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라이프루시딩] 비이원 시크릿,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Buddhastudy 2023. 11. 7. 19:52

 

 

 

오늘 제가 여러분들하고 나누기 위해서 준비한 테마는요

깨달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깨달음의 실체에 대한 부분이에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라는 것, 깨달음이 뭘까요? 깨달음.

이게 되게 재밌는 게, 여기저기서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출연합니다.

심지어는 나는 깨달았다뭐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나타나기도 해요. 그렇죠?

 

깨달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을 하죠.

, 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라니까 깨달았나 보다.’

그런데 뭐를 깨달았다는 거예요? 뭐를? 뭘 깨달았다는 거예요?

무엇을 깨닫는 걸까요?

 

존재의 실상

이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는 게 깨달음인 거죠,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냐면요

이것이 깨달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려면

그 깨달음에 대한 어떤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해요.

[깨달음에 대한 명확한 기준 필요]

어렵죠?

 

그런데 깨달음에 대한 명확한 기준 자체가 모호해요.

어떤 사람은 이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면

그게 깨달음이 되는 거고, 그 사람한테.

그게 뭡니까?

그 사람의 가르침의 말, 그 사람의 말을 따르는 사람들한테는

그 사람이 제시하는 어떤 그 기준이 깨달음의 기준이 되는 거고.

또 다른 사람은 아니다, 이것이 깨달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또 다른 말을 합니다.

그러면 뭐예요?

그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한테는 그게 깨달음의 기준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조금 중구난방이에요.

이 도판, 도판이라는 곳이 조금 중구난방이에요.

 

그래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실체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슬프죠, 슬픈 현실이죠.

 

그렇다면은 기준을 하나 정해야 돼요.

어떤 기준을 하나 정해야 하는데

존재의 실상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거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정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한테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 줄 만한 분이 한 분 계세요, 한 분 계십니다.

고대의 경전들도 여러 경전들도 있고 그렇지만

그 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을 모두 이해하기는 조금 힘들죠, 그렇죠?

이게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어떤 한 분이 등장하셔서

깨달음이란 무엇이다에 대해서 딱 하고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세요.

[깨달음의 명확한 기준 제시, 석가모니]

 

가히 인류 역사상 나타났던 수많은 스승들 중에서 원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께서 설하신 가르침에 의거해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게 되면

정말 재밌어요.

꿈이란 거예요, 세상이.

세상이 꿈이라는 겁니다.

[세상은 꿈이다]

 

 

#석가모니의 깨달음

 

세상 자체가 꿈이라는 얘기는 뭐냐면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말을 하고 있는 저나

제 얘기를 듣고 있는 여러분이나

전부 꿈속에 나타난 환영이라는 얘기예요.

어이가 없죠?

 

여러분이 꿈속에 나타난 환영이라면은 동시에 뭡니까?

이건 또 무슨 이야기예요?

여러분이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촉감으로서 인식하고

그다음에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뭐라는 얘기예요?

꿈이란 얘기예요.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꿈이란 얘기입니다.

충격이죠?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처음 알았을 때 어마어마한 충격에 휩싸였었어요.

 

그렇다면 이 가르침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싫다면 간단합니다.

세상이 꿈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증명하면 돼요.

근데 나중에 아시게 되겠지만 증명할 수가 없어요.

증명을 하면 할수록 뭐예요? 꿈이에요.

세상 자체가 꿈이에요. .

 

이것을 어떻게 표현을 하셨냐?

일체유위법, 인식되는 일체의 것이

인식의 대상으로서 인식되는 일체의 것이

여몽환포영, 꿈속에 나타난 환영과 같다라는 뜻이에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기서 일체의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일체의 것은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있고, 개념화할 수 있는 것,

개념 지을 수 있고 실체화할 수 있는 것

이 얘기는 뭐냐면

인식의 대상으로서 인식되는 모든 것이 꿈이다라는 얘기입니다.

환영이라는 뜻이에요.

어이가 없죠?

[인식되는 못든 것이 꿈이다]

 

예를 들어볼게요.

우리가 도라고 부릅니다. .

아니면 궁극의 하느님

아니면 위대한 영혼, 불멸의 영혼

아니면 순수의식, 우주의식, 합일의식 막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름을 붙일 수 있다라는 것 자체가 뭐예요?

