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비이원시크릿] 순수존재의식의 상태에서 소망하기

Buddhastudy 2024. 3. 12. 19:49

 

 

근원적인 질문이 나왔어요.

소망에 대한 심상화를

순수의식의 평정제복 상태에서라고 말씀하셨는데, 책에서.

어떻게 그러한 의식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이렇게 질문하셨거든요.

 

쉽게 말씀드리면 가능합니다.

가능한데 의식에 대해서 구분하는 게 조금 필요해요.

 

이 세상이 표현되는 모습에 대해서 한번 살펴볼게요, 간략하게.

처음에 일원성의 상태라고 칠게요.

일원성의 상태가 있습니다.

이 일원성의 표면이 슬쩍 움직임을 시작해요.

슬쩍 움직임을 시작합니다.

 

일원이라는 상태에 대해서 쉽게 이해하시려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여기다 점을 찍어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점이 있어요. 없어요.

있다 없다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이유는 뭐냐 하면

있다라고 말을 하려고 하든, 없다라고 말을 하려고 하든

이 점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인식이 되어 있어야 되거든요.

그래야지 있다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죠.

이게 일원성인 상태예요.

일원성인 상태에요.

 

이 점은 어찌 됐든 간에 있습니다.

왜냐면은 이원성이 움직였다는 사실은

일원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것의 근원이 되는.

 

이것을 떼야만 이제 이 점이 보이죠?

이것을 떼기 전까지, 움직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점이 드러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거죠.

 

일원성의 상태에서 슬쩍 어떤 하나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라고 칠게요.

이때 이 지점이 존재의 핵점이 되는 거예요.

존재의 핵점이 되는데

여기에서 나타난 의식의 상태가 Am의 상태예요.

의식의 상태가 Am의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 Am은 순수한 있음에 가까워요.

그런데 순수한 있음인데

이 순수한 있음에 대해서 잘 받아들이셔야 됩니다.

없음에 가까운 있음이에요.

 

이유는 뭘까요?

주어가 없어서 그래요.

그래서 뭐가 생겨납니까?

‘I am’라는 허수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또 뭐가 생겨납니까?

 

‘I am’, 이 지점을 순수존재의식이라고 불러볼게요.

‘Am’, 이 지점을 순수의식이라고 불러볼게요.

 

의식 자체는 이렇게 사실은 구분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

그냥 이 순수의식 하나만 있는데

이것들이 그냥 드러나는 세상에서

작용하는 기능적인 그런 부분들 있죠?

이런 부분들을 굳이 분류를 해보자면

이렇게 표를 만들어서 한번 사용을 하고 있는 겁니다.

 

‘That I am’이 해당하는 부분이 뭐가 되겠어요?

삼라만상이 되는 겁니다.

‘I am’의 부분이 있죠.

‘I am’ 부분이 자아의식이에요.

불교에서 이야기했던 7식이 되는 겁니다.

말라식이라고 부를 수 있죠.

 

이 순수의식의 영역에 해당하는 이 부분이

불교 유식학에서 이야기하는 8식의 영역에 해당이 되는 건데

물론 이러한 구분 자체가 정확하게 딱, 딱 상응되는 건 아니에요.

서로가 서로를 포함을 하고 있으면서도

특징들이 또 전부 다 있습니다.

심리학이니 뭐 그런 것하고도 전부 다 마찬가지예요.

 

이것은 이것에 완벽하게 대응되고 막 그런 건 아니에요.

이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이제 한번 살펴보는 거예요.

 

 

--의식의 분화 내가 있음

Am의식에서 I am으로 분할하면서

내가 있음이라는 상태가 됩니다.

 

내가 있음이라는 상태가 되는데

‘I am’내가 있음이라는 상태

이게 마하라지가

명상법을 물어보는 사람한테

내가 있음에 머무르시오라고 말을 해줘서 좀 유명해졌는데

이게 영어로 갖다가 이렇게 다 옮겨놓고

이걸 한국말로 해석을 하니까 뭐가 된 거예요?

내가 있다이런 식으로 번역이 된 것일 뿐이지

사실 이것은 뭐냐면은 (내가 있음을 안다) ‘에 가까워요.

 

I am, 순수존재의식이라는 거는 앎에 가깝습니다.

순수한 앎인 거예요.

 

그런데 뭡니까?

이 앎이 앎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드러내서 활동을 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여기 앞에 아이가 붙었죠?

나라는 허수가 붙었죠?

이거 뭐예요? 이게 뭐라고 말씀드렸죠?

이것도 대상이라고 말씀드렸죠.

 

사실 이 Am 의식 자체도 대상이에요.

누구의 대상이에요?

여기서 볼 때는 대상이에요.

 

어찌 됐든 이건 아주 깊은 수준의 수행이 필요한 부분이니까

내가 있음이라는 이것을 갖다가 문자 그대로

내가 있다이렇게 주어 동사 이런 식으로 파악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있음이라는 표현한 이게

이 순수존재의식이라는 게

지금 이 순간을 알고 있는 앎의 느낌에 가깝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아는 앎의 느낌에 가까워요.

 

그래서 그 앎이라는 것

앎이라는 것 자체만 따로 떼어놓고 딱 보면

예를 들어서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어떤 앎을 상정을 한다면은 뭡니까?

