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명상의 모든 것] 끌어당김의 법칙의 양자적 작동 방식 | 저항없이 창조하는 초전도 끌어당김의 원리

Buddhastudy 2023. 10. 10. 19:52

 

 

떨어지면서 소원을 빌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절벽이 있었습니다.

세 친구가 그 소문을 듣고 바위를 찾아갔습니다.

 

첫 번째 친구가 달려가서 뛰면서 말했습니다.

용이다!’

그러자 그 친구는 용이 되어서 날라갔습니다.

 

두 번째 친구가 달려서 뛰어들며 말했습니다.

학이다!’

그러자 그 친구는 학이 되어 날라갔습니다.

 

세 번째 친구가 그걸 보고 절벽을 향해 뛰는데

하필 똥을 밟아서 미끄러져 떨어지며 말했습니다.

, 개똥이다!’

 

 

--

예전에 유행했던 유머죠.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우리도 이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

 

환경은 마음의 표현이라고 하죠.

끌어당김의 법칙에 따라

우리가 마음먹은 것은 우리 앞의 환경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여러분은 생각으로

여러분의 삶에 보물을 창조하고 있었을까요?

개똥을 창조하고 있었을까요?

 

마음이 현상을 창조한다는 말은

영성의 가르침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 역학에서 증명하는 과학적인 사실과 관계되어 이해를 하면

끌어당김의 법칙이 더욱 현실적으로 확 와닿는 면이 있습니다.

, 정말 잘 적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최근에 본 양자 컴퓨터 관련 내용 중에서 굉장히 와닿는 비유가 있던데

이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중슬릿 실험에서 밝혀진 것처럼

전자와 같은 아주 작은 입자는 관측될 때 입자로 존재하는데

관측되지 않을 경우에는 파동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하죠.

 

이 파동이라는 것은 전자의 위치가 딱 어디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을 수도 있고, 저기에 있을 수도 있는

확률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전에 알던 원자 모형은 핵의 주위를 전자가 도는 모습이었죠.

그런데 실제로는 전자구름 모형이라고 해서

핵의 주위 어딘가에 전자가 있을 확률 분포를 표시한 형태라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능성, 확률로 존재하다가

관측을 하면 하나의 위치로 보이게 됩니다.

즉 관측되기 전에는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살아있을 수도 있고 죽어 있을 수도 있는 상태가

동시에 중첩되어 존재한다고 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관측을 하게 되면 고양이는 살아있거나

죽어 있는 둘 중의 하나의 상태로

파동함수가 붕괴된다고 합니다.

 

 

약간 어렵긴 한데 필요한 결론만 취하자면

아무튼 입자는 중첩 상태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측을 하면 한가지 상태로 확정지어 나타납니다.

 

양자 컴퓨터가 이런 현상을 이용한다고 한다고 하는데

이것의 비유가 끌어당김의 법칙과 굉장히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로의 길을 찾는다고 하면

기존의 컴퓨터는 하나하나 길을 일일이 다 가보면서 결과값을 찾습니다.

이러면 미로가 복잡할수록 시간이 오래 걸리겠죠.

 

그런데 양자 컴퓨터는 모든 선택지와 가능성이 동시에 중첩되어 있는 상태에서

목적지에 도달한 결과를 딱 관측한다는 것입니다.

직접 막힌 길들을 일일이 다 가볼 것이 아니라

골인 지점에서 지키고 있다가 나온 사람에게

'너 어떤 길로 왔니?'하고 물으면 그 경로를 쉽게 찾겠죠.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컴퓨터에 비해서

양자 컴퓨터는 암호 해독과 같은 연산이 엄청 빠르게 가능하다고 하고요.

 

이 지점이 양자장에서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관측하여 현실로 창조하는 것

일상에서 끌어당김의 법칙을 활용하는 방식과 일치하죠.

선명한 목표가 없거나, 주변 환경에 순응하며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이런 것, 저런 것을 시도하면서 사는 것은

기존의 컴퓨터에서 미로를 찾는 방식과 동일합니다.

잘하면 목적지에 도달하는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지만

중간에 헤매거나, 막힌 길에 도달하거나 지치게 될 수 있죠.

