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1)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1747.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려면

Buddhastudy 2021. 10. 14. 18:56

 

 

이데올로기적인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갈등으로 혼란스럽습니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누구다 다 생긴 모양이 다르듯이

생각도 다르고, 이념도 다르고, 믿음도 다르고 그래요.

 

여기서 다 다르다이게 아니라

우리가 여기 밖에 나가서 식물들도 보면

다 종류가 다르고, 같은 종류 안에도 또 크기가 다르고 하듯이

또 동물들도 보면 종류가 다르고,

같은 종류 안에도 크기가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이러듯이

사람들도 우선 몸만 봐도 피부 빛깔이 다르고, 남녀가 다르고, 또 신체 크기가 다르고

이렇게 다르잖아요.

 

그거보다 훨씬 더 다양한 게 뭐냐?

그 사람의 믿음,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가치관, 그 사람의 느낌

이런 건 외형보다도 더 많이 조금씩 조금씩 서로 다르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인식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공간적으로 너무 넓으면 우리가 너무 떨어져 있는 건 모르잖아요.

너무 작아도 모르고.

 

그런 인식상의 한계로 인해서 오해가 생기는 게 하나 있고요

요즘은 인식상의 한계 때문에 생기는 이?은 많이 극복이 됐어요.

기계를 통해서.

 

만원경을 통해서 멀리 있는 것도 보고

현미경을 통해서 아주 작은 것도 보는

이런 방식으로 옛날에 우리가 잘 몰라서 신비주의에 빠졌던 것, 우매하게 행동했던 것

이런 거 다 바르게 알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거는 극복이 되었는데, 지금 뭐가 문제냐 하면

편견이라는 거요.

자기의 관점, 자기가 바라보는 그 관점에서 본 걸 자기고

그것이 사실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거요.

 

예를 들면 기독교인 같으면 기독교적 입장에서, 기독교적 사상을 가지고, 불교도를 본다든지, 모슬렘을 본다든지,

안 그러면 어른들은 어른 입장에서 아이들을 본다든지,

여자들은 여자 입장에서 남자를 본다든지,

남자입장에서 여자를 본다든지,

선생님 입장에서만 애들을 본다든지, 애들 입장에서만 선생을 본다든지

한국 사람 입장에서만 일본을 본다든지, 일본 사람 입장에서만 한국을 본다든지

이렇게 /자기의 어떤 위치,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그게 마치 진실인 양 착각하는 거

이것이 편견/이라고 그러죠.

 

이런 편견, 편견도 인식상의 오류입니다.

이런 인식상의 오류가 오늘날 갈등의 원인이라는 거요.

그래서 이런 갈등에서 우리가 벗어나려면

 

--

맨 첫 번째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자세는

, 사람은 모양도 다르고, 피부 빛깔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믿음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다.

나와 다르다.

이걸 먼저 인정을 해야 한다.

 

이거는 진실이라는 거죠.

사실이다.

같다 하는 것은 착각이고

다르다 하는 것이 진실이다.

 

다른 것을 다르다고 사실대로 아는 것

이제 존중이에요.

 

타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저 사람이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구나.

저 사람은 저런 믿음을 가지고 있구나.”

이렇게 존중해야 한다.

,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

두 번째는 이해입니다.

이해라는 것은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일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저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북한 사람 입장에서는 북한 지도자는 저렇게 말할 수 있겠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이게 이해입니다.

 

그거는 그게 옳다든지, 내가 동조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고

그 입장에서 볼 때는, 그 사람은 생각을 그렇게 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것.

 

 

그러면 이렇게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 사람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라고 이해를 하게 되면

나한테 어떤 현상이 생기냐 하면

분노라든지, 답답함이라든지, 짜증이라든지, 이런 거는 안 일어나는 거요.

 

동조한다는 얘긴 전혀 아니에요.

다른데 뭐 동조할 이유는 없죠.

그래서 내가 평정심을 유지한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면 어떤 일을 할 때,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어떻게 일을 하느냐?

그건 선택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는 선택에 들어가게 된다.

 

같이 하겠냐?,

다르니까 따로따로 하겠냐?

 

밥 먹는 식성이 서로 다르면

같은 밥을 먹으면서 싱거운 사람이 짠맛에 맞추겠냐?

짜게 먹는 사람이 싱거운 사람에 맞추겠냐? 반반 섞겠느냐?

이건 같이 먹는 선택이고

 

그다음에 아, 그러면 따로 먹고 나중에 차 마실 때 모이자.

이렇게 따로 할 수도 있다.

꼭 같이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우리가 문제를 풀면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

오히려 평화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된다.

