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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7 : 오두미교 & 흑산적 장연

Buddhastudy 2024. 1. 3. 19:34

 

 

영제와 십상시의 폭정에 항거하기 위해

전국 단위로 일어났던 황건적의 난은

황보숭과 주준, 노식과 동탁으로 구성된

중랑장들의 지휘 아래 진압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과 이를 진압하던 관군들의 처절한 싸움 후에도

십상시들은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혼란이 진정된 후에는, 더욱 자신들의 안위에 힘을 썼습니다.

 

수많은 관료들은 황제에게 사리사욕을 밝히는 환관들을

참수해달라는 상소문을 끊임없이 올렸으나

그럴 때마다, 되려 십상시는

상소문을 올린 자들을 모함하는 내용으로 영제를 설득하여

그들을 옥에 가두거나 자리에서 파면시켰습니다.

 

조정 안에서는 권력의 질서조차

환관들의 손에 어지럽혀지고 있으니

그들의 관심 밖인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궁핍해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황건적의 난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서는 크고 작은 난이 발생했는데

그 중, 익주 파군에서는 오두미교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오두미교는 원래 황건적의 태평교와 마찬가지로

도교 계통의 민중 종교로, 당시 교에 입단하려면

쌀 다섯 두, 1리터 정도의 쌀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오두미교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오두미교는 1847월에 봉기해 익주, 한중의 군현을 침탈했는데

중앙정부에서는 이들을 두고 쌀로 사람들을 현혹한다 하여

쌀 도둑이라는 뜻을 지닌 미적(米賊)’ 이라고 불렀습니다.

 

참고로 현대의 교단 종교로서 도교의 원류는

삼국지 시대의 태평도와 오두미도

두 교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오두미교는 황건적의 난을 일으킨 태평도와 비교해 볼 때

신 앞에서 죄를 회개하여 병을 치유한다는 점에서는 흡사하지만

당시, 사회에 대응하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였습니다.

 

태평도는 국가가 혼탁해진 죄의 근원을

부정부패로 만연한 후한 정부로 간주하여

태평도의 교리에 입각한 종교국가를 세우기 위한

목표를 갖고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반해, 오두미도는 중앙정부와 직접 부딪히는 것은 피하고

외곽 지역인 한중을 차지하면서

자신들이 생각한 독립적 사회를 만들어갔고

후한이 멸망할 때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해 갔습니다.

 

참고로, 위촉오 삼국으로 나뉘어졌을 때

위나라의 조조는 오두미도의 전파를 용인하였고

삼국시대가 끝난 5세기 경에는 오두미교는 국가 종교로 기능했습니다.

 

이후, 이름은 약간씩 변했지만,

수당과 명청 시대까지 명맥을 이어가

현대 시대에 이르러 지금의 도교가 되었습니다.

 

 

 

한편, 황건적의 난이 발생했을 무렵

삼국지에서 마등, 마초 부자로 유명한 지역인 서량, 량주(凉州)에서도

선령강족과 포한 및 하관의 도적들이 연합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량주는 이민족들도 많이 살아가던 중국 변방으로

강족, 호족과 이 지역을 떠돌아다니던 도적떼들이

심심찮게 반란을 일으키던 지역이었습니다.

 

중앙에서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혼란에 휩싸이자

이 틈을 타, 량주에서는 도적들이 모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도적들은 황중의 강족 수령이었던 북궁백옥을 왕으로 삼고

호족 이문후를 장군으로 추대하여 호강교위 영정을 죽였습니다.

 

이어, 백궁백옥과 이문후는 금성군을 쉽게 함락하기 위해

그 일대에 명성이 높았던 변장과 한수를 겁박하여 군사를 이끌게 하여

금성태수 진의를 죽이고 금성을 차지했습니다.

 

서량 지역의 반란을 두고 조정에서는 변장ㆍ한수의 난이라 불렀는데

한수는 후에 만나는 마등과 두터운 의형제 관계로

한수와 마등의 이야기는 추후,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두미교의 반란과 변장ㆍ한수의 난에 연이어

다음 해인 185년에는 전국 각지 여러 곳에서 도적떼들이 출몰했습니다.