 

반면에 내가 원하는 목표를 선명하게 상상하고

거기에서 오는 기쁨, 충만함과 같은 느낌을 미리 느끼면서

어떻게 이런 결과를 이루어 냈지?’ 라고 묻는 것은 양자 컴퓨터의 방식이죠.

수많은 선택지를 일일이 가보지 않고도

최적의 루트가 점점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서 물질적 인간의 방식과 영적 인간의 방식이 나뉘게 됩니다.

물질적 인간이란

주변 환경이나 자신의 몸과 같은 외부 환경, 조건에

자신의 내면이 영향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학벌이 낮으니 할 수 있는 일도 이런 일밖에 없어라거나

다리를 다쳐서 근육이 굳었으니, 집에서 생활해야겠다.’와 같은 식이 되는 거죠.

몸이나 환경과 같은 외부의 조건에 내면이 영향을 받습니다.

 

영적 인간이란

반대의 방식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외부의 조건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내가 되고 싶은 모습, 하고 싶은 일은 이런 거야.

학벌이 낮아도 이걸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뭘까?’라는

상상에서 출발하여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죠.

 

또는 교통사고를 당해서 크게 다치고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불구가 되신 분들이 있죠.

의사들도 더는 안된다고 포기했는데도 엄청난 재활훈련 끝에

걷는 정도가 아니라 마라톤 대회에 참여하신 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도

내면의 힘으로 몸을 비롯한 외부의 환경을 변화시킨 사례죠.

 

물질적 인간의 방식이 주어진 조건을 가지고

결과를 찾아가는 기존의 컴퓨터라면

영적 인간의 방식은 내가 원하는 결과값을 관측하여

그 과정을 현실로 창조하는 양자 컴퓨터의 방식이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적 인간이 무조건 나쁜 것이고

영적 인간이 좋은 것이다라는 개념은 아닙니다.

 

본래 영적 존재인 영혼이

물질의 몸에 깃들어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조화롭게 운영하며

영성의 진화를 가속하는 구조이죠.

 

지구에서의 삶을 마치고 몸을 벗고 영으로만 남으면

어차피 영적 인간에 가까워집니다.

이 영적 인간의 진화도에 따라서

자신의 마음으로 주변 환경,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범위가 커지게 됩니다.

 

우리가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그런 분들이죠.

높은 급의 신이 될수록 우주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많게 됩니다.

내 마음으로 주변을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우주의 주체가 됩니다.

 

반면 물질적으로 치우친다는 것은 몸의 속성

즉 동물의 속성이 강해지는 것이죠.

몸에서 오는 신호에 따라 배고프면 먹고

발정기가 되면 번식을 합니다.

 

제가 있는 동네에 길고양이들이 있는데

어느 분이 먹이를 꾸준히 줬더니

얘들이 계속 새끼를 쳐서 아주 고양이 천지입니다.

예쁘긴 한데 볼 때마다 대책이 서질 않습니다.

어휴 얘들을 어떡하냐

 

이 고양이들이 영적이었다면

아 식량에 한도가 있으니 우리 가족계획을 합시다.

인간에게 중성화 수술을 해달라고 부탁합시다.’ 이러겠죠.

또 이 고양이들은 자신에게 조금만 위협이 되면

발톱을 세우고 공격적인 성향을 띄죠.

 

물질적 인간도 비슷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건드리는 사람은 적으로 생각하고 안티가 되고 공격을 합니다.

외부의 상황에 내면이 그대로 반응하는 수동적인 객체가 됩니다.

 

영적인 인간은

감정이 상할 때 그런 상황을 제공하는 상대방을 이해를 하고

포용하며 풀어주는 노력을 합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외부의 상황을 바꾸는 능동적 주체가 됩니다.

 

사실 에너지의 측면에서 본다면 모든 것이 하나의 에너지 장에 있죠.

물질도 분자, 원자, 양성자로 끝없이 분해해 들어가면 결국 에너지만 남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내 안과 밖의 경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과 물질의 경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모두가 에너지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됩니다.

