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정목스님_유나방송

정목스님_나무아래 앉아서 제24회

Buddhastudy 2015. 1. 22. 20:05

"> 출처: 불교TV

 

 

 

순간을 참고

하루를 참고

그렇게 한 생을

인내하며 견딥니다.

 

땅위에 오체투지 하는

티베트 순례자들로부터

인내하는 법을 배웁니다.

 

삶의 고통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안녕하세요. 정목입니다. 영성의 사진작가 이혜선 선생의 작품을 보다가 발견한 글입니다. 순간이 모여서 영원이 되고, 또 하루가 모여서 한 생이 되기도 하죠. 참고 인내하는 그 찰나 같은 순간이 없었다면 한 송이 꽃 또한 피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도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견디고 있는 저 대지에게서 인욕의 지혜를 배우며 오늘 순서 시작하겠습니다.

 

..

 

봄이 되면 새순이 돋고 또 땅 밑에서 생명을 밀어 올리는 힘. 그게 신비한 힘이 아닐까요? 입춘 지나고 정월 대보름 지나면서 봄은 빠른 속도로 우리 곁에 찾아오고 있습니다. 3~4년 전에 영국에서 달팽이 모양으로 음각이 된 그런 사암조각 하나를 발견한 적이 있데요. 이걸 감정을 해봤더니 한 45백년 정도가 되었다니까, 우리에게는 엄청난 오래된 조상인거죠. 그때 당시에 그려진 것이니까, 학자들로서는 여기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당연히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학자들은 또 의미를 파 해치기 위해서 연구에 연구를 하죠. 그런데 45백 년 전에 그려진 달팽이 모양이 별 의미가 없었다라고 판정이 되었다.

 

말하자면 45백 년 전 그 시대에 사람들이 사암조각에다가 벽이나 이런데다가 낙서를 한 거예요. 낙서라고 하는 말을 들으니까 우리가 언제 낙서를 해봤나? 참 까마득하고 아득해지지 않나요? 여러분은 평소에 글 쓰시는지요. 낙서도 좀 해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떠올려 보니까 오래전에는 정말 낙서를 잘했던 거 같아요. 아무거나 의미 없이 그려보고, 또 아무거나 써보고, 경을 읽다보면 사경이라 해서 제대로 이렇게 정갈하게 앉아서 쓰는 사경이 아니라, 그냥 마하반야바라밀, 금강반야바라밀, 그냥 이렇게 낙서하듯이 자유롭게 쓰는 게 있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자유롭게 쓰다보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이야 뭐, 아이티 기기문명이 발달하면서 낙서하고는 점점 멀어지고, 거의 사람들이 색연필이나 연필? 이런 거를 쓰기보다, 직접 만년필로 쓰기 보다는 아무래도 키보드에도 손을 얹어놓고 빠른 속도로 다다다닥, 이렇게 기계에 위에서 손가락을 피아노 치듯이 치는 그게 훨씬 더 우리에겐 더 익숙하죠. 저는 사실 키보드보다는 지금도 연필이나 팬 종류가 훨씬 편합니다. 그건 글씨를 잘 쓰고 못 쓰고 하고 관계없이 연필을 들고 내가 직접 쓰다가 몽당연필이 점점 되어갈 때 칼로 깎아서 사각사각사각사각 써나갈 때, 연필심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도 질감이 참 좋거든요.

 

이렇게 낙서를 하다보면 사람의 마음이 참 풍성해지는 거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요즘 미국에서는 직원들에게 낙서를 권장하고 있는 그런 회사가 늘어나고 있데요. 벽면 전체에다가 하얀 백지를 붙여놓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종이를 발라놓고, 마음대로 한번 써 봐라. 아이디어도 써보고 이것저것 그냥 아무거나 그려보고 그러라고 그런데요. 그러니까 직원들도 즐겁죠. 낙서를 막 하다보면 거기에서 창의적인 생각도 나오고, 생각도 못했던 새로운 발상이 또 나오기도 하고, 낙서라는 것은 고여 있던, 그 웅덩이의 물을 흘러갈 수 있도록 물고를 터주는 것과 같은, 그런 게 낙서가 아닌가 싶어요.