이들은 황건적의 난에 가담했던 사람들이나

관리들의 폭정에 이기지 못해 도적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장우각과 저비연을 우두머리로한 흑산적은

큰 규모의 두령은 3~4만명을 거느리고

작은 두령은 5~6천명 규모의 다수의 군세가 모여

그 수가 최대 100만 명에 달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흑산적의 수가 100만이 될 수 있다는 추측은

다소 과장이 섞일 수도 있지만

이들의 활동 영역은 낙양 주변의 사예 북부와

병주 전역 그리고 기주 북동부로 매우 광범위했습니다.

 

또한, 황하와 태행 산맥을 끼고 있어 지세가 험하였고

흉노 및 오환의 영역과도 그 활동 영역이 겹쳤습니다.

 

이 때문에, 정부의 수탈을 이기지 못한 유랑민들은

중앙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흑산적으로 대거 몰려갔습니다.

흑산적으로 몰려간 유랑민들의 수는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그 수가 늘어갔지만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것은 황건적의 움직임에 따라

이들도 정부의 대한 무장 봉기에 나섰습니다.

 

흑산적에는 여러 두령들이 있었는데

그 중, 세력이 컷던 장우각과 저비연이 연합하였고

장우각은 저비연의 추대를 받아 흑산적 전체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우각은 기주 거록군 영도현을 공격하던 중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어 죽음을 맞이하는데

죽기전에 자신의 성인 을 저비연에게 물려주면서

흑산적의 수령 자리를 물려줍니다.

 

 

 

흑산의 두령들은 대부분 천민 출신으로

제대로 지어진 이름을 가진 자가 거의 없었고

이 때문에, 도적질을 하던 중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가령, 목소리가 큰 자의 이름은 뇌공

왼쪽 수염이 8자가 될 정도로 길었다고 해서 좌자장팔

머리가 좋고 시야가 넓다고 해서 대현(大賢)

날쌔고 용맹하고 몸이 빠르다 하여 비연 등으로 불렸습니다.

 

흑산적의 수령인 장우각이 죽은 후

비연은 성을 이어받아 이름을 장비연 또는 장연 이라 불렸고

도적들의 신임을 얻게 되면서

흑산적의 세력은 급속도로 성장하였습니다.

 

장연은 상산의 조자룡과 동향인 기주 상산군의 천민 출신으로

후한의 혼란을 틈타 마을의 건달들을 모았고

산지와 호숫가를 근거지로 삼아 자그마한 도적단에서 시작해

장우각을 만날 무렵에는 2만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이후, 장연은 흑산적의 수령이 되어

중산, 상산, 하내 등지의 산간 계곡의 도적들은

모두 그에게 귀속되었으며

하북 지방의 여러 군현을 약탈하고 다녔습니다.

 

대다수의 도적들이 장연을 맹주로 받들어 모시게 되니

황하 이북의 모든 군현에서는

단 한 곳도, 흑산적의 도략질을 피해가는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장연이 이끄는 흑산적은 기세를 꺽을 수가 없었고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이미 지쳐있던 조정에서는

대대적으로 흑산적을 진압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흑산적은 황건적처럼 나라를 뒤집고자 하는 뜻은 없었고

되려 조정과 합의를 이루는데 성공하여

중앙정부에서는 장연에게 평난중랑장 이라는 벼슬을 내렸습니다.

 

평난중랑장의 벼슬을 얻게 된 장연은

동시에 관리를 천거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져

사실상 흑산적은 더 이상 도적이라기보다는

조정에 관리를 보내는 등 자치정부처럼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장연만 관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두령들도 천민에서 갑자기 관직을 받게 되면서

내부에서 세력 다툼을 하며, 이들의 조직력은

예전만큼 탄탄함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장연은 훗날 영제 사후 시절, 한나라가 군벌시대로 접어들면서

흑산군 세력으로서,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려 했지만

장연 주변의 갈등 세력은 원소와 조조였기 때문에

각종 전투에서 원소와 조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한편, 영상 앞부분에 언급했던

서량에서 일어난 반란의 주도자였던

백궁백옥과 이문후는 내부 반란으로 인해

한수에게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한수는 서량 진영 10만 군사를 취합하여 농서로 진격하였고

농서 태수 이상여는

조정을 배반하고 한수에게 항복했습니다.

 

 

오늘은 삼국지 17번째 시간으로

황건적의 진압 이후에도

오두미교의 난, 흑산적의 난, 그리고

서량의 변장ㆍ한수의 난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