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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페르시아 전쟁, 테르모필레 전투

Buddhastudy 2023. 8. 17. 19:08

 

 

문명의 시작이라는 고대의 4대문명 시절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기름진 땅을 둘러싸고

수메르, 아카드인들부터 페니키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를 거쳐

메디아, 리디아 등의 나라들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죠.

그러다, 메디아의 속국이었던 페르시아가 반란에 성공하면서

오리엔트 지방을 통일하게 됩니다.

 

기원전 513. 페르시아를 통치하고 있던 다리우스 1세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정령하고

다뉴브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영토를 확장하는데요.

이때 트라키아 반도에 있던 아테네 군사령관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의 진군을 막고자 다리를 불태웠고

이들의 악연은 약 20년 뒤인 마라톤 전투로 이어지게 됩니다.

 

기원전 499년에는

페르시아가 통치하고 있던 이오니아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죠.

이오니아 지역은 키루스 2세 치세 때 페르시아의 영역에 속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오니아 도시국가들 중

밀레투스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던 겁니다.

 

페르시아는 병합된지 그리 오래 되지않았던 이오니아의 반란에 맞서

사르디스에서 진압하기 시작했고

이오니아 측에서는 지원요청으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원군을 요청하여

그리스 연합군의 형태가 되었죠.

 

하지만, 막강한 힘을 가졌던 페르시아는 5년 만에 이오니아의 반란을 제압한 후

이오니아 지역의 소도시들을 모두 점령하게 됩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2년 뒤 마르도니우스를 사령관으로 하여 그리스 원정에 나섰으나

칼키디케 반도 아토스 곶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첫 번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죠.

 

또다시 2년이 흘러 기원전 490

다리우스 1세는 형제 아르타페네스와 장군 다티스에게 그리스 침공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오니아 반란을 도왔던 에레트리아를 1주일 만에 점령하게 되죠.

 

페르시아 함대는 에레트리아를 함락시키고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 평원에 상륙하여 아테네군을 맞이하게 됩니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스파르타는 종교행사를 이유로 파병을 거절했죠.

아테네는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였지만

밀티아데스의 전술로 인해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다리우스 1세는 아테네 정벌의 실패 소식을 듣고

이제는 그리스인들을 얕보면 안되겠다 생각하여

훨씬 더 거대한 규모의 원정을 준비합니다.

대원정 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다리우스 1세는 다소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요.

 

바로, 이전 전투에서 자신들의 병력을 제압했던 밀티아데스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됩니다.

밀티아데스는 뛰어난 전술가이자 명장으로서

페르시아 침입으로부터 아테네를 구한 그리스의 영웅이라고도 칭송받는 인물이기도 하죠.

그는 제국주의시대 서양 사학계의 자부심을 높인 인물로도 평가받는데

동양과 서양 최초의 충돌에서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서양의 역사가들로부터 마라톤 이후부터 세계 역사는 서양 중심으로 돌아간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서양 중심의 사고이니 참고 정도만 하면 될 것 같네요.

 

하지만, 밀티아데스가 아테네를 구한 명장이었다손 치더라도

국내 정치 파벌싸움에서는 밀리게 됩니다.

그는 마라톤 전투 이후 파로스 섬 공략을 강행하였는데

이 공략이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죠.

공략의 실패는 정치가들에 의해 아테네 민중에 대한 사기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밀티아데스를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밀티아데스는 사형을 받지는 않았지만

고액의 벌금과 함께 옥중 생활을 지냈는데

전쟁터의 상처로 인해 옥중에서 사망하였죠.

아테네를 구한 영웅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으며

이때부터 아테네의 중심 인물은 마라톤 전투에도 참여했던 테미스토클레스가 됩니다.

 

아테네 역사상 가장 천재 정치가로도 인정받는 테미스토클레스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서구권에서는 영국의 넬슨 제독과 함께 해군의 명장이라 불리기도 하죠.

테미스토클레스 이야기는 앞으로도 등장할 테니 추후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다리우스 1세의 마라톤 전투 패배는 그들이 지배하고 있던 속국으로 하여금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 이미지에 약간의 손상을 끼쳤는데요.

잠잠했던 이집트는 이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기원전 486년 다리우스 1세는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

당시 고령의 나이라 할 수 있는 6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나게 되죠.

 

 

 

다리우스가 죽은 후 왕의 자리는 크세르크세스 1세가 물려받게 됩니다.

그는 다리우스 말년에 함께 제국을 통치하기도 했는데요.

