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르침의 맥과 선택 [00:32]: 선종사에서는 가르침의 맥이 존재하지만, 그 맥을 잇는 데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으며, 오직 사람만이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하나의 가문을 잇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일가를 이루었다는 증표이며, 이는 말을 타거나 걸어가는 것과 같은 선택의 문제라고 비유합니다.
- 혜능의 가르침 [01:28]: 혜능 스님이 입적할 즈음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대중들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묻자 "남은 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지만 올 때는 말 없이 오느니라"고 답합니다. 이는 생명의 순환과 자연스러운 이치를 강조하며, 혜능은 "마음의 땅이 생명 씨앗을 먹으니 가르침의 비를 만나 꽃이 피어나고, 스스로 꽃과 생명 씨앗을 깨우치니 깨달음의 열매가 저절로 맺는다"는 시를 남깁니다 [02:08].
- 남전 보원의 선문답 [03:33]: 한 스님이 방장실에 있을 때 무엇으로 표준을 삼는지 묻자, 남전은 "어젯밤 참경의 소를 잃어버리고 막상 날이 밝아 일어나 보니 등불을 잃어버렸더구나"라고 답합니다. 이는 잃어버림 속에서 생겨남이 있음을, 즉 사라지는 죽음을 볼 수 없으면 일어나는 생명도 볼 수 없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설봉과 조주의 선문답 [04:43]: 옛 개울물이 몹시 차가울 때 어떻냐는 질문에 설봉은 "눈을 부릅떠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고 답하고, 그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는 "입으로는 마실 수도 없다"고 답합니다. 조주는 이 말을 듣고 "콧구멍으로도 마실 수 없다"고 덧붙이며, 다시 질문을 받자 "쓰지", "죽는다"고 답합니다. 이는 죽음을 경험한 자만이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나타냅니다.
- 목주 존속 스님의 가르침 [06:40]: 목주 스님이 열반경을 강의하는 좌주에게 경전에는 없는 구절을 묻는 비유를 통해, 모든 길목에서 생명의 이어짐이 드러나며 문자 하나하나가 모두 생명의 기록임을 강조합니다. 생명책이 있는 곳이 천국이며, 천국은 눈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 황벽의 주먹 비유 [07:54]: 황벽 스님이 주먹을 움켜쥐고 "천하 노스님이 모두 이 주먹 속에 있다. 내 만일 한가닥 길을 터주면 그들은 자제해지겠지만 터주지 않는다면 손끝 하나 까딱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한 스님이 방회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느 가문의 곡조를 부르며 누구의 종풍을 이었습니까?”
“말이 있으면 말을 타고 말이 없으면 걸어가지요.”
“젊은 스님인데도 기지와 계산이 훌륭하시군요.”
“그대가 늙은 것을 생각해서 30대만 때리겠소.”
우리가 선종사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가르침의 맥은 있으나
그 맥을 잇는 일에는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만 있었습니다.
안목만을 높이 본다는 선에서 하나의 가문을 잇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일가를 이루었다는 증표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말을 타거나 걸어가거나 선택일 뿐입니다.
한 치의 오차가 없으니 이루어질 것만 이루어집니다.
벗어나면 눈에 보이고, 마음에 들키고
그래서 계산이 필요 없습니다.
잔머리는 오히려 늙은이의 것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혜능이 입적할 즈음에 고향으로 가려 하니 대중들이 물었다.
“스님께서 이번에 가시면 조만간에 다시 돌아오시겠습니까?”
“나뭇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지만 올 때는 말없이 오느니라.”
혜능은 나뭇잎과 낙엽과 땅과 뿌리와 돌아옴을 이야기하지만
그 안목에는 말이 없이 오는 것이 보입니다.
늘 가고 오는 것에 굳이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혜능은 시를 남깁니다.