 

다만 이런 에너지의 장 속에서

내 마음으로 내 삶을 창조하고 주변을 바꾸는 능동적 주체가 되는가?

반대로 주변의 환경에

내 마음이 영향을 받고 조건에 반응하는

수동적 객체가 되는가가 영성을 결정하게 됩니다.

 

내 마음과 환경의 상호작용이 없을 수는 없지만

내가 긍정적 영향을 주거나

상황을 창조하는 능동적 주체의 성향이 커질수록 영성이 높아지고

주변에서 영향을 받거나, 환경에 따라가는 수동적 객체의 성향이 커질수록

영성이 낮아지게 되는 것이죠.

 

때문에 끌어당김의 법칙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상상하고

그것을 현실로 창조해 가는 과정은

영성을 높이는 우주의 원리가 됩니다.

다만 어떤 미래를 상상하는가 하는 것은 차이가 있겠죠.

 

단순히 돈을 벌고 싶다.

좋은 집과 멋진 차를 갖고 싶다는 상상이라면

끌어당김이라는 과정은 영적이지만 집과 돈이라는 결과는 물질적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영적인 것일까요?

진선미,

즉 진리를 깨우치고, 선함으로 영향을 주며,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순화시키는 것들이

영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렇다고 돈이나 집이 나쁜 것은 아니죠.

그냥 결과가 아니라 도구일 따름입니다.

돈이라 하더라도 이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무엇을 이롭게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영적인 것이 됩니다.

 

집에 관심을 가지며

이 집의 공간 구조와 동선이

이곳에 사는 거주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심미적인 아름다움은 어떻게 될까에 대해 생각한다면

영적인 것이 되겠죠.

 

이처럼 사실은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의 물질적 가치를 통해 영적 가치에 접근하면

그것이 영적인 것이 됩니다.

 

이런 개념이 없이 물질적 가치에만 치중할 때는

본능에 치우친 물질적 인간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끌어당김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창조해 가는 영적 인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자신의 목표를 제대로

그리고 선명하게 상상하지 않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제가 예전에 어떤 분에게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이룰 수 있다면

지금 제일 성취하고 싶은 목표가 어떤 것이세요?’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이 어떤 동호회의 회장이셨는데,

동호회 회원도 늘리고 활성화하는 게 좋겠죠.’ 라고 하십니다.

벌써 말만 들어도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죠.

그래서 왜 그런 목표를 생각하세요?’ 라고 물으니

저한테 기대하는 사람도 많고, 또 지금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라고 합니다.

이러면 이 목표가 이루어질까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나온 목표가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의 의무, 그리고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목표인 것이죠.

 

이분처럼 책임감도 강하시고

또 마음이 약한 분들은 자신의 내면의 열정보다는

의무감이나 주변 분들을 많이 생각하게 되죠.

그러다 보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죠.

일단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고

주변을 보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먼저 주변의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놓아 버리는 것이 필요하죠.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나는 어떤 것을 진정으로 원하는가?'를 성찰하여 답을 찾을 때

내 온몸과 마음이 이 목표를 향해 정렬이 됩니다.

여기에서 끌어당김의 에너지를 가져올 수 있게 되죠.

그리고 나서 이 목표를 주변의 기대나 역할과 조화를 시키는 것이

자신의 열정도 찾으며 주변과도 상생하는 방법이 됩니다.

 

이렇게 선명하게 자신의 목표를 상상했습니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현실의 창조가 가능할까요?

내가 마음에 품은 것은 무한한 가능성이 중첩된 세계인 양자장에 전달이 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내가 생각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죠.

의식에서 생각하는 것이 있고

또 한 편으로는 무의식에서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크게 사업을 성공시킨 사업가가 될 거야.’라고 생각하면

또 한 편으로는 마음에서

내가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죠.

 

긍정적이고, 아름답고, 멋진 미래를 상상하고 창조하려 하지만

내면의 무의식에 그동안 쌓여 있던

부정적인 경험들, 부정적인 감정들이 다른 신호를

우주 지성이라고도 하는 양자장에 보냅니다.