인식의 대상으로서 대상화한 거예요.

이름을 지니는 모든 것, 형태를 지니는 모든 것

아니 도라고 부르든, 하느님이라고 부르든, 궁극의 실제라고 부르든

그 뭐가 되든지 간에

우리가 개념화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름을 가지는 것이죠.

 

이름을 가진다라는 것은

그 개념에 해당하는 어떤 상을 지닌다라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개념에 해당하는 상을 지니는 그 모든 것 자체가

꿈속에 나타난 환영이다라는 얘기예요.

 

이게 석가모님께서 제시하신 깨달음의 실체의 첫 번째 모습이에요.

 

간혹 가다 명상 수련과 같은 의식을 수행하는 공부를 하다 보면

우리는 순수의식이라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게 되는 것이라기보다 그냥 우리가 순수의식 그 자체예요.

 

예를 들어서 얘네만 순수 의식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눈앞에 컴퓨터, 모니터, 아니면 핸드폰, 액정, 산과 들, 벌판, , 저 하늘에 태양, , , 허공 그 무엇이 되더라도

길거리에 돌멩이, 들판에 피어 있는 풀꽃, 그 무엇이 되더라도 뭐라 얘기예요?

인식의 대상이죠.

일체의 유위법에 들어가는 겁니다.

인식의 대상으로서

인식되는 일체의 것이 전부 다, 전부 다 뭐라는 얘기입니까?

꿈이다라는 얘기예요.

, 어이가 없죠? 어이가 없습니다.

 

순수의식이라는 것도 인식됩니다.

순수의식을 체험하잖아요.

순수, ‘내가 순수의식이구나라는 걸 체험하잖아요.

그것마저도 뭐라 얘기예요?

꿈이다라는 얘기예요.

 

그러면서 참나, 참나라고 이름 붙이기도 해요.

진정한 나를 찾았다. 참나.

참나라고 이름 붙입니다.

이 참나도 뭐라 얘기예요?

꿈속에 나타난 상이란 얘기예요.

환영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이원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죠.

하지만 받아들이셔야 됩니다.

왜냐하면 증명이 돼요, 왜 이것이 꿈인지.

그것도 논리적인 방법으로 증명이 됩니다.

[모든 것이 꿈인 것을 논리로 증명 가능]

 

<시크릿을 깨닫다> 책 같은 경우에

이 부분을 논리를 통해서 증명하고 있는 책이에요.

 

 

#깨달음의 척도

 

세상은 단단한 형태로 고정되어 존재하는 어떤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말랑말랑한 꿈속에 나타난 공룡과 같은

꿈속에 나타난 산과 들같은 의식의 현현연이에요.

[세상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말랑말랑한 의식의 현현]

 

이것을 아는 게 깨달음의 첫 번째 척도가 됩니다.

 

 

혼란스럽죠?

혼란스럽고, 말 그대로 그게 뭡니까?

충격과 공포, 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거쳐왔던 과정이고요.

하지만 그게 세상의 실상이에요.

존재의 실체예요.

 

그럼, 여기서 문제가 나타납니다.

이 부분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수행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순수의식의 상태

그 모든 것을 아는 앎의 상태가 있어요.

 

그 앎의 상태에 안착해 있다가 깊어지게 되면

무한히 모름에 가까운 또 앎의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걸 존재의 핵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순수의식의 상태 너머에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으로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 이것이 궁극이구나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러한 순수의식의 상태를 궁극이라고 말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순수의식의 상태도 궁극은 아니다]

 

이 의식이라는 것도

꿈속에 나타난 어떤 하나의 환영과 같은 것입니다.

 

이유는 뭘까요?

인식의 대상으로서 인식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유위법에 해당하는 거예요.

 

그렇다면은 무엇이 진정한 존재의 실상일까요?

첫 번째, 인식되는 모든 것은 꿈이라는 것이고

모든 것이 꿈이라면 이 꿈이 무언가로부터 나올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런데 무언가로부터 나오겠지라고 생각한 다음에

이 꿈과 꿈꾸는 자를 분리해 버리는 순간

꿈꾸는 자마저도 뭐가 돼 버립니까?