풍운아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만큼 강하고 단호한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아버지만큼의 능력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다리우스 1세가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하던 시절에는

꼼꼼하고 빈틈없는 일처리를 보이며

점령지들에게도 자율성을 부과하는 회유책을 시행했었죠.

하지만, 크세르크세스 1세는 작은 불만도 용납하지 않고, 강력하게 억압하는 자로

요즘 역사 마니아들의 평가에서는 망나니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죽고, 왕위에 오른 크세르크세스는

우선 눈앞에 있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였죠.

그리고, 아버지의 숙원이었던 그리스 정복을 위해 군사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동안, 몇 차례 그리스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페르시아는

육군 수십만명과 군선 1000여척을 아비도스에 집결시켰는데요.

9년 전, 오타스 곶에서 조난당한 경험을 토대로 운하를 파서 그 장소를 피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군량이 부족하지 않도록 코스의 지점마다 저장고를 마련했죠.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페르시아 병력은 170만이라고 주장했지만

현대 사회에 들어서 실제로는 170만은 부풀려진 숫자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물론,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정확한 기술을 하기로도 유명하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의 숫자를 일일이 헤아리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무튼, 고대 아테네의 인구가 시민권 소유자와 노예까지 모두 합쳐도 10만을 넘긴 정도였다고 하니

페르시아는 병력만으로도 아테네의 인구를 뛰어넘는 수치였을 것으로 예상해 봅니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란 병력은 모두 모아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큰 규모의 군대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진군 속도는 느려지게 되었죠.

 

느린 진군 속도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에게 시간을 벌어주었고

이어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30개 도시국가가 동맹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동맹을 맺는 과정은 그리 매끄럽지만은 않았는데요.

오히려 페르시아의 슈퍼 군대는 여유롭게 쳐들어오는 것만 같았으며

그러는 동안 그리스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이 이 세상에 모든 민족을 모아서는 그리스를 멸망시킬 것이다

 

그리스 연합군을 총지휘한 것은 그리스 제일의 강국이었던 스파르타였는데

대책회의를 열어도 도시의 십분의 일 정도만 참석했죠.

거기다 스파르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르고스 같은 나라는

스파르타와 함께 싸울 바에야 페르시아를 받들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와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동요하는 그리스인들을 격려하며 전쟁 준비에 임하게 되죠.

수십만 대군의 페르시아를 맞아 그리스군은 테르모필레 협로에 7천 명의 병력

아르테미시움에 271척의 전함을 배치합니다.

 

이 그림은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라는 작품인데요.

작품의 주제는 바로 기원전 480.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 당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의 군대가 페르시아의 군대에 맞선 내용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영화 300으로 잘 알려진 테르모필레 전투는

300명의 스파르타 완전 시민 1천명의 스파르타 외부 자유인

그리고 6천여명의 동맹시민으로 구성되었죠.

영화에서 망토만 두른 스파르타 전사 300명만이 테르모필레 협로에서 맞선 모습은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어쨌든 그리스의 총병력은 페르시아의 10%도 채 되지 않은

아주 불리한 전투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지식UP을 위해

테르모필레 전투의 레오니다스를 그린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대표적인 작품을 살펴보면요.

우리가 나폴레옹이라 하면 이미지상으로 딱 떠올린만한 작품

'알프스산맥을 넘고 있는 나폴레옹' 이라든가

누구나 한 번쯤 봤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있습니다.

또한, 루브르에서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는 작품이 있는데

가로 10미터, 세로 약 6미터 크기인 '나폴레옹의 대관식'에는

무려 204명의 인물들이 한 그림속에 담겨있죠.

제 개인적으로는 10여년 전 파리 여행 때 상당히 인상 깊게 봤던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럼, 다시 기원전 480년으로 돌아가서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전투를 살펴보도록 할까요.

 

양쪽 군대는 테살리아에서 아티카로 진입하는 좁은 길목인 테르모필레와

그 근처인 아르테메시움 앞바다에서 부딪히게 됩니다.

테르모필레 협곡의 좁은 곳은 그 폭이 15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아

방어를 하는 측에서 전술을 구사하기 좋은 지역이었죠.

 

페르시아군의 엄청난 병력은 숫자로 밀어붙여 이 곳을 몇 시간 만에 돌파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크세르크세스의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그리스인들과의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의 중장보병은 그 단단함이 익히 잘 알려졌으나

테르모필레의 스파르타군은 그 이상의 철통 같은 능력을 보였죠.