 

그러면 현대 사회는 뭐냐?

바로 자기의 생각, 자기의 관점, 자기의 가치관, 자기의 믿음이 옳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상대건 틀렸다고 얘기하기 때문에 갈등이 심해지는데

 

현대에 들어와서, 옛날에도 옛날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요.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정치적 갈등이 심한 이유는

제가 볼 때는 SNS 영향 같아요.

 

유튜브를 보면 법륜스님 거를 하나 보면, 계속 거기 법륜스님 것만 나와요.

그래서 다른 걸 볼 수 없고 비슷비슷한 것만 계속 찾아주는 거요.

내가 보수적인 어떤 거를 하나 보면,

그 보수 색깔이 있는 것이 계속 거기에 나타나는 거요.

뚜껑만 열면 그런 게 나타나는 거요.

알고리즘 때문에.

 

이것 때문에 점점 내가 뉴스를 듣는데도

채널을 돌리면 내가 돌리면 채널이 객관적으로 보수적인 언론도 있고 진보적인 언론도 있고 그런게 아니라

유튜브에는 비슷한 것만 계속 올라오기 때문에

자기가 보고 듣는 것이 늘 그렇다 보니까

거기에 자기는 그게 옳다고 믿음이 확신되는 거 아니냐.

 

댓글 보면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게 100% 확신에 차서 글을 쓰잖아요.

다른 사람 100% 틀렸다 그러고.

 

이것이 현재 미국과 특히 한국, 이런 데서 전체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인데

학교 교육을 통해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편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이런 훈련을 비교적 많이 시키는 데가 어디예요?

유럽이에요.

특히 북유럽 같으면 그런 교육과 훈련을 굉장히 많이 시키고

사회정치 시스템도 다.

 

지난번에 핀란드 대사님 만나서 물어보니까

핀란드도 옛날에 국내에 이런 갈등 때문에 내전이 일어나서 인구의 10%가 더 죽었다는 거요.

그리고 나서 그들은 대타협을 했다는 거요. 반성하고.

 

그래서 다당제, 다 당이 있어서

어떤 한 당도 그 이후에 일당이 절반을 넘은 적이 한 번도 없데요.

한 개의 당이 정부를 구성한 적이 없고, 항상 2~3개가 모여서 정부를 구성했다는

지금까지.

소위 말하면 협치죠.

이런 어떤 시스템.

 

우리가 선거 같은 거 할 때도 한 표라도 이기면 표 다 먹는,

이건 승자독식 구조라고 그러잖아요.

 

그게 아니라 예를 든다면

경상도에 야당표가 60% 나오고 여당 표가 40% 나왔다.

국회의원을 10명 중에 4명 주고 이래야 하는데

소선거구제로 해서 승자독식 구조로 하면 100% 야당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고,

전라도는 100% 여당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고

이런 식의 시스템이 있는 한은

이런 편중되는 것을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려면 타협을 해야 해요.

그래서 지난번 선거제도를 좀 바꾼 건 이런 요소를 좀 넣자고 했는데,

위성정당을 거대정당이 만들어서

선거제도에 개혁이 오히려 더 악법이 되어버리는

이런 결과가 나오기는 했습니다만

이런 시스템을 보완해 나간다면 이런 갈등을 좀 완화할 수가 있다.

 

그래서 대통령선거로 해서 대통령만 되면 정권을 쥐는, 이런 거 보다는

내각을 구성해서, 내각 책임제로 한다든지,

내각제 요소를 좀 더 가미한다든지 해서

소수표를 얻은 사람도 정부 운영에 참여한다든지,

 

또 지방자치제가 강화되어 중앙권력만 다 모든 걸 갖는 게 아니라

지방도 또 시군으로도 권한이 이전된다든지

이런 권력 분산적인 정책을 취하게 되면

이런 대립과 갈등을 좀 완화시킬 수는 있죠.

 

부처님 당시에는 이런 시스템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역할을 누가 있다?

원로들이 했습니다. 원로들이.

오랜 경험을 가진 원로들이 이런 갈등이 생기면

원로들한테 문의를 하면 원로들이 판결을 해줘요.

그러면 전체가 다 거기 승복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원로들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럴만한 존경받는 원로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도 거기 승복을 안 하니까 원로가 있을 수 없죠.

 

그런데 우리는 지금 꼭 원로가 없더라도

이런 /협치를 할 수 있는 사회 시스템, 법률 시스템만 잘 갖추면

이런 양극화 현상은 좀 완화/시킬 수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

우리 학생들 질문 수준이 굉장히 높아졌네.