심지함정종 법우즉화생 心地含情種 法雨卽花生
마음의 땅이 생명 씨앗을 머금으니
가르침이 비를 만나 꽃이 피어나고
자오화정종 보리과자성 自悟花情種 菩提果自成
스스로 꽃과 생명 씨앗을 깨우치니
깨달음의 열매가 저절로 맺는다.
함정종, 화정종, 모든 유정 생명이
이렇게 품어서 피우고 가고 오고 하는 그 연을 알면
곧 깨달음이 열린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어리석음이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가면 조만간 다시 돌아오겠냐는 그 물음에는
생겨나고 사라지며 품어서 나는 저 인연이 어색합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어색해지면
말을 타거나 아니면 걸어가거나 하는 것이
선택의 기지와 계산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스님께서 방장실에 계실 때에는 무엇으로 표준을 삼으십니까?”
“어젯밤 삼경에 소를 잃어버리고
막상 날이 밝아 일어나 보니 등불을 잃어버렸더구나.”
남전 보원은 치매를 앓는 노인이 아니지만
계속 잃어버립니다.
이 잃어버림 속에 생겨남이 있습니다.
사라지는 죽음을 볼 수 없으면
일어나는 생명도 볼 수 없습니다.
이 변화가 수시로 일어나니
밤과 낮을 이어서 기억하는 것도 일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탁하고 놓으면
자기 살림이 표준이 되니
허튼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소 잃을 일이 없고
날이 밝은데 등불을 잃어버릴 일이 없습니다.
남전의 대답은 이미 그것으로 한 편의 선시를 대신할 만합니다.
한 스님이 설봉옥에게 물었다.
“옛 개울물이 몹시 차가울 때는 어떻습니까?”
“눈을 부릅떠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그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입으로는 마실 수도 없다.”
조주가 이 말을 전해 듣고서 말하였다.
“콧구멍으로도 마실 수 없다.”
그 스님이 이 말을 듣자마자 물었다.
“옛 개울물이 몹시 차가울 때는 어떻습니까?”
“쓰지”
“그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죽는다.”
그 스님이 설봉에게 말해주자
설봉은 멀리 계신 곳을 바라보고 절하면서 말했다.
“조주 부처님이시여”
옛 개울물의 정체를 우리가 아는지 짚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저 물음은 다른 질문으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생명으로 가득한 물이 솟아나는 샘물을 보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설봉은 바닥이 안 보이고 마실 수도 없다고 하지만
조주에게 물으니 더 쎈 답이 돌아옵니다.
“맛만 봐도 쓴데 그걸 마셔? 아서라 마시면 죽는다.”
죽어본 사람만이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죽어보면 사는 것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선문답이 나올 수가 없게 됩니다.
조주는 마시고도 죽지 않았거든요.
아니다, 마시고 죽었습니다.
목주 존속 스님이 하루는 한 좌주에게 물었다.
“무슨 경을 강의하시오?”
“열반경을 강의합니다.”
“한 구절 물어봐도 되겠소?”
“그러십시오.”
스님이 허공에 발길질을 하고, 입으로 한 차례 후 불면서 말했다.
“이것이 무슨 구절이오?”
“경전에는 그런 구절이 없습니다.”
“사기꾼아, 500명의 장사가 돌을 드는 구절이 없다고 말하는가?”
나고 들은 모든 길목에서 생명의 이어짐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길목만을 보지만
늘 이어지는 그 맥을 보면
문자 하나하나가 모두 생명의 기록입니다.
생명책이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눈앞에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안 믿으니까 지옥에 가게 됩니다.
자기 안의 지옥이지만, 굳이 간다고 하는 것은 여기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황벽이 어느 날 주먹을 움켜쥐고서 말했다.
“천하 노스님이 모두 이 주먹 속에 있다.
내 만일 한가닥 길을 터주면 그들은 자제해지겠지만
터주지 않는다면 손끝 하나 까딱 할 것이 없다.”
이때 한 스님이 물었다.
“손끝 하나 까딱할 것도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
“넓다”
“손안에 오공을 가두시니 황벽 부처님이 맞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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