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런 문제는 계속 지금, 깨어서 그거 자명하게 하는 게 저희는 수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행 따로 있고 그런 학당 운영일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절처럼 이판사판이 따로 있지 않아요. 우리는. 이판이 사판 못하면 이판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참선만 하면 뭐합니까? 일을 손도 못 대는데, 그런 참선은 죽은 참선이죠. 참선을 잘했으면 육바라밀이 자유자재로 나와야죠. 육바라밀이 자유자재로 나와야 사판을 해결하는 거 아닙니까? 맞는 거 아닙니까? 일처리가 얼마나 어려운데. 이판보다 사판이 더 어려워요. 이판은 방에 앉아서 책과 자신의 참나와 양심만 연구하면 되요. 아~ 진리는 그렇게 생겨먹었구나. 사판은요? 내거 훔쳐가려는 수많은 욕심꾼들 사이에서 진리를 구현하는 거기 때문에 훨씬 어렵습니다.
두 개가 둘로 대립하면 안 되죠. 이판은 (진리 이)자 아닙니까? 사판은 (일 사)자고. 절에서 행정 맏는 분들이 사판이고 참선하는 분들이 이판이죠. 주로. 그래서 이판, 사판. “이판사판” 이러죠. “이판사판이다.” 뭐~ 이런 말. 그 어원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게 뭔 말이냐 하면, 그 어원을 지금 분석을 잘 못합니다. TV에서 이판사판의 어원을 분석하는데 제가 납득되지를 않더라고요. 거기서. 제가 한번 생각해 봤어요. 이판사판이라는 말이 뭔 말이냐? 어디서 본거는 아니고. “이판사판”이라 그러죠? “이판사판인데 한번 해보자.” 이판 아니면 사판이라는 얘기죠. 절대계 아니면 현상계고. 현상계 아니면 절대계니까. 그렇죠? 이판 아니면 사판이다. 한번 해보자. 그런 말로 주로 쓰이는데, 이판사판은 절대계와 현상계입니다.
그래서 우리 화엄경에서 이법계, 그게 리법계를 주로 한다는 거죠. 이판, 이 말하는 진리라는 건 이법계, 절대계를 말합니다. 이법계=절대계. 사법계=현상계. 일 사자. 그다음에 두 개가 더 있죠? 이사무애법계. 진리가 그대로 현실화되는 세계. 여러분도 만약에 육바라밀이 제대로 닦겠다면, 이법계에서 끝나면 안 돼요. 제대로 진리를 닦았다면, 그대로 이법계에서 사법계로 표현이 되어야 됩니다. 이에서 사로. 여러분이 보시라는 진리를 알았다면 보시가 나와야 되요. 그게 이사무애법계입니다. 아는 게 그대로 현실화 되는 세계. 절대계에 있는 진리가 현상계 그대로 드러난 세계. 자연계는 다 그러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문제에요. 인간만 그렇게 안 돼요. 인간의 심보에 무지와 아집 때문에 그 놈 때문에, 이법계가 진리에 있는 게 현실로 안 나와요.
그래서 진리가 현실로 나오게 하려면 인간인 경우에는 수행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수행을 하는 사람은 나오고, 수행을 안 한 사람은 안 나와요. 어떤 진리가 나오느냐? 아주 저차원적인 진리만 나와요. 먹어라. 싸라. 그렇죠? 번식해라. 뭐~ 이런 것만 표현 정말 잘합니다. 그러니까 이 같은 진리인데, 고차원적인 게 있고 저차원적인 게 있거든요. 즉 식물이나 동물도 표현할 수 있는 진리가 있고, 인간만이 육바라밀이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어떤 고귀한 불성을 지닌, 불성을, 동물은 식물도 다 지녔지만, 불성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인간만이 표현할 수 있는 진리가 있는데, 그걸 못 드러내 버리면, 인간으로서 자격이 없는 거죠. 그래서 이법계와 사법계, 이사무애법계라는 말이 자연계에서는 그냥 일어나는 일인데, 인간계에서는 쉽지가 않습니다.