 

A를 원한다고 했다가, A를 부정했다가, B를 원했다가 하는 식으로

신호가 계속 왔다갔다 하니 우주의 지성은 이렇게 말하겠죠.

당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건 들어줄 게.

그런데 도대체 뭘 원하고 있는 거지?’

 

양자장에 일관된 신호를 보내려면

마치 초전도체와 같이 내 마음에서 저항이 0이 되어야

온전한 신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 안에서 이런 저항의 역할을 하는 것들은

과거의 경험이자 과거의 감정들이죠.

 

이 놓아 버리지 못한 감정들은

뇌에서는 고정화된 시냅스 연결망이 되고

하나의 낡은 프로그램이 되어

내가 어떤 조건, 어떤 환경이 되면 동일한 반응을 하도록 만들게 됩니다.

 

어려서 개에게 크게 놀랐던 사람은

커서 자신보다 작고 순한 개를 봐도 무서워하는 것과 같죠.

내가 개를 사랑하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려고 해도

과거의 조건화 된 프로그램이 개만 보면 놀라게 만듭니다.

 

아까 물질적 인간은 외부의 환경에 내면이 영향을 받고

영적 인간은 내부, 즉 상상과 생각으로 외부의 현실을 창조한다고 했죠.

과거의 낡은 시냅스 연결, 낡은 프로그램, 정체된 감정, 오래된 에너지들은

외부의 조건, 환경에 내가 동일하게 반응을 하고

영향을 받도록 하는 원인이 됩니다.

 

현실을 창조하는 것을 막는 저항이 되고,

영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죠.

 

뇌파의 개념으로도 접근한다면

이런 저항과 명상의 원리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보통 델타파에서 쎄타파까지는 잠잘 때 나오는 파장이라고 하죠.

알파파는 명상이나 이완 상태에서 나옵니다.

베타파는 평상시 깨어 사고 활동을 할 때 나오는 파장입니다.

 

이 베타파에서도 높은 대역,

즉 고베타파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발생하게 됩니다.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뇌에서 생존을 담당하는 영역인 편도체가 활성화됩니다.

편도체를 활성화시킨 대상은 적으로 인식합니다.

한마디로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되고,

본능적으로 투쟁-도피를 준비하게 되죠.

아드레날린이 나오면서

소화기나 면역을 담당하는 부분은 당장 필요가 없으니

일단 기능을 최소화합니다.

당장 적에게 달려들어 싸우거나 아니면 재빠르게 도망을 쳐야겠죠.

여기에 필요한 심장 박동이나 근육과 같은 기관들이 활성화됩니다.

 

이런 고베타파의 상태는

몸을 지키기 위한 본능이 가장 활발해지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될수록 물질적 인간에 가까워지는 것이죠.

 

상상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능동적 주체 보다는

주어진 환경에 대응하여 반응하는 수동적 객체의 입장이 됩니다.

초전도체가 되어야 하는 마음에

저항이 발생하고 쌓이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반면 알파파의 상태는 어떨까요?

이완에 들고 명상을 하면 알파파로 들어갑니다.

이 상태에서는 전두엽이 활성화되고

생존을 담당하는 편도체가 잠잠해집니다.

이것저것 분석하고 판단하거나,

시간과 공간을 처리하는 기능도 볼륨이 낮아집니다.

이것은 환경, 물질과 멀어지며 점차 영적 인간이 깨어나는 상태이고,

잠재의식에 접근하게 됩니다.

 

물론 더 깊이 파장이 내려가면 알파파에서 쎄타파로,

쎄타파에서 델타파로 내려가게 되죠.

점점 파장이 내려갈수록 잠재의식의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아까 쎄타파나 델타파는 주로 잠잘 때 나오는 파장이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명상에 깊이 들면 의식이 깨어 있으면서도 쎄타파나 델타파까지 내려가게 됩니다.

이것을 잠잘 때 나오는 쎄타, 델타 파와 구분하기 위해

통칭해서 명상 알파파라고 하기도 합니다.

명상 알파파가 델타파 이하인 0.1Hz0.01Hz

아주 낮아질수록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잠재의식의 아주 낮은 곳까지 접근하는 것이죠.

