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역사, 세계사

[세계사, 4대 문명] 펠로폰네소스 전쟁 배경, 아테네 스파르타의 대립

Buddhastudy 2023. 8. 24. 19:20

 

 

기원전 5세기 초,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그리스의 도시국가 폴리스 동맹국들은

당시,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페르시아 침공을 맞이해

고군분투 끝에 그리스를 지켜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인 아테네는

단숨에 폴리스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죠.

특히, 살라미스 해전을 통해 보여준 아테네 해군의 힘은

페르시아가 물러난 후 에게 해와 흑해를 주름잡았고

그와 더불어 무역과 상공업도 장악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페리클레스를 중심으로 번창하게 되는데

그의 인기는 뛰어난 학자와 예술가들을 모여들게 하였고

고대 사회의 특징상 성인 남성에 불과하더라도

전체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의 기능이 강화되었죠.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야말로 시민이 권력을 지닌 진정한 민주정치이며

이는 모든 폴리스가 배워야만 할 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로 인해, 페리클레스의 시대를

아테네 민주주의 전성기라고도 칭하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시민을 방패로 삼는

페리클레스 독재 시대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죠.

 

페리클레스 시대는 아테네 최고의 번영을 이룩하였지만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에 따른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아테네 시민 4만여 명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노예도 10만여 명에 달했는데요.

국내의 문제뿐만 아니라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에서

권력의 중심이었던 아테네는

해군의 보호라는 명목 아래 다른 폴리스들로부터 공납을 받기도 했습니다.

 

결국, 동맹 폴리스들은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했으며

아테네의 민주정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스파르타도 거리를 두기 시작했죠.

그동안 스파르타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다수의 헤일로타이를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리스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아테네의 민주정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분쟁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기원전 465년에 발생한 헤일로타이의 반란때였습니다.

헤일로타이는 스파르타인들에게 정복당한 곳의 주민들 출신으로

국가 노예로 전락된 자들이었죠.

그들은 평소 스파르타 국가로부터 시키는 일을 강행해야 했으며

스파르타 교육생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연습상대라든가 전쟁터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스파르타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리스 동맹군을 소집하였는데

다른 동맹군과는 손을 잡으면서

아테네의 키몬 장군이 인솔하고 온 아테네 군사 4,000명은 그냥 돌려보냈죠.

표면상의 이유로는 아테네군에서 예의 없는 행동을 했다고 언급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혹시나 아테네가 자신들을 배신하여

헤일로타이를 도와줄 수도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스파르타의 행동은

페르시아 전쟁 때 같이 힘을 합쳐 그리스 전체를 막아냈던 때와는 달리

그동안 아테네와의 외교적 거리감을 나타내는 증거이기도 했죠.

 

스파르타의 노골적인 거리감은

결국 아테네 또한 스파르타를 싫어하게 만들었습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 이외의 다른 폴리스들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여기에는 기존의 스파르타 동맹국들도 있었죠.

, 아테네는 앞으로 그리스 세계로부터

스파르타를 고립시킬 목적이었던 겁니다.

 

스파르타가 헤일로타이의 반란을 진압하고서 반란자들을 추방시키자

아테네는 헤일로타이에게도 접근하여 스파르타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겼죠.

 

 

 

5년 뒤인 기원전 460. 스파르타의 두 동맹국 중에서

코린트와 메가라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아테네는 이때다 싶어 메가라와 손을 잡고 코린트와 싸우게 되죠.

 

아테네 메가라 연합군과 코린트의 전쟁은

이후 15년간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됩니다.

참고로 통상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 하면

기원전 431년부터 벌어지는 델로스 동맹과 펠레폰네소스 동맹간의

기나긴 세월의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썸네일 영상 제목으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배경이라고 한 부분은 양해바랍니다.

 

다시, 기원전 460년으로 돌아가서

아테네와 메가라가 손을 잡은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메가라는 코린트 지협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은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이 육로로 오는 것을 봉쇄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죠.

 

당시, 아테네는 페르시아에게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의 독립을 도와주기 위해

다수의 원정 병력을 보낸 상태였습니다.

이 때문에 아테네는 완전한 전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린트와 싸우기 위해 아직 전쟁터에 나서기에는 다소 어린 병사들과

혹은 은퇴한 노인들까지 동원하였는데요.

결국 총병력을 동원했던 아테네와 메가라는 코린트를 제압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테네가 그간 외교적인 힘만 행사하다가

실제 물리적으로 필요에 따라 힘을 과시하게 되자

위협을 느낀 도리아인들이 세운 아이기나는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쪽으로 붙게 되었죠.

 

2년 후인 기원전 458.