수행을 안 하면 안 일어나요. 이사무애가 안 돼요. 진리가 현실로 안 나타나요. 더 어려운 게 그 다음 단계가 사사무애법계라고 현실과 현실이 서로 걸림이 없다는 겁니다. 이거는요, 우리가 진리를 완전히 드러내고 사는 삶을 말하는 거죠. 육바라밀을 늘 따르고 살면요,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그런 육바라밀의 원리가 그대로 우리 몸으로 구현될 때는요, 우리 몸이 그대로 진리가 돼 버리는 거를 사사무애법계라고 그래요. 지금 제가 보시하나 펼치고 이런 말씀 하나 드리는 이게 그대로 진리라고 그래요. 이해되십니까? 사사무애법계라는 거는 진리가 현실로 표현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일일이 그대로 진리라는 뜻입니다. 진리와 현실이 하나잖아요. 제가 보시의 마음을 가지고 어떤 행을 했을 때, 그 드러남이, 진리가 그대로 드러난 거 아닌가요?
이치가 그대로 드러났다고 봤을 때, 지금 우리가 하는 이렇게 나누는 말, 행동, 눈빛, 표정 하나하나가 그대로 진리라는 겁니다. 사사무애법계가 지상천국을 말하는 겁니다. 지상의 정토가 이루어지면 지상에 있는 현상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그대로 진리의 구현일거 아닙니까? 예. 그런 의미를 담습니다. 그래서 이사무애랑 사사무애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이사무애가 제대로 굴러가면요, 거기 또 사사무애라고 하는 겁니다. 현상현상이 그대로 진리고, 그래서 우리가 현실에서 그대로 천국을 사는 법은 깨어서요, 생각감정오감이라는 현상계, 일들, (일 사)자. 일들을 거기에 진리를 입히는 게 우리가 할 일이에요. 그러기만 하면, 이 생각감정오감이 버려야 할 무상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진리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생각감정오감을 진리로 못 만드시는 게 문제지, 생각감정오감을 못 버려서 고민이시다. 하는 분들은 지금 전혀 공 무애, 맥을 못 잡고 계시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생각감정오감의 진리를 담을 거냐? 모른다만 하고 계시면 안 되고요, 참나를 늘~ 참나를 인식하고 참나랑 하나 되는 거는 가장 기초적인 공부지만, 지금은 생각감정오감을 진리화 하려면요, 진리의 세계만 있어서는 안 되잖아요. 사의 세계에 나와야 되잖아요. 사의 세계에 나오는 법이 여러분 생각하나 일어날 때, 생각을 깨어서 느껴주는 겁니다. 생각이 하나 일어났어요. 생각을 제가 깨어서 생각을 느껴요. 그러면요, 이 생각은 사실은 나랑 별도로 있는, 생각이 아니라 참나의 작용이 됩니다.
깨어서 알아차리는 생각은요, 그대로 참나의 작용이 되어서 이 생각을 허투로 안 쓰고, 올바른 방향으로 깨어서 양심에 맞게만 굴려주면 이게 이사무애가 되면 동시에 사사무애가 되는 겁니다. 이놈이 그대로 진리가 되 버려요. 둘이 아니죠? 이 사에다가 진리를 입히는 걸 이사무애라고 하는 거고요, 요놈이 이미 진리가 되어버리면 요놈이 사사무애입니다. 진리들끼리 지들끼리 노니까, 생각감정이 만나도 전혀 충돌이 안 나고 잘 돌아가죠. 진리의 생각, 진리의 감정들이 만나는데 왜 싸웁니까? 이해되세요? 진리의 생각, 진리의 감정을 내가 세상에다가 던지는 게 그대로 바라밀행이에요. 여러분이 가만히 앉아계셔도 한 생각, 한 감정 계속 올라오고 계시죠?
추잡한 생각, 그 거친 감정, 욕망, 탐욕 이런 게 올라오는 걸 방치하고 계시면요, 여러분들은 계속 여러분들이 탐진치의 발전소가 됩니다. 지구에다가 탐진치를 계속 뿌리고 계세요. 하루 종일. 보살은요? 아무 일이 없어도 지혜와 자비를 뿌리는 게 목표죠. 생각 하나하더라도 깨어서 생각을 딱 잡아가지고, 마음대로 못 굴리게 진리의 맞게 굴리게 바꾸어버리면, 이 사를 생각이라는 일 하나를 갖다 깨어서 딱 알아차리면 이게 진리가 입혀지는 겁니다. “너 자명해? 양심에 맞아? 그럼 그렇게 해봐.” 하면 이 놈이 이사무애가 되면서, 동시에 이 놈 자체가 진리 덩어리가 되어서 돌아다니면서 좋은 하니까, 사사무애가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이렇게 사법계라고 하는 건데, 이법계 사법계 이사무애 사사무애라는 걸, 무애라는 건 장애가 없다는 거거든요?
