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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_ 생각하는 마음 [큰스님께 듣는 깨달음의 길]

Buddhastudy 2021. 3. 15. 20:36

 

 

생각을 가지고 살잖아요. 생각.

그러면 생각을 마음이라고도 하는데,

생각에는 생각하는 마음, 지혜로운 마음 또 신령스러운 마음,

이렇게 3가지로 나누어서 가르쳐요, 마음을.

 

생각하는 마음을 요 감정이라는 정, 의식이라는 식, 정식심이라고 그래요.

요게 중생의 기본적인 마음이에요.

 

정이라는 것은

눈은 눈대로 보는 감정이 있어요.

귀는 귀대로 듣는 감정이 있고 거기서 인식을 한다고 그래서 정식심인데

이거를 크게 4가지로 나누는데

 

1. 現量識현량식

안이비설신의 5가지인데 요걸 前五識전오식이라고 그러거든요.

눈에는 눈에 정식이 있고, 귀에는 귀에 감정의식이 있단 말이에요.

코에는 코대로 감정의식이 있고, 이래서 5정식인데

 

5정식을 뭐라고 그러냐하면 유식학에서 현량이라고 그래요. 현량.

현대라는 현, 수량이라는 량, 헤아릴 량, 현량이라고 그러는데

현량이라는 건 뭐냐하면 현현..

나타나고 나타난 거를 헤아리고 헤아린다 해서 현량이라고 그래요.

 

눈은 나타는 걸 보고요, 귀는 나타난 거 듣고, 손도 나타난 거 보지 다른 거 없어요.

요거를 현량식이라고 그러거든요

안이비설신.

몸도 뭔가 부딪혀야 느껴요. 나타나야 느껴요.

나타난 걸 헤아린다 해서 나타날 현, 헤아릴 량, 현량이라 그래요.

 

학술 용어에요. 그렇게 가르쳐요.

유식공부나 교리공부하려면 이렇게 특수 용어 술어 익히다가 세월 다 가요. 그래서 하다 그만두는 사람 많아요.

현량, 현량식이요. 현량식.

 

2. 조업식

그런데 제육식이 있는데 안이비설신의 의식이 있는데

이 의식이라는 놈은 아주 활발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데

요걸 뭐라고 그러냐하면 지을 조, 선업 악업 하는 업,

이걸 조업식이라고 그래요. 업을 짓는 식이다.

 

우리가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는 건

순전히 제육, 의식이 하는 거에요. 눈이 하는 게 아니에요.

눈은 그냥 볼 뿐이에요.

그런데 이 제육식이 어떤 때는 좋은 일 하고, 어떤 때는 나쁜 일 하고

선악업을 막 짓는 게 제육식, 조업식이라고 그러거든요.

 

누가 때린다 그러면요,

왜 때렸냐 그러면

내가 안 때리고 손이 때렸다, 이러거든. ㅎㅎ

잘못된 거예요.

 

이 손은 그냥 현량이고,

그 때린다, 안 때린다 이거는 조업인데

이건 제육식이라는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손이 때렸다 그러면 아주 잘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현량식, 보고 바로 느끼는 식이죠. 현량이라는 것은.

조업식이 있어요. 공부를 내가 해야 하겠다, 안 해야 하겠다.

이거는 눈이 바라본다고 눈이 공부하는 거 아니에요.

그 안에 여러 가지 좋은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고 업을 짓는 의식이 있는데

그걸 제육식이라고 그런다.

 

3. 思量識사량식, 집착식

그다음에 제칠식이 있어요.

제칠식은 무슨 식이냐 하면 생각할 사, 헤아릴 량, 사량식이라고 그래요.

만날 생각만 하는 게 제칠식이에요.

만날 생각만 해요. 그냥 업짓고 활동하고 하는 거는 말하고 듣고 뭐 가고 오고 하는 건 전부가 조업식, 제육식인데요

 

지금까지 했던 거, 자기가 한 건 다 옳고, 다른 사람이 한 건 다 글러요.

그게 제칠식이 하는 일이에요.

사량식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자기가 보고듣고 한거는 항상 옳다는 집착을 가지고 있는 게 제칠식이에요.

사량식.

항심사량이라고 항상해요.

낮이나 밤이나 오나가나 자기가 한 건 다 옳아.

다른 사람이 한 건 다 글러요.

이게 중생이에요.

 

그리고 자기한테 고마웠던 건 다 잊어버려요.

또 자기한테 잘못한 건 다 가지고 있어요.

제칠식이 하는 일이에요. 전부 다.

