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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ye Sophia] 호모사피엔스를 '멸종'시키려는 부처님의 계획?!

Buddhastudy 2024. 4. 17. 19:50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는 최상위 동물은 단연코 인간입니다.

학명으로는 호모사피엔스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호모사피엔스가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 역사학자 유발하라리는

호모사피엔스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을 믿는 능력에 의해

지배종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가상의 것들을 현실화시켜

조직을 키우고, 집단의 협력으로 경쟁자를 물리쳤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상상으로 신을 만들고 그 신을 믿게 되면서

사회 구성원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신이라는 상상의 매개체를 통해

씨족이나 부족을 넘어

국가까지 이룰 수 있었던 것이죠.

여기 상상으로 법과 사회 규약을 만들어 따르게 함으로써

더 강력한 파워를 행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발하라리는

상상을 믿는 호모사피엔스의 능력을 [인지혁명]이라 표현합니다.

 

그런데 왜 호모사피엔스는 상상을 믿는 특성을 지녔던 것일까요?

사실상 인지혁명이 중요한 것이라면

그 원인이 되는 본연의 성장에 더 주안을 둬야 하지 않을까요?

 

그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호모사피엔스는 다른 호모 종족에 비해

유달리 [자애감]이 강했습니다.

쉽게 말해 나에 대한 집착이 컸고,

이것을 불교 용어로는 [아상]이라 합니다.

 

다른 호모 종족들이 나의 생존에 집착했던 것에 비해

호모사피엔스는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은 뒤까지 걱정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호모사피엔스는

사후에도 존재하는 나를 상상하고

결국 영혼까지 구체화합니다.

 

호모사피엔스의 상상력의 근원은

과도한 아상에서 비롯하였고

이것이 결국 집단화를 이루는 강력한 동인이 되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기이하게도 호모사피엔스의 아상은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사후에도 가 존재한다고 상상했지만

불안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후의 영혼도 언젠가는 소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순환한다는

윤회론을 만들어 냅니다.

윤회를 통해 영혼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안심해도 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장구한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윤회 역시 언젠가는 멈출 때가 올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호모사피엔스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상상에 박차를 가합니다.

 

어떻게 하면 가 영원히 살 수 있을까?

여기서 한 무리는 절대자, 신을 상상합니다.

신이 구원해 주면 된다고 믿으면서 숱한 종교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좀 더 의심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그것은 생멸을 거듭하는 가짜 나를 버리면

영원히 죽지 않는 진짜 나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가짜 나는 번뇌망상을 일으키며 윤회의 사슬에 매여 있지만

진짜 나는 우주의 바탕에 그대로 머물러 영원히 존재한다는 발상이지요.

그래서 마음을 닦아 진짜 나를 되찾는 노력을 하게 되고,

이런 행위를 통칭하여 [수행]이라 부릅니다.

 

결국 우리 사피엔스 종족은

가 잘 되기 위해 끝까지 상상을 일으켰고

그 최종점에 [신의 구원][자력 깨달음]의 두 명제를 도출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인 구원과 깨달음이

곧 아상의 고도로 정교화된 결정체라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한마디로

아상으로 세상의 지배종이 되었고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였습니다.

또한 구원과 깨달음까지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유발하라리의 말을 빌리면

한낱 상상에 불과합니다.

상상을 믿는 기괴한 종족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우리 호모사피엔스를 대변하는 것은 바로 상상력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호모사피엔스를 멸종시키려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그는 얼마 동안의 수행을 통해

모든 것이 상상으로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상상의 뿌리는 아상이고요.

 

세존은 잘 되기 위해 모든 것을 꾸며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어 합니다.

당시 수행자들을 지배하던 브라만교회의 교리 자체도 허구였던 것이고요.

 

그래서 그는 아상의 상상력을 끊어내기 위해

과감하게 無我를 들고 나옵니다.

無我가 되면 아상은 옴짝달싹 못하고

호모사피엔스의 상상력은 멈추게 됩니다.

 

그러면 혹시 과거의 네안데르탈인처럼

다소 후진적 종족으로 퇴보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존은 네안데르탈인이 중시했던 생존에 대한 집착마저 없앱니다.

무아론은 다양한 호모 종족을 넘어

생명체가 지닌 모든 집착과 상상력을 포맷시키는

일대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상상력이 없어진 마음 상태는 과연 어떨까요?

이것을 불교에서는 [그냥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여기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냥 있는 상태가 되면 깨닫게 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때부터 잘 되려는 상상이 쏙 빠지기 때문에

순전한 논리적 사고가 가능하게 됩니다.

 

로 물든 상념이 빠지면

저절로 존재의 비밀에 대한 화두가 떠오르고

이때부터 불교의 지혜가 순차적으로 피어나게 됩니다.

그 끝이 반야의 완성이라는 무상정등각이고요.

 

이것이 세존이 전하려던 불교의 원형입니다.

당신은 혹시 불제자를 자청하면서

가 잘 되기 위해 꾸며낸

참나의 열반에 쏙 빠져 있지는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