꿈꾸는 자에 대해서 꿈꾸는 자를 상정해 버리는 순간

그 꿈꾸는 자의 이름을 도가 되든, 하느님이 되든, 궁극의 실제가 되든

뭐라고 어쨌든 간에 개념화하는 순간

그것마저도 인식의 대상이 되죠.

동일한 꿈속의 상이죠.

? 인식되는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꿈꾸는 자를 상정하는 순간 인식의 대상이 됨]

 

두 번째 척도

궁극의 실재라는 것은 인식의 대상으로서 체험될 수 없다라는 거예요.

[궁극의 실재는 인식의 대상으로 체험할 수 없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언어도단,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고

불립문자로서 성립시킬 수 없다라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도덕경에서는 첫 장에서 아예 대놓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도가도 비상도

도를 도라고 부르는 순간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도가 아니다.

 

이 영역은 이미 그 논리로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하지만 아주 직관적인 앎을 통해서

이 순수의식 너머가 알려지게 됩니다.

 

어떤 사실을 통해서요?

언어로서

인식의 대상, 체험의 대상으로서 알려지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통해서

이마저도 논리를 통해서 추론이 가능합니다.

논리를 통해가지고 설명이 가능해요.

가능한데, 가능하다 그래서 이것이 직관적인 깨달음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다만 그것을 보조하면서 완성시킬 수는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은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척도는

먼저 모든 것이 꿈이다라는 거예요, 모든 것이 꿈이다라는 것이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뭡니까?

우리는, 이 꿈은 무언가로부터 왔는데,

그 무언가는 이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진짜로 없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체험의 대상으로서 체험할 수 없는 것이에요.

 

깨달음의 척도 1, 모든 것이 꿈이다.

깨달음의 척도 2, 우리는 진짜로 없는 것으로부터 왔다.

 

이 두 가지가 깨달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척도예요.

거기서 또 세분화가 될 수 있는데

어쨌든 간에 이 두 가지가 깨달음을 이해하는 척도예요.

가장 중요한 척도예요.

이 두 가지 부분을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 품고 계시면 됩니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어떤 순수의식의 상태, 그것은 궁극이 아니에요.

그것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가는 어떤 앎이 있는데

그 앎은 이제까지 사람들한테 언어로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스승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것에 대해서 물어보면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겁니다.

하지만 그 침묵 자체가 뭐였던 거예요?

답이었던 거예요.

그 침묵을 알아듣는 것은 직관적인 앎의 영역이죠.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 이 직관적인 앎에 이르기 전까지는

논리를 통해서 표현이 가능합니다.

[직관적 앎에 이르기 전까지 논리로 표현 가능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 수준도 점점 상향 평준화되었기 때문에, 높아졌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어요.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실재, 어떻게 보면 가장 조금 까다로운 테마죠.

까다롭고 또 민감한 그런 테마이기도 합니다.

테마이기도 한데 어쨌든 간에

그 기준 자체가 모호한 깨달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척도로

이 두 가지 부분을 말씀드린 겁니다.

 

물론 여러분들 제가 말씀드리는 모든 것은

여러분들 안에서, 말 그대로 가슴으로부터 뻥하고 터져야 돼요.

이성적인 이해에 그치지 않고 이 가슴으로부터 뻥하고 터지면서

감성과 직관과 이성의 영역이 하나가 되었을 때

완전한 앎으로써 피어나는 거죠.

자리 잡게 됩니다.

 

나한테도 그런 날이 언제 올까?’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옵니다.

오는 게 아니라 이미 그것으로부터 펼쳐져 있어요.

그 앎으로부터.

 

무엇이?

지금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시는 이 순간이

그 앎의 순간으로부터 펼쳐져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이 이미 앎으로부터 펼쳐져 있다]

 

그 앎이 없다면은 여러분들은

지금 모르고 있는 이 상태를 과정으로서 체험할 수조차 없습니다.

이유는 뭡니까?

 

우리의 현재라는 것은

결과로부터 흩뿌려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현재는 미래가 결과가 회상하는 과거이기 때문에 그래요.

[현재는 결과가 회상하는 과거다]

 

깨달음이라는 것의 실체에 대해서

간략하게 기준점이 될 수 있는 요소에 대해서

간략하게 한번 살펴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또 다른 주제를 가지고 찾아뵐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