 

실제로 명상을 하면서 깊이 들어가면 이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자신이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나 골목길까지 떠오르기도 합니다.

보통 꿈을 꾸고 나서 깨면 그 꿈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잖아요?

그 잊고 있었던 옛날의 꿈까지 기억을 하기도 합니다.

아 옛날에 꿈에서 이런 곳이 있었지하죠.

잠재의식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던 것들이 풀려나오는 것이죠.

이런 것도 무의식 정화의 일부가 됩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무의식 정화라고 하면

억제되어 있던 내면의 감정과 같이 큰 덩어리의 에너지를 풀어내는 것을 말하죠.

그런데 무의식에 있는 더욱 고운 것들, 기억도 나지 않는 먼지 같은 것들은

이렇게 깊은 명상속에서

파장이 내려가면서 에너지와 함께 씻겨 나가게 됩니다.

이런 것들까지 떠오르지 않게 되면

무의식이 완전히 정화가 된 것이죠.

명상을 하면서 어떤 잡념도 없게 됩니다.

 

잡념이라는 것이 사실 알고 보면

나의 무의식에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기록된 정보와 에너지들이

어떤 방식으로건 표출되는 것들이죠.

 

어쨌든 이렇게 고운 먼지까지 씻어내는 무의식 정화는

물론 나중의 얘기입니다.

일단은 바위와 같이 큰 것들을 정화하는 것이

내 마음의 저항을 없애는 우선 순위가 되겠죠.

무의식의 정화는 내 마음에 갇혀 있던 감정,

억압된 에너지를 흐르게 하면서 시작이 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인터넷에서 어떤 분이

한 유명 연예인의 나약한 모습을 보면서

패고 싶다고 올려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본인은 외부에 의해서 자신이 규정되지 않고

영향받지 않는 강한 남성이라고 어필을 하면서요.

 

이분이 왜 연예인의 나약한 모습을 보며

그런 분노한 반응을 했는지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취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잠재의식에 있을 수 있죠.

그러니 그 반작용으로

나는 영향 받지 않는 강한 사람이다.’ 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계속 암시를 걸고

주변에 그것을 과시하게 됩니다.

취약함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고 감추는 것이죠.

 

그리고 유명한 연예인의 나약한 모습을 볼 때 자신의 두려움이 투사됩니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되는데 왜 약한 모습을 보이는가?’

이러면서 패고 싶다는 분노가 올라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내면이 강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강하고 주변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굳이 어필하지도 않죠.

그냥 그게 당연한 것이라서 그렇게 살 뿐입니다.

다른 취약한 사람을 보고 자신의 자아를 투사해서 분노하지도 않죠.

진정한 강자는 오히려 취약한 사람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만일 이런 경우라면

무의식을 정화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로는 내가 취약함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이건 인정을 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 되죠.

인정도 하지 않으면 출발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인정을 하면

두 번째로는

자신이 이런 상태임을 말로 정의하고 선언합니다.

나는 취약한 상황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말로 하고, 그 말을 귀로 들음으로써

자신의 무의식을 명확하게 하는 효과가 있죠.

이렇게 되면 다음에 그런 취약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나

두려움 등 억압된 감정이 올라올 때 잘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세 번째로 이런 감정이 올라올 때 알아차렸으면

외면하거나 억누르지 않고 가만히 그것을 느껴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불편한 감정은 몸의 물리적 통증과 같은 마음의 통증인 것이죠.

물론 그 강도는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예를 들어 본다면 가시에 찔린 정도의 아픔입니다.

방법을 알고 가만히 견뎌보면 그렇게 엄청난 고통이 아닌데,

우리는 마음의 통증을 특히 두려워하고 회피하면서 더욱 키우는 경향이 있죠.

 

몸의 통증과 다른 점은

실제 가시는 뽑아내고 처치를 해야 통증이 사라지는데,

이 마음의 통증은 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힘을 빼면서

, 내가 취약해지는 게 불편한 마음이 있구나

두려움이 올라오는구나라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리고 이 불편함이 지나갔구나’ ‘두려움이 사라졌구나

느끼게 되면 억압되어 있던 감정이 뿌리를 거두고 흘러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몇 번 반복이 되면

다음에 내가 취약해지는 상황, 뭔가 약자가 되는 것 같은 상황이 와도

불편함이나 두려움이 없이 괜찮아지게 됩니다.

