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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6 : 십상시의 모함

Buddhastudy 2023. 12. 28. 20:03

 

 

서기 184, 악정과 생활고에 시달린 농민들은

한제국을 뒤집고자 황건적의 난을 일으켰으나

교주 장각은 병사하고

동생들인 장량, 장보가 전사하여

중심 지도자가 없어진 황건적들은 관군들에게 진압되었습니다.

 

황건적을 진압하는 데 주력 장수였던 황보숭은

황제에게, 예전에 있었던 당고의 금 사건에서

억울한 누명을 덮어쓴 사인들을 풀어달라 요청했는데

영제는 평소 행실이 바른 환관인 여강에게

황보숭의 요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논했습니다.

 

여강은 스스로가 환관임에도 불구하고

환관의 대척점에 놓여있던

청류파 사인들을 풀어주는 데 찬성하였고

이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주요 원인은

황제 가까이에 있는 환관들 중에 있다며

사리사욕이 심한 자들을 골라 숙청해야 한다고 간언했습니다.

 

여강의 말을 들은 황제는

지금의 조정 분위기가 십상시의 손아귀에만 놀아난다 여기며

이들과의 거리를 잠시 두는 것으로 마음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영제는 십상시들을 모두 숙청할 수도 있었지만

궁궐에는 십상시의 보호 아래 놓여있는

십상시의 추종파들이 많았기 때문에

과감하게 십상시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궁궐 질서에 너무 많은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이 아닐까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영제는 십상시를 불러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것에 대해

백성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는 책임을 물었고

잠시, 자숙의 시간을 가져라는 식의 질책에 그쳤습니다.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들을 멀리한 영제는

이 기회를 틈타, 처남인 대장군 하진과 가까이 지내며

그동안 탁류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궁궐의 권력 세력을

청류파 사인들 쪽으로도 힘을 주며 균형을 맞춰갔습니다.

 

하지만, 여강의 간언으로 인해 입지가 좁아진 십상시와 환관들은

극도로 여강을 미워하였고

십상시 조충과 하운은 여강이 정사를 의논한다며

곽광전을 수회에 걸쳐 읽고 있다고 영제에게 일러바쳤습니다.

 

곽광전은 과거 전한 시대에 한나라가 기울어져 갈 무렵의 내용으로

곽광이라는 신하가 질서를 바로잡으며 국가를 살렸으나

왕의 자질이 없다 판단되면 황제를 갈아치우기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조충과 하운이 참소한 여강의 곽광전 이야기는 모함이었으나

이미, 황제는 곽광전을 탐독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두려움에 떨어

당장에 여강을 잡아오라고 명했습니다.

 

 

 

여강은 황제가 자신을 잡아들이라는 명이 내려졌다는 말을 듣고서

얼마 전, 자신의 간언이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며

더 이상 조정에는 희망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당시, 환관들이 담당하고 있던 북사옥 (北舍獄)

살인범이나 역적으로 판단된 사람들을 모아

전문적인 고문 기술을 사용하여

없던 죄도 만드는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러한 환관들의 고문 행태를 익히 알고 있던 여강은

온몸이 찢겨나가는 지옥을 견딜 바에야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여강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조충과 하운은

황제가 직접 묻기도 전에 목숨을 끊은 것을 보아하니

분명, 자신의 죄를 밝히기 두려워했음이 명백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제는 이제 곽광전에 관심을 두는 자가 없어져 마음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여강의 죽음 이후에도

십상시의 횡포에 대한 상소는 계속 이어졌는데

낭중(郎中) 벼슬을 하고 있던 장균은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십상시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정국이 혼란한 이유로는 십상시가 뇌물을 태산처럼 쌓아두고

백성들은 그저 벼슬아치들의 배를 불리는 고생만 하다

결국, 민심은 황건적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이제라도 민심을 돌리기 위해서

당장 십상시들을 참수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편히 한다면

분명 지금 같은 반란은 줄어들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에, 영제는 십상시를 불러 백성의 원망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했으나