이치랑 진리랑 일이랑 장애가 없어야 이사무애법계고, 일들끼리 서로 장애가 없어야, 진리에 이미 맞는 일들인데 왜 장애가 있겠어요? 이렇게 이해하시면 내가 혼자 앉아서 아무 일 없어도 보살도 할 수 있습니다. 앉아서 한 생각 올라오는 걸 깨어서 알아차린 다음에 자명함을 응원해주고 자명하지 않으면 잘라 버리는 겁니다. 요 짓만 하고 있어도 우리가 중생계에 좋은 까르마를 이미 짓고 있는 겁니다. 재미있으시죠? 이게 불교의 제일 핵심 되는, 우주에는 4가지 진리의 세계가 있다. 4가지 차원의 세계가 있다. 사실 하난데, 쪼개보니까 4가지 인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생각에 그걸 다 표현할 수 있어요. 한 생각이 깨어서 양심에 맞으면 그 안에 다 들어있는 겁니다. 4가지 법계가. 이 4가지 법계를 엄한데서 찾으니까 구현이 안 되죠.
지금 자기 한 생각을 깨어서 이 생각이 나랑 별도가 아니라, 날 괴롭히려는 놈이 아니고, 단순히 무상고 무아가 아니라, 참나의 작용이 됩니다. 깨어서 알아차리는 생각은 나랑 이미 둘이 아니에요. 이사가 무애가 되요. 그다음에 여기에 진리에 맞는지 잘 체크해서 진리에 맞는놈을 세상에 내보면 이 놈은 이미 진리 자체이기 때문에 사사무애가 되는 겁니다. 다른 일들이랑 만나서 일을 다 해결하고 다녀요. 그 생각하나가 불덩이가 되어서 우리의 나쁜 생각들을 다 불살라버리고 없애버려요. 여러분이 그 뭐죠? 혜민스님 명언, 법륜스님 명언, 이렇게 읽는 이유가 뭡니까? 좋은 생각을 들어가지고 내 나쁜 생각하고 좀 바꾸고 싶어서 그럽니다. 내 업장을 털고 싶어서 좋은 말을 자꾸 찾으시는 건데, 그 말만 들어선 업장이 안 지워져요.
왜냐하면, 그 말을 가지고 명상을 하셔야 업장을 지웁니다. 여러분이 명상을 하셔서 “그 말이 진리에 맞냐?” 하고 스스로 자기내면에서 진리가 맞다라고 인과해야만 자기 업장이 지워져요. 남의 말을 가지고는 뭔가 맞기는 한데, 자명하기는 한데, 그 강도가 약해서 내 업장이 잘 안 지워집니다. 그래서 남의 말도 좋죠. 경전의 말도 다 남의 말이죠. 제 얘기도 남의 말이고. 그래서 남의 말, 그냥 믿지는 마시고, 명상을 하세요. 깨어서 그 남한테 들은 생각일지라도 깨어서 또 그 생각을 탁~ 느끼면서, 나랑 둘이 아니다. 느끼면서. 이 생각에 담긴 진리를 온 몸으로 인과를 한번 해보세요. “자명하다.” 아니면 “찜찜하다.” “어느 부분이 찜찜하다.” “뭐는 자명한데, 뭐는 좀 찜찜하다.” 이렇게 정확히 이해하고 나시면, 불순물 털고 딱~ 자명한 작품을 내 말처럼 또 세상에 내보낼 수가 있고, 그 말이 또 나쁜 생각들을 다 없애고 다닙니다.
또 남들이 해 놓은 그런 좋은 말들이 경전에 담겨 있다가 우리랑 만나면 또 우리 업장을 지워주는 겁니다. 그런데 제대로 내 업장을 지우려면 나도 같이 감응해 줘야 사사무애가 되면서 제대로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나는 공부 안하면서 좋은 말만 들으면 내가 바뀔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제 강의를 통해서 그런 일이 잘 일어나게 최대한 도우려고 연구하고 강의하는 겁니다. 그래서 얻은 거는 뭐냐 하면요, 제 아이디어가 제 말이 진리 자체에 가까울수록 더 쉽게 다른 분들의 공감을 끌어내서 그 분한테서 금방금방 자명하다. 인과를 받아낼 거 아닙니까? 항복을 빨리 받아내면 저쪽에서 업장이 더 빨리 지워집니다. 말이 자명하면 더 빠르겠죠?