이러면 이 부분의 무의식이 정화가 된 것이죠.

 

이렇게 억압된 감정을 흐르도록 하는 것 외에

뇌의 시냅스 측면에서도 무의식 정화를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특정한 상황이 될 때 특정한 반응을 일으키고

저항을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습관이죠.

마치 플란다스의 개가 아니라 파블로프의 개 실험과 같습니다.

개에게 먹이를 주기 전에 종을 울리는 것을 반복하면

나중에 개는 종 소리만 들어도 먹이를 연상하고 침을 흘리게 됩니다.

뇌의 시냅스가 그렇게 활성화된 것이죠.

 

우리가 특정 상황이 될 때 특정 감정 반응을 일으키는 것,

즉 주변 상황에 내면이 영향을 받고 반응하는

물질적 인간의 특성도 이와 같습니다.

동일한 반응을 몇 번 하다보면 뇌가 그렇게 연상되도록 길들여지는 것이죠.

이 오래된 반응의 시냅스 연결을 끊고,

긍정적이고 현상을 창조하는 시냅스를 재구성해야겠죠.

 

여기에 참나, 또는 순수의식의 방법이 유용하게 활용이 될 수 있습니다.

참나, 순수의식에 머무는 것은 마치 기어를 중립에 놓는 것과 같습니다.

몸과 감정, 생각에 딸려가지 않고 분리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텅 빈 상태가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몸도 나가 아니고, 감정도 나가 아니고, 생각도 나가 아닌 상태,

그냥 존재 그 자체인 상태로 있게 되죠.

 

이 참나에 머무는 것을 훈련을 하면

특정 상황에서 반응하려고 할 때 마치 중립기어처럼

반응이 아닌 정지 상태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 중립기어를 반복하게 되면 뇌의 기존 시냅스 연결이 끊어지게 됩니다.

 

종이 땡 해도 음식을 먹지 않다 보면

나중에는 땡 쳐도 침이 나오지 않는 거죠.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하게 반응하던 습관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주어진 조건, 환경, 과거의 감정과 기억에 영향을 받던

물질적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이것도 저항이 0인 초전도체 마음이 되어 가는 것이죠.

 

여기에 미래에의 상상을 통해 긍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무한한 가능성이 중첩되어 있는 양자장에서

내가 원하는 현실을 창조해가는 영적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과학적인 표현으로 양자장이라고 하지만,

영성관련 가르침에서는 우주 지성이라고도 하고 우주 의식이라고도 하죠.

전통적으로는 우주를 창조해 가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조물주라고도 합니다.

 

이 조물주의 분신인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조물주의 속성, 신성을 찾아

그것을 밝혀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

그 능력을 연결 받아 현실을 창조해 가는 과정

우주 진화의 능동적 주체가 되어 가는 과정이

곧 영성의 진화이기도 한 것이죠.

 

 

정리해 보면

밖에서 안으로,

즉 외부의 환경, 몸에 의해 내면이 영향을 받는 것은

물질적 인간의 속성입니다.

 

안에서 밖으로,

즉 자신의 내면, 즉 생각과 상상의 힘으로

무한한 가능성의 장에서 원하는 현실을 창조해 가는 것

끌어당김의 법칙을 실현해 가는 것은

영적 인간의 속성입니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것은

본능이 지배하는 물질적 인간에서

이성과 상상이 주관하는 영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되겠고요.

이런 영적 인간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내 안의 저항입니다.

무의식의 정화를 통해 내 안의 저항을 줄여 나갈 때

양자장, 우주의식에 보내는 나의 신호는 순수하게 전달이 되며

그것이 점차 현실로 관측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현실을 창조하는 능력, 우주의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갈수록

우주 의식인 조물주와 가까워지는 영적 상승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일상 속에서 관성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닌

중립 기어의 멈춤을 실천하고,

, 생각, 감정으로부터 분리된 참나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그를 위한 훈련이 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