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그라운드(2024)

[신박한깨달음] 인류는 자연스러운 본연의 존재 상태를 깨달아야 한다|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

Buddhastudy 2024. 6. 18. 19:09

 

 

영적 깨어남은, 동굴 속에서 수십 년 동안 명상을 했다든가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나타나는 희귀한 현상이 아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점점 많은 이들이 영적인 깨어남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깨어남을 경험한다고 해서

단번에 에고가 녹아 없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우월감에 취하거나 일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등

에고에게 더욱 거세게 휘둘리게 될지도 모른다.

 

깨어나면 마냥 행복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깨어남 이후의 삶이 얼마간은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영적 스승인 아디아샨티는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라는 책을 통해

깨어남은 어떤 경지에 오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무엇이 분리를 자아내고 있는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즉 깨어남은 여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오늘은 깨달음에 관심 있는 사람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깨어남이란 무엇인가?

 

깨어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깨어남은 인식의 전환이다.

이전까지 나를 하나의 고립된 개체로 보아왔다가

훨씬 더 보편적인 존재로 보게 되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영적인 깨어남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아니다.

진정한 깨어남 속에서는 깨어남 그 자체까지도

나만의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아주 명확히 알게 된다.

바로 보편적인 의식이 스스로 깨어나는 것이다.

 

깨어남을 통해 드러나는 사실은

우리는 어떤 사물도,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어떤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는 모든 사물로서, 모든 경험으로서, 모든 개인으로서

나타나는 그것이다.

우리는 온 세계를 꿈꾸어 존재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며

특정 공간을 차지하는 어떤 특정한 사물도, 특정한 누군가도 아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은

아무것도 아닌 이면서

동시에 일체의 모든 것이다.

 

사람마다 나름의 행로가 있겠지만

진리를 분명히 보았다면

그것이 지속되든 그렇지 않든

이것은 분명 깨어남인 것이다.

 

이 깨어남은 그저 잠깐 나타날 수도 있고

혹은 한두 달 동안 나타날 수도 있다.

 

먼저 순수의식이 눈을 뜨면서

따로 분리된 나라는 관념이 떨어져 나간다.

사실상 영적 과정은

깨어남 이전이나 이후나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만 깨어남 이후에는

그 과정이 좀 다른 관점에서 벌어진다는 것뿐이다.

 

여전히 우리는 같은 세상을 돌아다닌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자신이

어떤 특정한 몸이나 인격에 한정된 존재가 아니며

주변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진정한 깨어남 뒤에 따라오는 혼란

 

사람들은 영적으로 깨어나기만 하면

영원한 황홀경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깨어남이 무엇인지에 대해 매우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깨어남에 따르는 지복상태가 있을 수는 있지만,

사실 그것은 깨어남의 부산물이지

깨어남 자체는 아니다.

그 부산물을 쫓아다니는 동안에 우리는 진짜를 잃게 된다.

 

우리는 영적 수행을 통해

뭔가 긍정적인 감정 상태를 얻어보려는 추구를 포기해야만 한다.

깨어남의 길은 어떤 긍정적인 감정 상태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이란

전혀 쉽지도 긍정적인 것이지도 않을 수 있다.

 

깨달음에 관한 또 다른 오해는

그것을 뭔가 신비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천지자연과 하나가 된다거나

신과 합일된다거나 하는 경험을 기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신비의 경험은 깨어남과는 다르다.

물론 이 신비 경험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신비 경험은 매우 긍정적인 측면에서

에고적인 자아의 구조를 극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깨어남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은 나의 경험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아는 것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완전히 다른 어떤 패러다임으로

하나의 세계로부터 다른 하나의 세계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여러분이 보는 것과 다른 세상을 본다는 뜻이 아니다.

의자를 보지만

동시에 자신을 의자와 별개의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것, 느끼는 것, 듣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말 그대로 동일한 것의 한 현현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영적인 수행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희망사항은

에고가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에고 상태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 고통에서 영원히 놓여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깨어남 자체가 곧 에고의 용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에고가 녹아 없어지든 그렇지 않든 깨어날 수는 있다.

 

그리고 깨어남이 가져오는 최후의 결과는

에고의 급격한 용해이다.

에고가 이 과정에 순순히 협조할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에고는 온갖 수단을 다하여

이 용해의 과정에 저항할 것이다.

 

그러나 과정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궁극적으로 실재를 잠시라도 일별했다면

때가 이르러 에고가 용해되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깨어남 자체는 아주 혼란스러울 수 있다.

우리가 사실이라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알고 보니 사실이 아닌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 여겨왔던 이 사람이

알고 보니 자기가 아닌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당혹스럽게 느껴질 수가 있다.

그가 완전히 깨어 있는 상태라면

이런 의문은 생기지 않지만, 처음엔 그런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깨어남 이후에 더 밟아가야 할 변화 과정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런저런 의문이 일어나지만

이 의문에 대해 마땅한 대답은 없다.

어떤 대답이 주어지든 간에 에고에게는

그 대답이 또 하나의 목표가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모든 것에게 주어지는 선물

 

깨어남의 순간에 붓다는

, 그리고 모든 곳의 모든 존재가

다 함께 해탈을 이루었다고 했다.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는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만약 모든 것이 깨어났다면 나는 왜 깨어나지 못했을까?

 

여기서 붓다가 전하려는 뜻은

깨어난 것은 붓다가 아니라는 것이며

깨어난 것은 전체라는 것이다.

