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17. 그냥 깨닫는 법! 이것이 진짜 깨달음, 무상정등각 - 해인을 쥐어라

Buddhastudy 2023. 5. 18. 20:33

 

 

 

해인을 쥐어라.

실존을 형상화하면 어떤 모양이 적합할까?

 

언어로 담지 못하는 실존을 어떤 구체적인 모양으로 그려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그런 점을 사전에 두고

가장 근접한 형태의 도상을 설정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일체의 머무름이 없으면서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초월적 존재여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건 딱 두 개 뿐이다.

점과 원이다.

 

점은 위치는 있지만 면적이 없다.

위치가 있기에 유이지만 면적이 없어 무이다.

그래서 비유비무이다.

 

이런 점과 같은 것이 원이다.

어딘가에 걸려 있는 모서리를 전부 없애면 원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모서리가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 속 이론에선 원이 가능하지만

실제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원은 점과 마찬가지로 비유비무이다.

 

점과 원이 그나마 실존을 표현하는 데에 쓸 만한 도상이 된다.

이 가운데 너무 단순한 점보다는 원이 보기에 좋을 수 있다.

그러니 원을 실존의 형상으로 꾸며 보자.

 

 

이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이다.

모서리(머무름/)가 없기에 삼라만상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원을 깨우치면 실존에 대한 대각이 열린다.

 

원은 존재 그 자체이기에 그냥 깨달으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막연하여 느낌조차 오지 않는다.

이럴 때는 원을 보다 구체화할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하다.

바로 반지름이다.

반지름만 세우면 원의 형상이 드러나며 마음에 담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반지름이 그려진 원은 이미 왜곡되어 있다.

그건 있는 그대로의 원이 아닌 생각에 의해 꾸며진 원이다.

바로 싯다르타가 세 명의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은 원이다.

 

그러니 반지름을 그렸으면 다시 그것을 지우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반지름을 지우고 나면 또 다시 원의 형상이 모호해진다.

여기서 양자 모순에 빠진다.

 

반지름을 세우자니 원이 아니고

그렇다고 반지름을 지우자니 원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반지름을 그리고, 지우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반지름이 없는 원이 느껴질 때가 온다.

 

온전한 원이 비추면서 깨달음이 열리게 된다.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이루어진 이유는

반지름 놀이를 하던 주체가 바로 원이기 때문이다.

 

반지름, 이것이 바로 불법이다.

불법으로써 반지름을 세우고

다시 그 불법을 버림으로써 원래의 원으로 돌아온다.

이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 수행이다.

 

반지름이 그려진 원, 이것을 일러 해인이라 한다.

해인이란 거울처럼 만물을 비추고 있는 실존을 의미한다.

 

 

작동법은 매우 간단하다.

반지름을 올린 뒤 스위치처럼 누르면서 수행하면 된다.

그런데 반지름을 세우는 것이 결코 만만치가 않다.

뭇 학문의 근간이 되는 동서양의 철학도 반지름을 세우는 데에 역부족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불법을 강조하는 것이다.

불법 정도는 되어야 반지름이 쭉쭉 올라간다.

여기서 끝까지 올리려면 쌍차쌍조나 불이의 절대, 무주의 해탈 같은 것이 필요하다.

이것에 대한 체험과 반야는 반지름을 공고히 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그런데 반지름이 무엇이던가?

그건 한마디로 실상의 왜곡이다.

 

따라서 불법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앞의 명제들이 가장 큰 왜곡을 일으킨다.

반지름이 올라갈 때 와 더불어 도 올라가니

그야말로 道高上魔高上이다.

 

이런 이유로 불법을 짊어지고 놓을 줄을 모르면

일개 범부보다 못한 의식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실상을 왜곡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등장한 것이 불법이거늘

이것을 진리라 여기며 목을 매는 사람들만큼 측은하고 안타까운 것은 없다.

 

수천 년 동안 이어지는 불설과 비불설의 논쟁도 그렇다.

불설이든 비불설이든 모두 왜곡된 것이거늘 무슨 논쟁이 필요하겠는가.

그리고 불설을 기필코 가려야 한다고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깨달은 사람의 말이 불설이 되니 말이다.

깨달은 사람이 없으니 어떡하든 불설을 찾으려고 이전투구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불법의 어떤 것들이 반지름에 유효할까?

 

반지름의 폭은 꽤 넓다.

불교사에 등장하는 어떤 수행법도 가리지 않는다.

초기불교의 위빠사나에서 시작하여

참선법, 묵조선, 여래선, 염불선, 조사선, 간화선... 등은 물론이고

교종의 간경이나 밀교의 진언승

그리고 제반의 반야 증득의 수행들이 모두 유효하다.

 

그것들이 반지름에 해당한다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이런저런 수행법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

 

어디 이뿐이랴.

예배당에 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목청껏 찬양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반지름은 그 자체로 지워야 할 허상이기에 재료에 끌려가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반지름을 가지고 다투지를 마라.

물에 비친 달을 놓고 옥신각신하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반지름은 가급적이면 끝까지 세우는 편이 좋다.

반지름을 내릴 때 오는 낙차가 그만큼 크고

그냥 있는 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월을 물 쓰듯 해서는 안된다.

일단 자신이 올릴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수시로 내리는 것이 좋다.

 

휴식을 취한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두커니 먼 산을 바라봐도 좋고

산보를 하며 풀내음에 정신을 맡겨 봐도 좋다.

아니면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면서 대상에 휩싸여 봐도 좋고

그윽한 차 한잔을 음미하여 향기 속에 푹 파묻혀 지내도 좋다.

그런 여유로운 것이 아니어도

세상 한복판으로 들어가 세파에 모든 것을 맡겨 놓아도 좋다.

 

해인의 반지름, 그것을 올리고 내리고 반복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 그냥 깨닫는 때가 올 것이다.

어느 무엇에 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

상신이 본래부터 깨달음 그 자체였다는 사실을 똑똑히 목도하게 해 줄 것이다.

 

*교종의 간경

불교 수행자들 중에는

마치 유학자들이 사서삼경을 대하는 것처럼 불경을 독송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종교적 신심을 키우는 데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깨달음과는 역행하기 쉽다.

왜냐, 법상이 굳어지면서 논리적 사유에 둔감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