 

 

 

전투가 벌어진 첫째 날, 크세르크세스는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페르시아는 우선, 예전에 자신들이 점령했던 메디아군들로 구성된 병력을 보냈지만

철저한 군대 규율을 지닌 스파르타에게는 그 상대가 되지 못했다고 하네요.

스파르타의 수준 높은 병력은 마치 게임 플레이어처럼 페르시아군을 녹여내렸고

페르시아군이 계속해서 죽어 나가는 동안 스파르타는 전방의 병사와 후방의 병사를 교대하며

희생도 2, 3명 정도에 그쳤다고 합니다.

결국, 많은 희생을 치른 크세르크세스는 보다못해 페르시아 최정예인 아타나토이를 보내는데요.

헤로도토스는 이들을 아타나토이라 불렀지만

현대 사회에는 이모탈로 더 유명한 불사의 부대였습니다.

 

이모탈은 근접전투와 오거리 공격에도 모두 능하여

이전의 페르시아가 겪었던 이집트 정복이라든가

다리우스 1세 시절에도 빼어난 활약을 한 부대였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가장 강력했던 정예병 조차 정면대결에서는 손쉽게 격파했죠.

 

연전연패로 거듭난 페르시아는 테르모필레 전투의 둘째 날 다시 보병들을 보내 스파르타군을 공격합니다.

그리스 군대는 하루 종일 전투를 치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쳤을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되려 사기가 더 올라서 무적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죠.

하지만, 둘째 날 밤에 이 전투의 향방이 갈라진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바로 페르시아의 부를 탐했던 에피알테스라는 자가 크세르크세스 앞에 제발로 걸어들어가

우회로가 있다는 비밀을 발설하였죠.

이 때문에 그리스의 입장에서는 에피알테스는 악몽이라는 뜻이 되었다고 합니다.

 

에피알테스로 인해 페르시아는 협곡이 아닌 우회로를 알게 되었고

크세르크세스는 지휘관 히다르네스에게 이모탈과 함께 2만 병력으로 압박하라고 지시하였죠.

참고로 에피알테스는 포상은커녕 그리스 연맹측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테르모필레 전투 3째날, 새벽

정면과 우회로로 페르시아군이 밀려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스파르타 포함 그리스 연합군은

당황함을 감출 수 없었는데요.

7천 명의 군사로 수만 혹은 그 이상의 군대를 양쪽에서 맞이한다면 버틸 재간이 없었습니다.

이에,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1,500명만 이곳에 남고 나머지 6천은 후퇴를 하라고 명하게 되죠.

 

스파르타인은 후퇴하지 않는다라는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을 지키기 위해

남아서 싸웠다. 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명분보다는 훗날의 전투를 위해 나머지 6,000 군사를 보존시켰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남은 1,500명의 부대는 사방에서 몰려오는 페르시아군들과 싸워야 했고

죽을 힘을 다해 아니 정말 죽으면서까지 전투에 임하였죠.

이 싸움에서 페르시아의 장교들이자 크세르크세스의 동생들도 전사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야말로 마지막 순간까지 싸운 레오니다스 왕도 전사하였죠.

 

사흘 동안 이 전투를 지켜보던 크세르크세스는 더 이상 전투 구경이 지겨워서

궁병대를 동원해 그리스군 전원이 사망할 때까지 화살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전원이 사망한 그리스군 사이에서 레오니다스의 시체를 찾은 크세르크세스는

목을 자르고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는데요.

이는 그동안 페르시아가 전통적으로 적장을 예우해준 것과는 다른 처우였다고 합니다.

 

그리스 인들의 운명이 걸렸던 입구라 할 수 있었던 테르모필레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이제 아테네를 포함한 아티카 일대는 유린이 불가피하게 되었죠.

아테네서 농성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아테네 민회는 격론을 벌렸으나

그리스인들은 결국 살라미스로 도망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도착한 페르시아군은 남아있던 소수의 병력을 살육하고 아테네를 불태우기 시작했죠.

이 때 페르시아인들은 파르테논 신전까지 파괴하게 되는데

파르테논 신전은 그 후, 40년 뒤인 기원전 438년에 다시 완공되게 됩니다.

 

오늘은 지난 아테네군의 활약상을 다루었던 마라톤 전투에 이어

스파르타군의 이름을 알리게 한 테르모필레 전투에 대해 정리해 보았는데요.

페르시아군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아테네로 진격하게 됩니다.

 

아마, 다음 세계사 영상은 살라미스 해전으로 이어질 것 같네요.

그럼, 오늘도 끝까지 시청해주셔서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