환관들은 얼른 영제 앞에서 관을 벗고 신발을 벗으며

납작 엎드리면서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잘못이라

스스로 낙양의 옥에 넣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십상시의 태도를 보며 영제는

이제 환관들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영제는 죄를 자처하는 십상시를 모두 용서해주었고

되려, 장균에게 선량한 십상시를 모함하려 든다며

옥에 가두어 매로 처벌하여, 장균의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한편,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던 시기

예주 자사로 선발된 왕윤은

황보숭, 주전과 함께 황건적을 토벌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왕윤은 평소 관직 생활을 할 때도

도리에 어긋난 일을 싫어하여, 환관들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러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윤은 십상시의 수장인 장양의 문객 중 하나가

황건적과 내통한 편지를 입수하게 됩니다.

 

왕윤은 환관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장양이

한창, 황건적과의 전쟁 도중에서도

밀서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담아

영제에게 장양의 죄를 고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끊임없이 십상시에 대한 이런저런 상소문이 올라와

이를 받아보던 영제였지만

황제는 이미 환관에 대한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기로 결심한 터였습니다.

 

장양은 다시 한번, 영제 앞에서

여러 차례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사죄를 했고

영제는 이러한 장양의 모습을 보고서는

제대로 근신하라고 책망하는 데 그쳤습니다.

 

황건적의 난이 진압된 다음 해

왕윤은 체포되어 하옥되었고

이후 대사령이 내려져 풀려난다 싶었지만

10일 만의 장양의 모함으로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고결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던 왕윤이

두 차례에 걸쳐, 하옥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대장군 하진과 원소, 원술의 숙부인 원외가

공동으로 상소해 왕윤을 보호했습니다.

 

황건적을 진압하는데 앞장선 왕윤에게 상을 줘도 모자를 판에

되려 억울한 누명을 씌워, 목숨을 앗으려 하니

제발 황제의 올바른 판단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는 당고의 금 사건 이후로부터 내려온

환관과 사족의 정면대결 양상이 심화된 현상으로

영제는 조정의 권력 균형을 위해 이것 만큼은 피하고 싶어

왕윤의 사형만은 면하게 해주었습니다.

 

184, 백성들의 궁핍함으로 발생된 황건적의 난은

관군의 진압으로 1년 만에 제압되었으나

백성들의 삶은 전혀 나아진 바가 없었습니다.

 

다음 해인 185년에는 궁궐의 운대와 낙성문 등의

여러 재물이 화재 사건에 휘말렸는데

십상시는 이를 빌미로 중건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모든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야 된다고 영제를 설득했습니다.

 

이에, 훗날 오나라의 제갈량이라 불리던 육손의

집안 어른인 육강이 또다시, 상소를 올렸습니다.

백성들로부터 물자를 빼앗아 한낱 재물을 보수하려 하니

어찌,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 길을 걷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환관들은 육강이 황제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망국의 군주라는 막말로 대불경죄를 저질렀으니

육강을 체포하라 이르렀습니다.

육강이 함거에 실린채 끌려오자, 사족들이 나서 변호하였고

육강은 겨우 목숨만은 유지한 채 면직당한 후,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황건적을 진압하는데 활약이 컷던 황보숭은

장각을 토벌할 당시, 업성에 있던 조충의 집을 보고

황궁의 규모보다 더 크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한나라 기준에서는 이러한 건축은 법을 어긴 행위였기 때문에

황보숭은 황제에게 이르러, 조충의 집을 몰수했습니다.

 

조충은 이 일로 황보숭을 원망하게 되었는데

이후, 황보숭은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데 있어

불필요한 자원과 병력을 너무 많이 소모시켰다는 명목으로

좌거기장군의 지위를 박탈, 급여 또한 줄이면서

결과적으로 난을 진압한 공로보다 되려 못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삼국지 16번째 시간으로

황건적의 진압 이후에도

여전히 십상시의 횡포가 끊이지 않은

조정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