“그렇군” 하고 나올 건지
그 자리에서 힘이 확 빠져서 주저앉아서 걸을 힘도 얻게 될지.
이런 거 한번 여러분이
정말 이 깨달음의 정견과 법력이, 그 마음의 에너지 힘이
모든 거를 초월할 수 있어야 돼요.
그게 모든 거 위에 있어야 되고.
그 모든 것이 다 그 안에서는 그냥 놀이가 돼야 돼.
소꿉장난 놀이처럼 돼야 된다고.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에요.
그게 성불의 길이요.
그래야만 여러분이 윤회도 안 할 뿐만 아니라
완전한 해탈을 할 수 있고
5차원에 존재할 수가 있어요.
내가 갇혀 있는 세계를 깨고
이 세계 바깥으로 나갈 수가 있어요.
마스터에서는 그걸 배울 거예요.
정견과 그다음에 법력을 배우는 건데
법력을 우리가 너무 힘이 약한 중생이다 보니까
이런 중생한테 자꾸
참을 수 없는 걸 참아라 하면은
그거 참...
기독교는 그런 면에서 현실과 타협을 잘했어.
참을 수 없는 거 어떡하냐?
할건 그냥 하고, 다음에 또 용서 빌면 되고
주일마다 돌아오니까 용서하고
그다음에 또 가서 또 하고, 또 용서 빌고.
근데 불교에서는 그거는
그 차원을 넘어서지 않으면 너는 완전한 해탈이 못 되는 거야.
이거 어떡하겠어?
근데 이거 딱 한 번만 해보면 넘어설 수 있거든.
딱 한 번만 해보면 되는데
그 한 번을 못하는 거예요.
어린애들 데리고, 어린 10살 안 된 애들 데리고
병원에 가서 주사 맞혀봐.
다 울어 다 울어.
근데 한 10대쯤 되면 그때부터 안 울기 시작해.
12~13살 때부터
눈물을 글썽이지만 참아.
그 나중에는 태연자약 하게 맞아.
여러분 백신 주사 맞은 분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울면서 맞은 분 손 들어봐?
없잖아.
이와 같이 부처님 보시기에는
여러분들이 주사 맞는 거 무서워서 우는 애와 같은 거예요.
자기 딴엔 다 컸다고 하지만
부처님 보시기에는 “저거 언제 크나” 싶은 거야
법력이라는 건 그래서 이거예요.
한마디로 [내가 나의 그릇이 감당 못하는 것을 감당하기 시작]하는 게
[법력]이야.
그거를 성취하는 길은
오직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정견]하는 수밖에 없어.
정견하면 그 힘이 생기기 시작해.
여러분이 무서워했던 사람 앞에서
끝까지 냉철하게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으면
그다음부터 그 사람은 안 무서워지기 시작합니다.
한 번만 그러면 그다음부터 그 사람은 안 무서워.
근데 ‘무섭다, 무섭다’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진정한 해탈은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에요.
그렇지만 또 먼 길도 아니야.
그냥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성취되는 길이에요.
이거를 [공부하지 않는 공부]라고 그래요.
그냥 삶 속에서
그냥 정견을 하되 끝까지 하는 거야.
끝까지 하면은
그거를 참고 인내하는 육바라밀의 법력이 생겨요.
부처님이 괜히 복잡하게 해서
나중에 무슨 법사들이나 스님들이 밥 벌어 먹고 살라고
육바라밀, 팔정도 만드신 게 아니고
정견을 끝까지 하면
육바라밀, 팔정도가 저절로 돼요.
그러면서 법력이 생겨.
남편이나 마누라가 속이 뒤집히는 소리를 할 때
옛날 같으면
팩 토라지거나 화가 나서 나도 한마디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상대방 등 두들겨 주면서
“아유, 내가 잘못했어”라든가
“오늘 좀 기분이 언짢으신 모양이네” 라든가
이렇게 여유 있게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러분이 아직도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에요.
과거의 나를 못 벗어난 거야.
아시겠죠?
그러니까 그런 내면의 법력 내공과 정견력이
같이 겸비되지 않고는
여러분은 그냥 알음알이에 끝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거는 생사를 못 건너갑니다.
그런 식으로 법상과 깨달음을 알음알이로 하면
선문답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할지 모르겠는데
100개를 풀어도 소용없어요.
그냥 그건 말장난하다 끝나는 거야.
왜?
생각 속 놀음이니까.
선문답이 생각 속 놀음이 아니고
정말 이 자리가 돼야 돼.
그래서 정말 이 자리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선문답 가지고는 안 되더라고.
내가 선문답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껴요.
그거는 제일 좋은 게 뭐냐?
정말 삶의 역경계가 와서 힘든 경계가...
내가 요새 힘든 경계가 많이 와요.
역경계가 정말 많이 와.
그런데 뭐 [도고마성]이라는 말이 있어.
도가 높아지면 마도 성한다고.
근데 딱 진짜
옛날에는 어쨌든
“그런 일은 나한테 안 일어나겠지” 하는 일들이 일어나.
그런 일을 감당하면서 그만치 커지는 거예요.
사과 맛을 우리가 상대방한테 전한다, 그러면
사과 맛을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사과 맛이 제대로 전달이 돼요. 안 돼요.
안 되죠
제일 좋은 건 뭐예요?
사과를 하나 주는 거야.
“먹어라”
그게 사과 맛이야. 그렇죠
그런데 그 사과 맛은 새콤달콤하고
아주 그냥 말로 더 이상 잘 설명할 수 없게 기가 막히게 설명을 했어.
“이 정도면 되지 않았냐?” 라고 하면
그걸 사과 맛을 본 사람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거리겠지만
사과 맛을 못 본 사람은
또 생각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안 된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여러분
***! 이 소리하고
***!
이게 같은 거예요? 다른 거예요?
내가 이 자리를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데
여러분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여러분의 법신자리를 전하고자 하는데
*!
이거로 전한 거 하고
*!
이거로 전하는 게 같아요? 달라요?
포인트 님, 답변해 봐요.
그러니까 생각이 떨어진 거야.
즉
*!
손뼉을 쳤다.
“저건 그런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포인트 님 생각 속에서 이미 정리가 돌아갔어.
*!
이것도 가르치고
그 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같지.
지금 생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거야.
즉 이미 지나간 과거 생각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이미 지나갔어.
*!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라고 하면
포인트님은
“그 자리가 진리를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답변한 사람하고 똑같아.
근데 진짜 깨달은 사람은
*!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하면
*!
이 자리입니다라고 해버려.
이게 미세한 차이가 있어.
생각으로 아는 사람은
“둘이 같은 자리인데요.” 하는데
진짜 깨어난 사람은
같다, 다르다를 떠나 있어.
감 잡았죠?
과거 생각 속에 빠져 있으면 안 돼.
그러면 진짜 알맹이를 놓치고 껍데기를 붙들고 있는 거야.
자기 생각의 내용물을.
그래서 법상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요게 선문답할 때 보면
내가 제일 벗기기 힘든 부분이야.
끝까지 이거 가지고 대드는 사람이 있어요.
앞에 있으면 한 대 때렸으면 좋겠어.
왜 틀렸냐고 그걸 따지고 드는 거야, 오히려.
여러분이 ‘아이휴’ 그러면 난 뭐라고 그래야 돼?
...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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