그런데 좋은 말도 어렵게 얘기하면요, 긴가민가해가지고 저쪽에서 변화가 더디고, 좋은 말도 어려운 용어 빼고 쉽게 설명해서 버리면, 그쪽입장을 배려해서 제가 해드리면, 반응이 화학반응이 빨리 일어나죠. 저쪽에서도 저항할 말이 없으니까 금방 받아들이면서 그쪽에 있는 나쁜 생각들을 바꿉니다. 결국은요, 본인의 업장 터는 거 본인이 허락을 해야 되요. 제 얘기는 뭐냐 하면, 허락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그런 말들을 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감정을 제가 표현했을 때, 보살도가 쉬워진다는 거, 사사무애의 이치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도 쉽게 쉽게 문을 열고, 변화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사사무애의 진리에요. 내가 던진 진리가 아니라, 내가 던진 말이나 행동, 진짜 일, 생각감정오감의 그런 현상이, 현상이 현상을 바꾸어버리는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그 현상에 내가 일으키는 현상에 진리를 담아야 되요. 깨어서.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다 예술가시고, 작품을 매일 매일 작품을 만듭니다. 자녀가 까불어서 한마디 욕해주는 것도 지금 작품을 하나 만드신 건데, 이 작품이 -작품일지 +작품일지는 그걸 인과를 보면 알겠죠. 내가 무슨 의도로 인과를 지었는지 보면 미리 예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감정에 못 이겨서 한 거면, 그 만한 결과를 나을 거고, 내가 그 자녀의 마음과 미래를 다 계산해서 인과를 계산해서 던진 말이면, 좋은 인과를 낳겠죠. 예. 이렇게 깨어서 내가 어떻게든 우리는 뭔가 현상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생각감정오감을 안하고 살 수가 없지 않습니까? 뭔가를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하는 일에다가 진리를 담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소승불교는 생각감정오감은 무상하니까 버려 버려라로 끝냈단 말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다가 더 진리를 담기가 힘들어지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원래 그런데 부처님은 좀 달랐던 게, 초기 불교는 소승불교랑 좀 구분해서 보세요. 부처님은 팔정도라고 해서, 생각감정오감에다가 “바르게 봐라. 바르게 말해라. 바르게 행동해라.”라고 했잖아요. 부처님도 현실을 바꾸는 걸 중지하셨던 거죠. 다만 부처님이 열반을 강조하시다보니까, 열반에 들면 굳이 팔정도가 의미가 없어지거든요. 빨리 열반에 들면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면 될 일을 왜 굳이 사법계에서, 일의 세계에서 내가 바르게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어서 아라한들은 그냥 열반에 취중하지 팔정도를 하려고 안합니다. 부처님하고 아라한들하고 차이에요. 그러다보니까 불교가 소승화 되었어요.
그래서 대승불교는 “아니다. 팔정도를 더욱 현실에 적용하는 버전인 육바라밀을 실천하자”라고 나온 겁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양쪽 면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었어요. 그런데 이중에 열반을 강조하면 소승, 팔정도를 강조하면 현상계를 바르게 바꾸는 걸, 개혁하는 걸 강조하면 대승. 이렇게 나오게 됩니다. 현상계를 버리면 된다는, 열반에만 들면 되지 않냐는 소승, 그런데 저희 학당은 다시 그걸 통합해서 열반에 드는 것도 중요하고, 그건 리법계를 이법계를 아는 거니까. 또 대승도 중요하다. 이법계를 알면 뭐하냐? 사법계를 바꿔야 의미가 있지. 다시 통합 쪽으로 이해하자는 게 학당의 입장입니다. 불교만 가지고 얘기하면 이렇다는 겁니다. 다른 종교 가지고도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지만, 불교 하나 가지고 봐도,
일류가 한 2천5백년 연구했던 수많은 머리 좋으신 그런 고승들이 연구했던 내용이 지금 이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으니까, 우리가 그 핵심만 빨리 이해하시고, 지금 빨리 깨어나서 빨리 자기 생각하나를 육바라밀에 맞게 양심에 맞게 바꾸실 수만 있으면, 그 안에 인류 3천년, 2천년의 지혜가 다 녹아있으니까, 그리고 이 우주 진리에서 길어온 그런 귀한 영감과 그런 창조력들이 여러분의 깨어서 한 생각 굴리는 힘에 다 표현이 되기 때문에요, 지금 이 순간 봐도 귀하고, 역사적으로 봐도 그게 아주 귀한 일이다. 이런 얘기를 드리고 싶어요. 잘 하시겠죠?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오늘도 수련하시고, 끝나고 또 말씀 나누죠. 열심히 하시고요. 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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