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지금 주시는 질문을 들으시면 다 아시겠죠? 대부분 답들을 다 정확히 알고 계세요. 양심이 다 똑같이 계시기 때문에요. 지금 이런 거 어떻게 연구하면 좋겠습니까? 이런 주제가 하나 이제 철학적 주제입니다. 철학자들이 연구하는 게 밥 먹고 저런 걸 연구해요. 타자를 사랑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이런 책을 한 권, 수십 권을 쓰고, 그걸 또 읽으시고. 이런 게 현실인데 제가 영적 진리를 탐구하자고 하는 건요. 여러분 한 분이 철학자 되시자는 얘기거든요. 그럼 철학자 되시려면 이런 거에 대해서 자명한 판단을 내리실 수 있어야겠죠. 그러려면 영적인 실험을 좀 하셔야 되요.
명상을 좀 하셔가지고 자기 내면에서 그 최소한 여러분의 에고성. 에고는 개체적 자아죠. 나하고 남을 다르다고 보는 자아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나하고 남이 분명히 다릅니다. 참나에 들어가면 여러분도 분명히 겪으시겠지만 [몰라, 괜찮아]하고 나와 남을 구분을 딱 안 한 상태에서 느껴지는 자아이기 때문에 이때는 절대적 자아라고 많이 하는데요. 여기서는 나하고 남이 즉 他者타자라는 게 없죠. 他者타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에고)서는 他者타자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까지 실험을 통해서 알아내셔야 되는 겁니다. 이거를 그냥 머리로 하는 철학자 분들은요. 많이 계시겠지만 그분들은 본인도 찜찜하실 거에요. 얘기하면서도. 진짜 그럴까? 하는. 내 머리에는 그렇지만 진짜 그럴까?
만약에 제가 이걸 다룬다면요. 철학적으로 어떻게 다루냐 하면 저 같으면 에고의 존재와 참나의 존재를 먼저 확인할 겁니다. 명상을 해보시면 나의 순수한 자아. 나의 진정 순수한 자아에선 나와 남이 없다는 걸 아실 겁니다. 그래서 이 에고로 또 돌아보면 나와 남이 철저히 나뉜다는 걸 아실 겁니다. 질문 주신 것도 남에 대한 우리가 이제 철학자들이 늘 얘기하는 自他一如자타일여. 성인들이요. [나와 남을 둘로 보지 마라.] 했는데 이걸 여기다 적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참나에선 남이 없어요. 에고에서는 남이 있어요. 에고에서는 남이 있는데 이미 나라는 게 나와 남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나라는 게 나에 대한 사랑이 커서 이기적이죠.
그래서 나에 대한 사랑이 크기 때문에 남을 똑같이 사랑해준다는 건 어려워요. 현실적으로. 그렇죠? 방금 말씀하신 거에 다 답이 있는데. 그래서 방금 그 질문하신 것도 이런 게 자명하다고 느끼셨습니까? 말씀하셨겠지만, 그 자명한 걸 더 자명하게 분명히 해보세요. 답은 이 안에 있습니다. 요것도 명확한 진리이죠. 이것도 명확한 진리죠. 진리끼리 만나면 좋은 답이 나옵니다. 그럼 뭘까요? 즉 문제는 이겁니다. 내가 현상계에 오면 나는 세상을 내 위주로 해석하기 때문에 절대적 타자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남이라고 얘기해요. 저한테. 완전한 남도 없어요. 사실은. 현상계에 오면. 왜냐하면 여러분도 제 마음에 들어온 여러분이기 때문에.
여러분 순수한 여러분이라는 게 아니고 서로 얽혀있습니다. 여러분 마음 안에 제가 들어가 있죠. 그럼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저에 대한 그 이미지나 그 느낌들이 이미 같이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남을 바라보기만 해도 서로가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그런데 결국은 내 위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를 각자가. 각자가 자기 위주로 해석하니까 자기의 이기심을 조금만 눌러주면 남을 역지사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진리이죠. 내가 내 에고성을 조금만 이기적인 마음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남하고 훨씬 잘지 낼 수 있다. 하는 것도 아시겠죠.