 

그러니까 이걸 집착이라고 그러는데, 집착식이라고 그러는데

일단 한 거는 제칠식이 집착을 해요.

그래서 자기가 한 거는 아무리 사고를 쳤어도 그건 잘한 거예요.

다른 사람이 한 거는 잘했어도 그건 잘못한 거예요.

 

그렇게 되어 있어요. ?

내가 하면 로멘스인데 뭐. 다른 사람이 하면 아니다.

인간이 하면 본래 그런 거예요.

자기가 한 거는 무슨 일을 했어도 다 옳은 거예요.

다른 사람이 한 건 아무리 좋은 일을 했어도 그건 좋은 게 아니에요.

이게 제칠식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게 생각이거든요.

 

4. 종자식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종자식이라는 게 있어요.

종자식이라고 하는 건 자기가 한번 본 거는 종자가 되어 그게 저장이 돼요.

그래서 꼭 다음에 어떤 환경이 되면 그게 튀어나와요 다시.

 

내가 어디에 갔었다 그러면 그거 비슷한 걸 보면

그 과거에 봤던 방식으로 지금걸 보게 되요.

그게 종자식이에요.

 

그게 없으면 볼 수가 없어요.

과거에 뭔가가 기억이 저장이 되어야 그 기억에 의해서 현재를 살필 수가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과거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거는 현재 나타나도 몰라요.

종자가 안 심어져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게 한번 경험했던 게 어째서 안 없어지냐?

그건 제팔아뢰야식이라는 종자식이 있어서 안 없어진다.

종자.

 

 

그래서 4가지로 식을 가르친단 말이죠.

1. 현량식, 현재를 헤아리고 인식하는 거.

2. 조업식, 좋은 업도 짓고 나쁜 업도 짓는, 막 업을 짓는 조업식

3. 사량식, 지가 한 거는 다 좋다고 생각하고 항상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건 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

4. 종자식, 한번 경험했던 건 이게 종자가 되어서 다시 튀어나온다.

어릴 때 수영을 배워서 수영 안하고 한 50년 지나도 물에 들어가면 바로 수영해요.

그건 종자식 때문에 그런 거예요.

 

어릴 때 붓글씨를 좀 배우면 나이 많아서 붓만 딱 잡으면 어릴 때 그 수준이 바로 나와요.

그런데 전혀 안 해본 사람은 안 돼요, 소용없어.

그러니까 이 종사식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내가 무슨 일을 하면 없어지는 게 아니고 종자가 되어 저장된다.

 

 

그래서 이 생각의 종자가 성불하기 직전에 가야 완전히 없어져요.

그러면 그때부터는 뭐가 있냐?

그냥 지혜가 남는 거예요.

 

대원경지라고 그러는데요, 큰 거울과 같은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다. 대원경지.

큰 대, 둥글 원, 거울경.

조진찰, 온 세계를 환희 비추는 지혜만 있다.

 

그래서 요걸 정식심에서 부처님이 된 그 부처님 지혜의 마음을 지혜 지, 깨달을 각, 마음 심, 지각심이라고 그래요. 지각심.

 

중생은 정식심으로 사는 거예요.

감정의 인식으로 살아요.

종자가 되어서 또 나타나고 종자가 되어서 또 나타나고.

 

 

그러면 생각은 어디로 돌아가느냐?

지혜로 돌아가는 거죠. 생각은 지혜로 돌아가고 우리 몸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다 돌아갈 데가 있는 거예요. 이게.

 

그러면 그 부처님의 마음은 지각심이고 중생의 마음은 정식심인데

그 마음의 근본은 뭐냐? 그걸 영명심, 신령 령, 밝을 명,

그냥 신령스럽게 밝아서

그 영명심에는 과거심도 없고 현재심도 없고 미래심도 없고 중생심도 없고 제불심도 없고, 그냥 신령스럽고 밝을 뿐이에요.

신령스럽고 밝다.

 

그래서 이거를 전체로 보면

상응과 불공으로 가르치거든요.

 

상응심이 있어요. 서로 상, 응할 응.

중생의 인연을 만나면 중생도 되고, 제불의 인연을 만나면 제불도 되고 그러는데

이걸 상응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근본 바탕은 불공이라, 부처라고 해도 그 마음에는 부처도 아니다.

중생이라고 해도 그 마음에는 중생도 아니다.

같지 않다.

그냥 신령스럽게 밝을 뿐이고,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느껴서 과거현재미래와 상응을 하지만

이 신령스럽게 밝은 마음은

과거도 아니다. 과거심도 불가득이다.

현재도 아니다. 현재심도 불가득이다.

