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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13_2. 보시의 진정한 의미

Buddhastudy 2017. 8. 22. 20:04


보시라고 하면 불교의 대승불교에서 육바라밀 중에 첫째 덕목으로 아주 중요한 수행의 장르로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보시라고 하는 계절이 왔어요. 연말연시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이런 행위를 선뜻 , 이게 보시다.’ 라는 개념으로 떠올리는 게 많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보시는 이렇게 나아닌 누군가를 돕는 총체적인 행위를 보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보시의 장르를 이야기한다면 법보시라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또 소위 부처님에게 또 공양을 올리는 것도 보시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아주 가난한 누군가에게 나눠줄 수 있는 마음을 내는 것도 보시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이 보시라는 하는 것이 물질적으로는 나누고 정신적으로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수행까지도 연결되어진 것이 바로 보시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를 하더라도 우리가 어떤 보시를 해야 되느냐? 무주상보시를 해야 된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어요. 내가 누군가에게 물질적으로 돕 되, 그 돕는 부분을 칭찬을 받기 위한 거거나, 대가를 바라서 돕는 것이 아닌, 마음을 내지 않는 보시가 진정한 보시다.

 

그래서 이 보시에 대한 멋진 일화가 하나 있어서 소개를 드린다면 옛날 중국에 양무제라고 하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이 양무제는 불심이 아주 돈독했던 황제에요. 어느 정도로 불심이 돈독했느냐하면 오리에 암자를 하나 짓고, 십리에 절을 하나 지을 정도로 중국 전역을 그야말로 불국정토로 만들고 싶었던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당시에 수많은 경전을 편찬을 해서 많은 스님들이게 불교를 궁금해 하는 분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수님들에게 본인 황제가 스스로 공양을 지어서 공양 올리는 것을 너무 즐겨했습니다. 황제가 황포를 입고 스님들에게 밥을 나눠드리는 거예요. 얼마나 멋진 황제입니까.

 

그래서 그 양무제가 나는 불심천자다.” 라고 하는 얘기를 했어요. “나는 불교를 위해서 태어난 황제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대단한 불심이 있었고, 보시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달마대사께서 중국에 오셔서 양무제의 불심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양무제를 찾아갑니다.

 

양무제가 그 유명한 달마대사께서 오셨다고 하니까, 그 달마대사에게 갖은 공양을 다 올립니다. 그리고 양무제는 달마대사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지은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저는 어마어마하게 일을 많이 했습니다. 사찰도 지었고, 스님들 뒷바라지를 했고, 경전을 편찬했고, 그 스님들에게 공양도 올려서 불교를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지은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이렇게 물었거든요. 없다고 그랬습니다. 없을 무자를 하나 보여줬습니다.

 

그때 양무제는 화가 났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칭찬은 하지 못할망정 없다고 말을 하나. 그래서 양무제는 화가 나서 달마대사하고 결별을 해버립니다. 양무제는 달마대사가 미워서 내쫓아버렸어요. 달마대사는 그때부터 아직도 불심의 깊이가 뿌리내려지지 않았고, 내가 진리를 펴기에는 너무 이른 세월이기 때문에 소림사라고 하는 곳에 가서 9년의 면벽수행을 했던 일화가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어 집니다.

 

바로 양무제의 그 엄청난 불심의 행위를 없다고 표현한 이유가 뭘까? 바로 아상이 있는 보시는 보시가 아니다. 이런 얘기가 되겠죠. 그래서 양무제가 그 엄청난 공덕을 지어놓고도 본인 마음으로 내가 했다.”는 아상을 없애버렸다면 그야말로 무주상보시를 했다면 그 양은 한량없는 공덕이 되었을 텐데,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상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그 상은 영원한 공덕이 되지 않고, 언젠가는 닳아 없어질 공덕일수밖에 없는 아쉬움으로서 없다라는 표현을 하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에게 말씀을 드린 것은 보시를 하되 아상을 내지 말고 무주상보시를 해라. 내가 했다는 생각도 없는 마음으로 선뜻 누군가가 불쌍한 마음이 일어나거든 불쌍한 마음을 선뜻 주는 것으로 끝내야 되는 거지, “내가 언젠가 받겠다. 뉴스에 내 이름이 나가겠다. 누구로부터 칭찬을 받겠다.”라고 하는 생각을 내는 순간에 그 보시는 진정한 보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보시의 공덕은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보시 양이 전해진 공덕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것이 아닌, 써도 써도 닳아지지 않는 공덕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상이 없는 공덕, 보시가 진정한 보시다라고 하는 부분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