상대방입장을 한번만 역지사지해줘도 남하고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되죠. 이것도 실행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맞다는 얘기를. 집에 가서 가족 분들한테 말 한마디 한번 어느 날은 나쁘게 한번 해보십시오. 어떤 결과가 벌어지나. 그 다음 날 가가지고 상대방 입장을 배려한 말을 한번 해보십시오. 실험을 해보세요. 진짜로. 철학자는 실험을 해보는 겁니다. 과학자들만 하는 게 아니고. 더 엄격해야 되요. 철학자들이 하는 실험은. 무형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요. 자~ 그렇게 해보시면 이런 말들이 다 자명하다는 게 나오시면 자타일여가 뭔지 나오실 겁니다. 절대계에서는 나와 남이 없고 현상계에서는 나와 남이 있고.
내 위주로 세상을 해석하다 보니까 분명히 남한테 섭섭하기가 쉽고요. 완벽하게 남을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현상계에서. 그럼 참나의 마음을 이해하겠거니 하고 참나로 들어갔더니 남이 없어져버려요. 어떡합니까? 이 중간지대에 답이 있는 겁니다. 참나의 힘을 빌어다가 결국에는 참나의 힘 가지고 뭘 할 수가 있나요? 에고의 힘을 누를 수가 있습니다. 내 에고에. 내 욕심대로 하려는 힘을 누르시면 결국 남의 입장을 배려해주는 이게 자타일여입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타일여는 이거밖에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자타일여를 얘기할 때 공자님이 뭐라고 했죠? 恕서. (똑같을 如여)입니다. 나와 남을 똑같이 보는 마음으로 살아라.
恕서는 뭐라고 했냐 하면 공자님이 [내가 당해서 싫은 걸 남한테 하지 마라.] 라고 했습니다. 이건 하실 수 있죠. 자타일여라는 게 이겁니다. 그 사람을 나랑 똑같이 사랑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요. 에고의 조건에서는. 참나로 들어가 버리면 남이 없고. 에고로 오면 나와 남이 선명해지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해요. 그러면 결국 이 성인들이 요구하는 자타일여는 내가 내 입장을 조금 낮추고 상대방 입장을 더 배려해 주는 노력입니다. 그냥. 그것만이 인간이 살 수 있는 답입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했죠? [내가 대접받고 싶은 그대로 해줘라. 먼저.] 자~ 이거 잘 이해하셔야 되요.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해주라고? 그건 이겁니다. 내가 지금 저 상대방의 처지라면 좀 더 풀어 드릴게요. 내가 지금 어떤 상대방한테 말을 하려고 하는데, 내가 저 상대방이라면 요런 소리는 듣기 싫겠다 하는 걸 배려해서 감안해서 해주라는 겁니다. 아니면 이런 대접을 받고 싶겠다 라는 걸 장사할 때 기본이죠. 뭐죠? 손님이 뭘 원하는가를 먼저 파악해서 해라. 돈 될 때는 귀신같이 하는 거, 이게 恕서죠. 이거를 그냥 돈 안 되는 일에도 적용하시려면 참나의 힘으로 에고를 조금만 눌러서 쓰시면 됩니다. 이걸 잘하시면 성인이에요. 그래서 자타일여에 대해서 너무 완벽한, 나와 남은 둘인데 어떻게 하나로 만들 방법이 없습니다. 예.
그래서 지금 제가 방금 하나 보여드린 게요. 이런 식으로 철학을 하시는 겁니다. 영적 탐구를 할 때 저 같으면 저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분명히 안 되는 거 분명히 되는 걸 가린 뒤에 자명한 것들끼리 엮으면 그 안에서 이제 우리가 살아야 할 방법이 나옵니다. 그래서 엄한 말에 휩쓸리지가 않습니다. 누가 와서 뭔 얘기를 해도 이게 실존이고. 제가 실험해본 결과 이게 자명했기 때문에 이 방식대로 저는 대처할 겁니다. 아시겠죠? 나와 남은 분명히 다르고 내가 그 사람을 다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대로 최선을 다할 뿐이죠. 네. 이해되시죠?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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