아테네의 행보를 가만히 눈 뜨고만 볼 수 없었던 스파르타도

그리스 지역 다툼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파르타군은 코린트만의 동맹국을 지원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간 원정에는 효과를 봤지만

아테네 해군 때문에 해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스파르타로 돌아갈 수가 없었죠.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스파르타군은

고민을 하다 되려 보이오티아 지역의 타나그라까지 진격을 해버립니다.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더 진격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테네 안에서도 민주정을 뒤엎고 싶어 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또한, 보이오티아를 통합하고 싶어 하는 테베의 지원도 스파르타의 진격을 도왔습니다.

 

아테네로서는 원래의 예상과는 다르게

갑자기 스파르타가 아테네로 접근해오자

깜짝 놀라 결전에 돌입하여 타나그라 전투에 임하였고

양군은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죠.

 

스파르타는 전투에서 약간의 우위를 점했지만

아테네군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피해로 입고서 육로로 철수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를 겨우 상대한 아테네는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 후인 기원전 457년에는 오이노피타에서 테베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는데요.

그리스 폴리스들 중에서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힘이

얼마나 강건한지를 보여준 대목이기도 했죠.

 

아테네는 테베를 제외한 보이오티아 지방 대부분을

친아테네 계열로 바꾸는데 성공합니다.

이 무렵, 아테네와 아테네의 외항인 피라이오스 사이에는 장벽이 건설되죠.

이 장벽으로 인해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았고

해군력을 통해 식량 등 주요 자원의 수송을 원활하게 해결하게 됩니다.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던 아테네는

함대를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파견해 스파르타의 취약한 곳들을 찌르는데 성공하죠.

 

 

 

그리스 세계에서 아테네 활약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듯했으나

아테네의 기세는 갑작스러운 하향세를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페르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했던 이집트 원정이 참패로 끝나게 되면서

대규모 원정군의 패배는 델로스 동맹 전체를 흔들게 하였죠.

 

쉽게 말해, 그리스 내부에서 힘자랑하던 아테네가

막상 외부 세력에 전력을 퍼부었지만

페르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보이게 되었고

다른 폴리스들은 이제 더 이상 아테네에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아테네는 외부로 시선을 돌리기보다는

델로스 동맹이 와해되지 않도록 내부적으로 신경을 집중하게 되죠.

 

기원전 451. 아테네에서는 도편추방제로

추방되었던 키몬 장군이 돌아오게 됩니다.

그는 오랫동안 친스파르타 정책을 추진했는데

아테네에서는 이를 두고 그를 추방해야 된다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키몬이 돌아오자 아테네 시민들은

이제 스파르타와 휴전 협상을 맺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로 인해,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잠시 휴전 조약을 맺게 되죠.

 

그리스 내부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 생각한 아테네는

다시 자존심을 일으키기 위해

키몬 장군을 중심으로 하여 페르시아와의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그만 키몬은 전장에서 죽고 맙니다.

 

아테네의 영향력이 약해진다 싶을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때마침 테베가 아테네를 공격하였고

코로네아 전투에서 테베는 승리를 거두며 보이오티아 전체를 수복하게 되죠.

 

이후로 아테네는 에우보이아 에서의 반란, 메가라에서의 반아테네 쿠데타 등

줄줄이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코린트 지협을 틀어막았던 길이 열리면서

스파르타까지 진군하며

아테네는 에우보이아를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스파르타는 아티카 지역을 휩쓸며 아테네를 궁지에 몰아넣었지만

완벽한 마무리는 짓지 않고 스파르타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이유로는 아테네의 페리클레스가

스파르타 왕의 조언자였던 클레안드리다스를 향한 뇌물이 성공했기 때문이었죠.

 

스파르타가 돌아가자 페리클레스는 다시 에우보이아로 군대를 이끌고 가

반란을 진압하게 됩니다.

스파르타 왕에게 아테네의 힘을 실어주었던

클레안드리다스는 사형을 당하게 되죠.

 

그동안 그리스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는

이제 협정이 타결됩니다.

평화조약에서는 서로의 세력을 인정하고

문제 발생 시에는 협의를 하자는 내용이었죠.

 

그리고 얼마간 평화가 이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가 돈독한 사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가령,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던 사모스섬에서 델로스 동맹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아테네가 위협에 처할 때도

스파르타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을 정도였죠.

 

 

이번 영상에서는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에 대해 다루어보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페르시아의 침공에서 함께 힘을 합쳐

그리스 민족의 화합을 보였던 아테네와 스파르타였지만

이제는 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되고 있었죠.

 

이러한 전개는 페르시아로서는

굳이 물리적으로 그리스를 점령할 필요 없이

편안하게 그리스인들끼리 힘을 빼는 상황이라 반갑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럼,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