전체가 붓다를 통하여 깨어남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온 세상이 깨어나게끔 허용하는 것이다.

온 세상이 깨어나게끔 허용하는 길 중 하나는

온 세상이 자유롭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당신이 온 세상에게 자유를 주기 전까지

당신은 결코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깨어남의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자유라는 개념은 아주 중요하다.

모든 이는 제 본모습대로 살아가게 되는데

모든 이가 본모습대로 살아가게끔 허용될 때만

자신 안에서 정직해지고, 참되고, 진실해질 능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깨어남은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질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온 세상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 깨어남의 의미라 여긴다면

그건 완전히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깨어남을 얻은 한 존재가 있었는데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위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 하나님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진실이라 알고 있던 대로를 표현한 것 때문에

그는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다.

 

어느 사회에나 진실로 깨어난 사람들은

제거하고 죽이는 기나긴 역사가 존재한다.

진실한 깨달음은 꿈꾸는 상태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많은 경우 꿈꾸는 상태는

진실한 깨달음 때문에 불편해지고 위협을 느낀다.

왜냐하면 진실로 깨달은 존재는

죽이겠다는 위협으로도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깨어남이라는 경험의 일부는

[이 우주가 환영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깨달아 알게 되는 하나의 지식이다.

우리는 자신과 별개로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세계 따위는 없음을 발견한다.

완벽한 깨어남은 자신을 책임질 때 비로소 찾아오는데,

우리가 자신을 정말로 직시하고

꿰뚫어 보려는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을 깊이 직시함으로써

우리는 막다른 골목들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에고가 실제의 본성을 보고는

엉뚱한 결론을 지어내기를 멈출 때

그때는 전혀 다른 어떤 인식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에고의 환영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는 영역이다.

그곳은 우리 모두가 향해 가는 곳이자

영적 진화 그 자체에 이미 깃들어 있는 본성이다.

 

 

--마음 차원의 깨어남

 

우리 인간이 정말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을

생각하는 데 소비하는 시간은

어림잡아 전체의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의 시간은 온통

상상이나 환상에 빠진 채로 살아간다.

 

깨어남이 있은 후

생각은 점점 필요한 범위 내로 좁혀져 간다.

이러한 마음의 변성은 시간을 두고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이 변성이 물질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더 이상 마음에 붙들려 있지 않게 되면

마음은 이완되고 부드러워져서 활짝 열린다.

우리 마음이 새롭게 깨달은 것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과 뇌의 재조율이 필요하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마음뿐이다.

마음의 차원에서 나뉨 없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마음 한쪽에서는 이렇게 해야 해라고 하면서

다른 쪽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하는 것처럼

분리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갈등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대부분은 극심한 갈등 속에 있다.

이렇게 극과 극을 달리는 생각들이 마음의 차원에서 분리 상태를 불러들인다.

마음은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며

다만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모든 일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여러분이 운전하는 차, 들어서는 빌딩이나 쇼핑몰 등

이 모두가 누군가의 마음에서

하나의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아이디어가 행동으로 옮겨져서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 속에서 마음은

단순히 하나의 도구로만 보이지 않게 된다.

마음이 인간 자신의 실상으로 둔갑하고

급기야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자아관념이

다름 아닌 자신의 사고과정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어버렸다.

 

깨어남의 빛이

마음의 차원을 꿰뚫어 비치기 시작하면

우리는 마음이 그 어떤 고유한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마음은 실재가 이용하는 하나의 도구이지 실재는 아니다.

예를 들어

목이 마를 때 그 생각을 마실 수는 없다.

물질로 이루어진 그 유리잔을 들어 실제로 물을 마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경험이다.

 

하지만 유리잔을 들어 물을 마시는 동안에

유리잔이든 물이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는 있다.

이와 같이 생각 자체는 빈 껍질이다.

 

 

--천국은 존재 본연의 상태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깨달음은 깨어남과 아주 다르지는 않지만

그것은 깨어남이 성숙되어 이루어지는 어떤 것이다.

 

부처는 태초로부터 오로지 열반만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가 바로 천국에 있었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열반은 바로 여기

정확히 우리가 서 있는 곳임을 우리는 깨닫지 못했다.

 

인류에 대한 가장 큰 공언은

바로 우리가 깨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 전체가 들어있는 의식상태를

말 그대로 떠나는 것이며

우리 존재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일을 해내면

우리는 하나의 새로 태어난 존재로서 돌아오는 것이다.

그저 [자연스러운 본연의 존재 상태]라고 하는 것이

깨달음의 가장 훌륭한 정의이다.

 

우리는 지금껏 분리와 두려움과 갈등을 경험하는 것이

인류의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생각하게끔 세뇌되어 왔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이 깨어서 좀 더 또렷해지면

이러한 분리 상태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천국은 존재 본연의 상태이다.

열반은 우리가 매달려야 할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손에 넣으려고 애쓰거나

얻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임무를 지워야 하는

어떤 경지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전적으로 자연스럽고 스스럼없는

[존재 방식을 깨달음]으로써만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저 맑게 깨어 있는 가운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음으로써만 경험될 수 있다.

 

이것이 깨어남이 주는 약속이다.

이것은 단지 자기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개인적 약속이 아니라

의식 자체에 대한 약속이며

나아가 모든 존재에게 주어지는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