한 분은 불교와 자본주의, 한 분은 불교와 민주주에 대한 질문인데 ㅎㅎ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보면

승가공동체, 출가한 승가공동체는 굉장히 민주적으로 운영을 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자주 모여서 의논해라.

이게 민주주의 아닙니까? 그죠.

 

그리고 타인의 의견을 항상 존중해라.

그리고 이렇게 해서 결론이 나면 의기투합해라.

 

민주주의 가장 맹점이 뭐냐?

서로 다른 견해가, 토론을 하다 보면 감정이 상해서 적이 돼요.

결론을 내도 패배자가 동조를 안 해줘요.

어떤 실천을 할 때, 빠져버려요.

그렇게 되니까 오히려 독재자가 탁, 단결해서 밀고 있는 것보다 못하죠.

그래서 제국의 전쟁에서도 늘 지고 그랬잖아요.

 

/민주주의가 갖는 장점은

모든 사람이 다 의사결정에 참여했기 때문에

자발성이라는 것.

 

그런데 단점은

패가 갈린다는 것/

 

그래서 토론을 할 때는 민주적으로 하되

결론이 딱 나면 그것에 승복을 해줘야 해요.

그래서 의기투합을 해줘야 해요.

 

/부처님이

자주 모여서 의논을 해라.

의논할 때는 상대 의견을 존중해라.

결론이 나면 의기 투합해라/

 

지금 봐도 굉장히 좋은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오늘날 민주주의라면

서양에서만 배우려고 하지 말고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도 나와 있다.

 

--

그리고 경제적 민주주의, 이런 것도 부처님께서는 뭐다?

보시받은 물건은 뭐해라?

평등하게 나눠라.

 

우리 정토회 같으면

외부에서 물건 같은 거 보시할 때 누구한테 많이 할까?

법륜스님한테 많이 하겠죠.

? 얼굴이 알려져 있으니까.

양말도 들어오고, 뭐도 들어오고, 이러잖아요.

 

그러면 이거는 내가 얼굴마담이잖아. 그죠?

그런데 이건 스님 앞으로 왔다고 내 거다 이러면

청소하고 밥하고 딴 일 하는 사람들은 어때요?

재미가 없잖아, 좀 하다보면

내가 여기 심부름꾼이가?” 이렇게 되잖아.

 

그러기 때문에 이건 딱 모아서

누구 앞으로 들어오든 돈이든 뭐든 들어오면

모아서 공동살림으로 써 줘야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여기에 같이 생활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경제적인 불평등을 해소하는, 그런 가르침도 6개의 화합

화합하기 위해서는 이런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새로운 법을 만들고 없애고 이렇게 하지 말라는 거요.

없는 걸 만들 때는 과반수 갖고 하면 안 되고

2/3 이상, 다수가 지지해야 만들고

 

만들어 놓은 걸 없앨 때도 그냥 없애지 말고

다수가 지지해야, 절대 다수가 지지해야 없앨 수 있다.

 

가능하면 없는 거 새로 만들고,

있는 거 막 함부로 없애고 이렇게 하지 마라.

 

그래서 기존의 질서를 지키되, 새로운 걸 만들 때는 전체 다수가 지지하도록

또 있는 걸 없앨 때도 다수가 지지하도록

과반수 갖고 하면 패가 갈리게 된다는 거요.

이런 가르침은 오늘날 살려 나가면 좋다.

 

그리고 의사결정 같은 거 할 때도

전원 찬성제, 이렇게 하면 한 사람이 반대해도 결정을 못 하잖아요.

그러면 2/3 찬성, 이렇게 해도 1/3의 소수자 의견이 배제되잖아요.

 

3의제라는 게 있습니다.

토론을 하고, 1차 투표를 해서 1/3 이상 지지를 받게 되면

소수자에게만 발언권을 줘서

소수자가 처리하겠습니다 하면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거고

의견이 있으면 얘기하고 다시 투표하고

이거를 몇 번 한다? 3번까지 한다.

 

3번 해도 소수자가 안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3번까지 그렇게 결론이 나면

소수자가 자발적으로 내려놔야 해요.

그래야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과는 만장일치제로 되는 거죠.

이런 방식이 오늘날 정토회에서도 그대로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이게 현실적으로 좀 어렵다하면

과반수 갖고 안되고요, 2/3 정도 되어야 한다.

다수의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하려면

2/3의 정도의 찬성을 얻어야 통과하는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

 

가톨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로마에서 보면 있던 법을 변화를 시키려면

거기에 추기경님들의 2/3 이상의 지지를 받거나

그래야 또 폐지하거나 만들거나 하는 거거든요.

 

이것이 가능하면 패를 딱 둘로 쪼개서 싸우는

이걸 막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