 

여러분도 오늘은 연필 좀 깎아가지고요, 또 아니면 팬이나 이런 거, 손으로 딱 들고, 이 손가락 사이에 3개가 모여야 되잖아요. 여기 연필이 딱 들어오잖아요. 딱 들고 의미 없이 한번 그려보는 거죠. 우리가 뭘 글을 쓸 때 꼭 거기 의미가 있어야 하고, 발원이 들어가야 하고, 굉장한 거기 내용을 담아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생각 없이 한번 술술술술 쓰고 그려보세요. 그러다보면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워지는 가운데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어떤 문제들이 해결되기도 하고 그럽니다. 젊은 사람들에겐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그런 팔로우가 될 수도 있죠. 세상에는 계획 된 것보다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도 있다. 생각하시면서 봄에 자신만을 위한 낙서 한 번 해보는 것도 즐거운 꺼리가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 1년 중에 2월은 날자가 가장 짧잖아요. 날짜가 가장 짧으니까 아쉽다 하는 분도 있지만, 저는 가끔 그런 얘기를 해요. 날짜가 짧으니까 미워할 일도 짧아지고, 원망할 일도 짧아진다고요. 또 속상하고 근심해야 하는 일도 짧아진다. 그래서 2월은 1년 중에 딱 한번 주어지는 근심 걱정 덜어낸 달이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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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 소리가 2월을 더 경쾌하게 만들어 주는 거 같죠? 그리고 새봄의 신선함을 알려주는 그런 새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잘 부세요? 저는 휘파람을 잘 못 불어요. 입모양을 이렇게 해서 휘휘휘 해보는데, 새소리 내보는 거 쉽지 않더라고요. 휘파람을 잘 부는 사람들은 입안에 새 한 마리를, 새장처럼 간직하고 사는 걸까? 어쩌면 휘파람을 잘 불까? 으흠. 옛날에는 휘파람 잘 불면, 플레이보이처럼 잘 노는 사람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런 거보다 휘파람을 잘 불면 그것도 아주 멋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가수이죠. . 오늘 바랑 속에서 봄소식과 함께 책 한권을 꺼내 볼까 하는데요, 여러분께 오늘 소개할 새로운 책, 보이시지요? 법정스님이십니다. 제가 얼마 전에 선물을 받았는데, 날마다 새롭게. 예담출판사에서 펴냈는데요, 일여님이 사진을 찍고 직접 글도 썼습니다.

 

스님의 미소와 맑은 가르침이 이 한권의 책 속에 담겨있는데, 마치 우리 곁에 살아계신 듯, 굉장히 따듯한 느낌이더군요.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스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고, 또 스님의 모습을 다시 뵐 수 있어서 아주 가슴 뭉클했습니다. 이 가운데, 제가 오늘은 법정스님의 손을 읽어드릴까 싶어요. 스님의 손에 대한 이야기. 먼저 들어보시고, , 사진을 한번 먼저 보여드릴까요? 스님 손 한번 보실래요?^^ 법정스님 손인데, 승복위에 이렇게 올려놓고 계시는 거예요. . 스님의 손에 대한 글이 아름다워서 오늘 바랑 속에서 이 책한 권, 읽어드릴게요.

 

법정스님의 손은 무척 큽니다.

승복위에 놓여있지 않다면

스님의 손이 아니라

노동자의 억센 손처럼 보입니다.

 

스님의 맑고 눈빛과

굵고 탄탄한 손은

참 조화롭습니다.

 

스님의 손이 희고 고아도 좋겠지만,

이런 손이 훨씬 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 손으로

참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삽과 괭이를 들고 밭을 일구었고

큰 돌을 옮기느라 힘을 썼습니다.

 

구릿빛 피부와 그 위에 튀어나온 힘줄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당신이 모든 일을 직접 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중생을 위해

목탁과 염주를 매만지고

청빈의 아름다움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자 펜을 잡았습니다.

 

또 세상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없는

아름다운 절 길상사를 만들고 가꾸었습니다.

 

스님은 법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소식은 결코 선방에서 들을 수 없다.

자비심으로 충만한 행동을 할 때만 온다.”