미래도 아니도 미래심도 불가득이다.

 

이걸 영명심이라고 그래요.

그게 나의 본래면목이에요. 영명심.

 

그러니까 이게

울고불고, 좋다 나쁘다하는 것은 다 꿈같이 그런 거지

나의 본래 면목이 아니에요.

정식심으로 그러는 거예요. 생각으로.

 

그래서 나의 본래 면목 그 영명심은

슬픔 불가득, 슬픔이라는 게 없어요.

이게 다 인연에서 온 거지, 그 자성에는 슬픔이 없어.

나쁜 거 없어요. 인연에서 나쁜 게 왔지 자성에는 나쁜 게 없는 거예요.

 

거울에 비유하잖아요.

거울이 있으면 거울에 뭘 갖다 비추면 다 비추잖아요, 그게 상응이에요.

그런데 거울 안 더듬어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본래면목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걸 영명심이라고 그래요.

영명자성 본래면목

 

그리 돌아가면 생각은 그 영명자성 본래면목으로 돌아가면

천하 대해탈이 되는 거죠.

천하 대해탈.

 

그게 불교에서 가르치는 거예요.

마음이라는게.

이 몸은 다 돌아갈 데가 있고, 물로 돌아가고, 불로 돌아가고.

 

생각은 그 본래면목으로 돌아가.

그러면 본래면목에 딱 돌아가서 보면

하늘을 봐도 그게 본래면목이에요. 하늘이.

땅을 봐도 그게 본래면목이고.

 

그걸 대해탈이라고 그래요.

허공을 봐도 본래면목에 허공불가득이에요. 허공 없어요.

땅을 봐도 대지불가득이라. 대지가 그게 우리 본래면목이거든.

 

그걸 가르치는 게 불교에요.

산을 봐도 그게 나의 본래면목이에요.

선천불가득, 내 본래면목 신령스러운 본마음에는 산천이 없어요.

그 산천하고 상응할 뿐이지 자성에는 그걸 얻을 수가 없다.

 

상응물이요, 불가득이다.

뭔가 비출게 있어야 비출게 아니에요.

비추는 건 상응인데, 서로 응하는 건데.

 

明珠在掌명주재장이라.

밝은 구슬이 손에 있다. 이걸 명주재장이라고 그러거든요.

명주가 손바닥에 있다고.

명주가 딱 있으면 이 밝은 구슬에는 투명체에요, 이게.

검은 것도 아니고 붉은 것도 아니고 고대로 있어요.

 

그런데 나타나는 대로 다 여기 비춰지거든요.

비춰지는 건 상응이고,

어떤 색깔도 아닌 건 불공이거든요. 같지 않은 거.

 

그래서 그거를 확실히 증득한 것을

국영각을 얻었다, 대각을 이루었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국영각에 올라가면

우리가 살고 죽는 게 다 나의 본래면목의 현현이다.

죽는 것도 나의 본래면목이 나타난 것이고

사는 것도 나의 본래면목이 나타난 것.

 

하늘도 하늘이 있으면 뭔가 하늘이 그냥 있는 게 아니라

하늘을 알아보는 뭐가 있어야 있는 건데

그걸 놓치는 거예요.

 

하늘을 알아보는 놈이 있단 말이에요.

그걸 까맣게 놓친다고 그래서 그걸 미혹이라고 그래요.

밥 맛이 있다그러면 밥맛 아는 뭐가 혀가 있어야 밥맛을 알지.

그런데 이거 맛있네이럴 줄만 알지, 그 맛을 느끼는 놈은 까맣게 잊어버리거든요.

 

저거 좋은네그러면

좋은 저건 아는데 저걸 좋다고 알아보는 자기 눈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거예요.

 

눈이 볼 수 있는 거는 본래면목의 현현이다. 본래면목이 나타난 거다.

죽음을 아는 것도 나의 본래면목이 현현한 것이고

나타날 현, 두 번 쓰면 현현이라고 그래요. 나타난 것이다.

 

무섭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나의 본래면목이 현현한 것에요.

무서운 거는 대상이 있어야 무서운데 그 대상만 있다고 무서운 게 아니라

무섭다고 느끼는 존재가 있단 말이오.

 

아이고 열라네 자꾸... ㅎㅎㅎ

열이 나요.

 

그러니까 우리 생각은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고

우리 몸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언제나 만족하고

언제나 자유롭고

그걸 하라고 불교에서 설법을 하는 거거든요.

 

스스로 만족할 줄 알고

스스로 지혜로울 줄 알 때

그게 참다운 행복이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