그 앎이 자기 자신을 몰라요.

?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모르는 상태가 돼요.

 

그래서 이 앎의 뿌리는, 있음의 상태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앎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없음이라고 표현해요.

 

있음이면서 그전에 없음이었고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이면서 그전에 모름인 거예요.

 

물론 이렇게 Am의 상태로 드러난 의식마저도

일원성의 차원에서 볼 때는 뭡니까?

역시 동일한 대상입니다.

 

이게 순수의식이고, 바탕의식이고, 우주의식이고, 합일의식이고, 신의식이고

막 이야기를 합니다.

그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면은

이 모든 것을 아는 앎의 그 느낌 자체를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머무르다 보면

이 앎의 속성이라는 게 알려지게 돼요.

 

이 앎의 속성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직접 체험을 해보시고

이 앎의 느낌 자체가 자각하게 됩니다.

자각이 된 상태에서 뭘 하라는 얘기예요?

 

상상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인식하라는 겁니다.

상상이라는 방식을 동원을 해서 인식하시는 거예요.

그게 심상화예요.

인식하시는 거예요.

 

 

--눈앞의 심상이

그렇게 되면 뭐가 되냐면요

I am That I am이라는 도식이 만들어지면서

지금 눈 앞에 나타난, 상상의 형태로 나타나 있는 그것 있죠?

그거 자체가 가 되어버린 거예요.

I am That I am이 되는 거예요.

 

이 앎이 자기 자신을 알아보기 위한

거울과 같은 대상으로서 무엇을 사용하는 거예요?

심상을 사용한 거예요.

 

어찌 됐든 간에 이 앎의 느낌을 자각한 다음에

여기에 머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게 순수존재의식 자리에서의 심상화를 하는 데 있어서 키 포인트가 되는 거예요.

순수존재의식의 상태라는 것을

어떤 아무런 평정도 없고

이렇게 막 하는 그런 상태로 대상화해 버리는 순간

어떻게 돼버려요?

순수존재의식이라는 어떤 하나의 상태

이게 실체화가 되면서 그게 대상이 돼버리죠.

대상이 돼버리는 순간 뭐가 또 생겨요?

그것을 아는 앎이 또 생겨버리죠.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어요?

 

?이라는 거는

‘I’라는 허수를 가지느냐 안 가지느냐 뭐 이거 따지기 이전에

그 어떤 상태가 되든지 간에

심지어는 앎이 앎 자신을 스스로를 알아보는 상태가 되든지 간에

대상을 통해서 그것을

존재하는 대상을 통해서 알아보는 앎에 가까운 거예요.

이 앎이 순수존재의식인 겁니다.

 

그렇지 않고 순수존재의식이란 이러이러한 상태다라고

상을 딱 만들어버리는 순간 뭐예요?

그 상은 뭡니까?

순수존재의식에 의해서 알려지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아시겠죠?

 

그래서 순수존재의식의 상태라는 것

평정지복의 상태라는 것을 실체화했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 소망에 대한 심상화를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라는

질문이 나오는 겁니다.

 

이해가 되세요? 좀 어렵죠?

딴 게 아닙니다.

 

앎의 느낌 자체를 찾아서

계속 머무르는 수행을 하시는, 주시자 수행이에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개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여러 가지 영적 체험들을 할 겁니다.

그 체험들을 거쳐가고

이제는 이 앎 자체가 각성돼서

항상 함께하고 있는

스스로가 알려지는 그런 상태가 돼요.

 

이 상태에서는 뭐냐 하면

인식되는 모든 대상들이

나 자신의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제가 방금 나라고 할 때

여러분들 흠칫하면서 여기로 오지 않았나요?

느낌이?

이 몸으로 오지 않았나요?

 

나 자신의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딱 할 때.

여러분들 스스로 한번 대 뇌어보세요.

 

나 자신의 그림자했을 때

흠칫하면서 여기로 오죠.

나라는 느낌이

이렇게 한번 체크를 해보시는 거예요.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면, 제대로 설명을 하자면

깊은 명상수행이 필요하긴 해요.

그래서 책에다가 쓸 때도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써야 되나?

 

다른 게 아닙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자체를

전체적으로 알고 있는 앎 자체를

끊임없이 느껴보세요.

 

누누이 말씀드리자면

이 앎마저도 사실은 뭡니까?

대상이라는 얘기입니다.

일반성인 차원에서 볼 때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

드러나 알려지고 있잖아요.

뭐가?

앎이.

앎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식되는 모든 대상은

결국 진정한 나라고 볼 수 있는

일원성의 궁극 실제의 상태에 의해서 인식되고 있는 대상이에요.

그런데 일원성의 상태, 궁극 실제의 상태라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대상 바라보듯이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인식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거는

사실 앎이 아니에요.

앎의 그림자예요.

 

진짜 앎은 뭡니까?

그래서 얘를 유일한 주시자라고 부르게 됩니다, 결국.

 

이 부분은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애매한 게 뭐냐면은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이러한 영적 상태를 체험해 보셔야 돼요.

이러한 의식의 상태를 한번 체험해 보셔야지

제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