 

깨달음은 이 굵고 큰 손처럼

열심히 일하고 또 행할 때

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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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하모니카의 연주자를 천재적이라고 하나요? 죠파워스의 하모니카 연주, Michael Hoppe의 음악이었습니다. 벨라라고 하는 곡이었는데, 이 벨라는 Michael Hoppe 부부가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갔던 모양이에요. 이사를 가면 아무래도 그 지역과 동네사람들이 낯설죠?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만난 그 벨라라는 여인이 베풀어 준 친절, 그 친절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음악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런지 음악이 아주 아름답죠? Michael Hoppe의 음악은 소리 없는 소리, 그리고 묵언하는 순간처럼 아주 고요해서 제가 개인적으로 참 특별히 좋아하는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마음속에서 머릿속에서 만나본적은 없지만, , 이분의 음악을 들으면 내 마음에 뭔지 모르게 이렇게, 자각증상? 영성적으로 깨어나는 그런 느낌이 있다. 이렇게 항상 생각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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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을 읽다보니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이 가슴이 촉촉해 지네요. 정말 당황아고 놀라셨겠어요. 제가 이 사연을 읽으면서 신발 짝짝이 신은 거, 높낮이도 다는 걸 신고 뛰어갔을 것이 생각납니다. 상상을 해보니까 그 순간은 하늘이 노랗고 귀에 들리지도 않고. 엄마뿐이 아니라 가족이라면 친한 사람이라면 아마 다 그런 심정이겠지요? 다쳤다는 소리를 들을 때, 그때 우리는 그 찰나, 마음을 확~ 빼앗겨버립니다. “, 무슨 일이야?”라고 놀라기도 하죠. 그래요. 그렇게 자신보다 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그게 바로 어머니마음일거에요. 그리고 또 그 마음이 바로 관세음의 대자대비심이 아닐까요? 물론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의연하고 굳건하고 담대해져라 라고 말합니다.

 

놀라지 말아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당당하게 갈 수 있어야 된다. 이런 가르침이 있죠? 그리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홀로 갈 수 있어야 한다. 자식이 다치거나 죽었을 때조차 무소의 뿔처럼 혼자갈 수 있을 만큼 당연해야 한다. 이런 가르침을 주시지만 중생심이 어디 그렇습니다. 누가 다쳤다고 하면 그냥 달려가서 어디 다쳤어? 어디 다쳤어?” 저는 관세음의 자비심이 거기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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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 생애가 평온하기만 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누구나 평온한 한 생애를 꿈꾸기도 하죠. 굴곡이 있어도 그 모든 걸 통해서 배우는 자세를 가진다면, 그 또한 평온한 인생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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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성소, 성스러운 장소라는 뜻이에요. 깨달음을 완성하는 발원문 올리겠습니다.

 

대보살님들께 보호를 간청하오니

우리가 하찮은 병에 걸려도 두려워하며

의사의 말을 따르는데

하물며 수많은 번뇌와 병에 시달리고 있으면서

어찌 대보살들께 보호를 간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번뇌보다 더 무서운 병은 없기에

번뇌의 병 하나만으로도

모든 중생들이 전멸될 수 있거늘

어찌 대보살들께 보호를 간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제가 삼보에 귀의하고도

모든 고통을 없애주는 참된 진리를 따르지 않는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산을 오르다 낭떠러지를 만나도 조심해야 하거늘

무간지옥 같은 천길 지옥의 낭떠러지에서야

얼마나 더 많이 조심해야 하겠습니까?

 

적어도 오늘은 내가 안 죽겠지? 하는 마음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죽음이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르는 것.

누가 저를 이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겠습니까?

 

과거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세속의 삶을 즐겼으나

진리를 만난지금, 그 모든 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에 탐닉하느라

저는 부처님들의 가르침을 무시해왔습니다.

 

제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가족과 친척, 친구들을 모두 두고 저 혼자 떠나야 하거늘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모든 고통의 원인인 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낮이나 밤이나 오로지 이것만을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고 저질렀건, 모르고 저질렀건.

제가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악업은 무지 때문입니다.

 

중생들의 보호자이신 대보살들께서

두 손 모아 참회하고 절하고 또 절하니 받아주소서.

중생들을 자비로 이끌어 주시는 성자들이시여.

제가 지은 모든 악업으로부터 저를 구하소서.

삼보를 만나고 진리를 만난 이상

결코 작은 악행도 다시는 저지르지 않기를 서원합니다.

 

아름다운 서원, 마음에 간직하고 한 주 잘 보내십시오. 저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당신과 내 안의 거룩한 빛, 신성한 불성에 예경 올리며 오늘 순서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